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화

Author: 류한나
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살짝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고, 흰색 캐쥬얼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라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겠지만, 그는 되레 귀티와 여유가 흘러넘쳐 이미지와 찰떡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도련님.”

기사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불렀다.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간 지체해서 미안해요. 제가 100% 보상해드릴게요.”

고은서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에 남자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차량 수리비를 제외하고 정신적 보상 그리고 손실비도 있죠. 지금 몇조가 넘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지체되었으니까 모두 책임지세요.”

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고은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

“저기요, 외모도 멀쩡하고 돈도 좀 있어 보이는데 사기로 먹고사는 거였어요?”

어쩐지 사진 찍고 증거를 남기는 기사의 모습이 절대로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

남자는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내가 뭐로 먹고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그쪽이 배상할 능력이 없다면 차주한테 하라고 해요.”

그제야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타깃이 곽승재라는 것을 눈치챘다.

한편, 머릿속으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바로 곽승재의 최대 라이벌인 민시후였다.

전생에 민시후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정신병원에 있을 때 경제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

당시 그는 곽승재에 버금가는 몸값을 자랑했고,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GS 그룹을 바짝 추격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곽 대표 와이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당신 차를 끌고 나와 내 차를 박았는데 어떻게 할 건가?”

고은서가 전생을 회상하고 있을 때 민시후는 이미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랑 한마디 해요.”

민시후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

“혼자 차 끌고 나갔어?”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였으나 말투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응.”

“다친 사람 있어?”

“아니.”

“거기서 기다려.”

말을 마치고 나서 곽승재는 전화를 뚝 끊었다.

“곽 대표에게 꽃 미모를 자랑하는 와이프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늘 뵈니 명불허전이네요.”

민시후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소문이 날 리가 있겠는가? 친지를 제외하고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고은서도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시후 씨가 돈 버는데 도가 텄다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는데 오늘 직접 경험해보니 감탄이 저절로 나오네요.”

그리고 흥미진진한 민시후의 눈빛을 외면하고 그의 휴대폰으로 자기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시후 씨에게 경험을 좀 전수 받고 싶네요. 부디 허락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다시 돌려주었다.

민시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잘생긴 눈썹을 까딱했다.

“당연하죠.”

곧이어 경찰과 민시후의 변호사가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가 애용하는 마이바흐도 멀리서 다가왔다.

뒷좌석에 내린 곽승재를 보자 고은서는 약간 의아했다.

고작 이런 사소한 일에 주민기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데 직접 나설 줄이야?

주민기는 변호사랑 경찰과 정리하는 중이고, 곽승재는 그녀와 민시후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검은색 셔츠를 입은 덕분인지 외모가 한층 더 돋보였고, 딱 떨어지는 정장 바지는 훤칠한 몸매를 더욱 부각했다. 물론 타고난 귀티와 흘러넘치는 카리스마는 숨길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은서는 민시후가 단연코 독보적인 존재라고 여겼지만, 곽승재를 보는 순간 역시나 그가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곽 대표, 오랜만이네?”

민시후는 젠틀하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곽승재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은서를 힐긋거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냥 평범한 교통사고였는데 저분이 너한테 사기 치고 두둑이 챙기려고 했어.”

고은서는 민시후를 가리키며 거리낌 없이 그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사모님 말에 오해가 소지가 있으니 정정할게. 난 대놓고 빼앗으려고 했거든?”

민시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도발적인 말투로 곽승재를 자극했다.

“어이, 곽 대표, 판주에서 명운에 투자한다고 하던데 내가 먼저 따내고 말 거야. 귀국해서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해.”

곽승재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내기할래? 만약 이 프로젝트를 따낸다면 그린 시티 부지도 양보해.”

곽승재가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욕심이 과하군.”

민시후도 피식 웃었다.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게.”

곽승재는 그를 무시하고 고은서에게 말했다.

“타.”

말을 마치고 나서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마이바흐를 향해 걸어갔다.

비록 곽승재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의 차를 들이받고 뒷수습하러 본인까지 직접 등판한 이상 한발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차로 다가가 뒷좌석 문을 열려는 찰나 곽승재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운전기사처럼 보여?”

고은서는 고분고분 조수석에 앉았다.

차 안에서 곽승재는 시종일관 싸늘한 얼굴로 기분이 언짢다는 걸 대놓고 티를 냈다.

과거의 고은서라면 고마운 나머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감사 인사를 하며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할 말도 없어서 휴대폰만 내내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을 지켰다.

