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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류한나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자 곽승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승재야, 판주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언제 와?”

고요한 차 안에서 백유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곽승재의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은서의 귀에 들렸다.

곽승재는 최근에 판주 투자은행을 인수했고, 백유미가 이사직을 담당하고 있다.

전생에 백유미는 판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커리어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납득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GS 그룹에 입사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지만 곽승재의 조롱만 받았다.

“네가 출근한다고?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어? 이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유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했는데 고작 호언장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비록 유미는 너보다 배경이 빵빵하거나 가진 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항상 노력하고 사리에 밝기도 해. 어디 너처럼 갑질밖에 모르는 줄 알아?”

...

“그래, 일단 알겠어.”

곽승재가 전화를 끊자 고은서도 회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했다.

전생에서 봤던 곽상재의 눈코입이 점차 현생과 오버랩되면서 별안간 차 안의 공기마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실장님, 저 앞에 세워주실래요? 여기서 내릴게요.”

“사모님, 여기는 택시도 안 잡힐 텐데 대표님 먼저 회사로 모셔다드리고 댁까지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여기서 세워주세요.”

고은서는 단 1초라도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주민기는 차를 세우는 대신 백미러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안달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의 속에서 또다시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차 세워요. 여기서 내려줘요.”

주민기는 그의 말에 따라 길가에 차를 댔다.

고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았다.

“고은서, 감히 우리 할머니를 한 번만 더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곽승재의 경고에도 그녀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곽승재는 고개를 돌려 주민기를 향해 외쳤다.

“안 갈 거예요? 밤새 기다리려고?”

주민기는 할 말을 잃었다.

고은서는 휴대폰 어플로 택시를 잡았고, 비록 거리가 있어서 추가금이 붙었지만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우선 택시 타고 병원으로 향해 건강 검진을 받았고, 특히 위를 더욱 신경 써서 체크했다.

위암은 너무 고통스러운 경험인지라 이번 생에는 몸을 잘 보살펴 암 발병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검사 결과는 며칠이 지나야 받을 수 있기에 고은서는 우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갔다.

어젯밤에 정리한 짐들은 이미숙이 다시 풀어서 원위치에 놓았다.

“사모님, 도련님이 오늘도 오신대요? 물건 다시 넣어 놓을까요?”

조심스레 물어보는 이미숙을 보자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시 말해서 이미숙은 자신이 곽승재가 돌아오는 걸 알고 어젯밤에 단지 보여주기식으로 짐을 싸면서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다고 생각하는 건가?

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전미자에게 이른 사람이 혹시 이미숙은 아닐까 싶은 의혹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입이 이렇게 싸단 말이지?

당장이라도 끄집어내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곽승재와 확실히 선을 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간발의 차로 놓쳐버리지 않았는가!

이혼하기 전까지 예원 별장에 있기로 전미자와 약속한지라 어쩔 수 없이 당분간 머물러야만 하는 신세였다.

...

다음날 잠에서 깬 고은서는 운전 연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면허증을 따고 나서 한동안 운전해본 적이 없기에 이미 감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앞으로 편의를 위해서라도 다시 운전을 배워야만 했다.

차고 구석에 결혼했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선물한 마세라티가 있지만, 아까워서 차마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그녀의 운전 실력으로 행여나 어디 찍히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결국 고민하다가 곽승재의 차를 아무거나 골라 기억을 끄집어내서 시동을 걸고 차고를 벗어났다.

어렵게 도로 위까지 나와 차가 많은 시내는 차마 진입하지 못하고 비교적 한적한 거리를 찾아 천천히 달렸다.

오후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을 때 어느 정도 감을 회복한지라 오전보다 속도를 더 냈다.

이내 코너가 보이자 차를 돌리려는 찰나 강아지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 그녀는 핸들을 확 꺾어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차와 정통으로 부딪혔다.

반짝이는 도장과 눈부시게 빛나는 로고를 보는 순간 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비싼 차를 박게 될 줄이야.

그나마 선견지명이 있어서 마세라티를 두고 왔으니 천만다행이지, 아니면 큰일 날뻔했다.

맞은편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자 고은서도 재빨리 따라 내렸다.

“죄송합니다. 방금 잠깐 한눈파는 바람에...”

상대방은 그녀의 사과 따위 안중에도 없이 사진 찍고 증거를 수집하기 바쁘더니 경찰에 신고까지 했는데 마치 이런 적이 여러 번 있는 듯 익숙했다.

“왜 이렇게 늦어?”

차 안에서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금방 끝나요.”

기사는 공손하게 대답하더니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

“자동차등록증 사진 좀 찍을게요. 연락처 남겨주면 이따가 변호사가 와서 처리할 거예요.”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은 교통사고 접수마저 프로세스가 있는 건가?

고은서는 글러브 박스에서 자동차등록증을 꺼내 전해주었다.

“차주분이 곽승재 씨로 되어 있네요. 당신 차 아닌가요?”

“남편 차예요. 이건 제 연락처입니다.”

고은서는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변호사 명함 드릴게요. 이따가...”

“잠깐.”

고은서가 명함을 건네받으려는 찰나 뒷좌석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긴 다리로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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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3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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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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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3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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