이때, 뒤에서 차 한 대가 바짝 따라오더니 클랙슨을 빵빵거리며 상향등을 껐다 켰다 했다.

백미러를 힐긋 쳐다보자 민시후가 사고를 당해 움푹 팬 외제차를 끌고 따라오고 있었다.

곽승재도 발견했지만, 속도를 올리거나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정속 주행했다.

신호에 걸리자 민시후는 조수석 옆에 차를 댔다.

이내 고은서를 향해 할 말이 있다는 듯 손짓했고,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창문을 내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어게인, 비긴   제1316화

    고은서는 처음 이런 곳에 오기도 했고 여재훈이 직접 얘기를 꺼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여 대표님, 번거롭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여재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번거롭긴. 하나도 번거롭지 않아.”고은서는 여재훈과 함께 아주 고풍스러운 홀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해 고은서가 초대장을 꺼내려는데 스태프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그녀와 여재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여 대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여재훈의 파트너로 오인한 스태프를 보며 고은서가 바로잡으려는데 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 씨는 초대를 받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존중을 표해 이름을 부르는 편이 좋을 듯 싶은데요. 고은서 씨는 혼자서도 충분히 빛나는 게스트이지 누군가의 부속품이 아닙니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이런 디테일까지 챙기며 대신 나설 줄은 몰랐기에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재훈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믿음이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어 스태프는 바로 고은서에게 예의를 갖추며 손을 내밀었다.“고은서 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고은서도 더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여재훈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많은 서예 작품과 그림이 걸려 있었고 모양이 특별한 분재들도 보였다. 거기에 고풍스러운 의자와 병풍까지, 고은서는 고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홀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업계 선배들도 보였다. 그들은 일반 파티처럼 화려하게 차려입기보다는 대부분 캐주얼한 복장이었고 다가오는 여재훈을 보며 활짝 웃더니 몇 명은 여재훈에게 인사하려고 마중 나오기까지 했다.“여 대표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옆에 계신 분은 따님인가요?”한 사람이 물었다.여재훈이 얼마 전 딸의 회사를 운영 중단하게 했을뿐더러 그 딸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이런 장소에서 그런 기분 나쁜 얘기를 꺼낼 사람은 없었다.“따님 참 예쁘네요, 아우라도 뛰어나고. 여 대표님, 참 좋으시겠어요.”옆에 있던 사람이 칭찬을 늘어놓자

  • 어게인, 비긴   제1315화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의 마음이 다시금 불안에 휩싸였다.어젯밤 그가 대답을 듣지 않기로 한 이유도 고은서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답이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은서야, 나...”“대답해 줄게.” 고은서는 그의 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시후 씨가 정말로 그걸 원한다면 나는 거절하지 않을 거야.”거절하지 않겠다는 말에 곽승재는 충격을 받은 듯 심장이 곤두박질쳤다.고은서가 용서하든 말든 묵묵히 지켜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이 대답을 듣고 난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민시후는 송민준과 달랐다.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했지만 민시후는 완전히 신뢰했었다.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곽승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당시 민씨 가문의 강력한 반대만 없었어도 민시후가 다쳤을 때 고은서는 주저 없이 그를 간호했을 것이고 고백도 받아들였을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녀의 거절하지 않겠다는 말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적 발언이 아닐 것이다. 진심 같았다.머릿속에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조차 할 수 없었다.앞에 선 가냘픈 고은서를 바라보며 곽승재는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이렇게나 두려울 줄 알았다면 성아연이 무슨 말을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자신의 태도가 조금만 덜 냉랭했더라도 그녀가 이정도로 자신에게 미련 한 점 남지 않았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막급이었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음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쓸쓸한 뒷모습에 고은서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그를 잡지는 않았다....며칠 후, 고은서는 금융계 정기 회합에 초대받았다.고급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로 유일 투자의 성장 덕에 겨우 초대 권한을 얻은 것이다.파티는 럭셔리호텔이 아닌 고급 프라이빗 관저에서 열렸다.고은서는 단아한 블랙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현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야.”여재훈이었다.“여 대표님?” 고은서는 다소 놀랐다. 이런 가벼운 행사에 그가 직접 참석

  • 어게인, 비긴   제1314화

    홍두 팔찌의 출처를 잘 알고 있는 곽승재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고은서는 곽승연이 손을 들 때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과연 곽승재의 눈빛이 흐려지며 조금 전까지의 미소가 사라졌다.자신의 처사가 적절치 않았음을 인정한 고은서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승연아, 맛있으면 많이 먹어. 오빠는 신경 쓰지 말고.”곽승연은 오빠가 말이 없자 다시 닭 날개를 자신의 그릇으로 되돌렸다.식사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곽승재의 기분만은 가라앉은 듯했다.식후 서연정이 운전기사를 보내 곽승연을 데려갔고 고은서와 곽승재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곽승연이 떠난 후 고은서가 물었다. “회사 다시 들어가 봐야 돼?”곽승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준 선물이 그렇게 싫었어? 다른 사람에게 줘버릴 만큼?”고은서는 곽승연이 라이트문 아파트에 오자마자 팔찌를 벗게 못 한 것이 못내 후회됐다.“마구 준 건 아니야. 승연이는 네 동생이고 마음에 들어 하는데 안 줄 수가 없었어.” 고은서가 급히 해명했다.곽승재는 어두워진 눈빛으로 고은서를 응시했다. “승연이는 네 홍두 팔찌를 더 좋아했을 텐데 왜 그건 안 줬어?”“...”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것까지 눈치챌 줄은 몰랐다. 끝없는 질문에 지친 고은서가 단호하게 말했다.“승재 씨, 선물은 받은 순간부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싫으면 새 걸 사서 승연이한테 준 것과 바꿔올게.”곽승재의 얼굴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진정한 문제는 똑같이 선물했음에도 자신의 것만이 소중하게 대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급한 어투로 변명하던 고은서는 문득 최근 곽승재가 자주 이런 상처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마음 약해지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일 당일 홍두 팔찌가 은소영의 선물이라고 그에게 설명했을 때도, 어제 민시후의 등장이 우연이라고 변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에게 설명할 의무가 전혀 없었다.“승재 씨, 최근 나를 도와 송민준과 그

  • 어게인, 비긴   제1313화

    고은서와 곽승연의 의아한 시선 속에 곽승재는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그는 또다시 헛기침을 하며 쑥스럽게 고백했다.“은서야, 이 사진은 사실 오래전부터 내 앨범에 있었어.”고은서는 믿을 수 없었다.“어디서 구한 거야? 우리 첫 만남이었던 파티 전에 이미 나를 본 적이 있다는 말이야?”설마 그럴 리가. 설령 봤더라도 곽승재가 몰래 사진을 찍어 저장해 줄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에 보기 드문 홍조가 물들었다.그는 고은서에게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호텔에서 업무를 보던 중 로비에 걸린 이 사진을 봤다고 설명했다. 잔디밭 파티 홍보용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 사진을 저장해 두었지만 이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아 잊고 지냈다고 했다. 최근 앨범 정리 중에서야 발견했다는 것이다.“오빠, 거짓말하는 거죠?” 곽승연이 눈을 깜빡이며 의문을 제기했다.“그동안 휴대폰 안 바꾼 거예요? 바꿀 때 예전 자료는 안 봤어요?”곽승재는 침착하게 답했다.“자료는 전부 비서가 옮겼어. 내가 직접 손댄 적 없어.”곽승연은 연애 경험이 없고 어른 세계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만화와 책을 통해 자존심 때문에 가끔은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후회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의 오빠가 딱 그런 케이스일 것이다.하지만 곽승연은 말주변이 없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저 속으로 언니를 사랑해 재결합을 원한다면서 왜 지금 와서 사진을 소중히 여겼다는 걸 부정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아주머니가 맛있는 요리 많이 했다면서?” 곽승재는 곽승연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자, 주방에 가보자.”“...”곽승연은 어쩔 수 없이 주방으로 끌려갔다.고은서는 혼자 거실에 남았다.곽승재의 조금 전 반응에서 고은서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가 말한 ‘오래전부터 자각하지 못한 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하지만 과거의 상처는 이미 깊고도 아팠다. 그가 백유미를 감싸며 그녀의 마음을

  • 어게인, 비긴   제1312화

    슬퍼?고은서도 뒤돌아 민시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휴대폰을 들어 상대방에게 시간 있는지 물으며 바에 가자고 느긋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슬픔의 흔적조차 없었다.“승연이가 잘못 느낀 거야. 가자,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고은서는 곽승연의 손을 잡았다.그 후 고은서는 줄곧 곽승연과 함께했고 식사 후 그녀가 좋아하는 나비관과 희귀 식물원도 찾았다.곽승연은 흥미로운 모양의 나뭇잎들을 수집하고 나비 표본도 몇 점 샀다. 곽승연에게는 너무 알찬 하루였다.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고은서는 아쉬워하는 곽승연과 함께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다.곽승연이 이미숙의 요리를 먹고 싶다 하여 고은서는 그녀를 먼저 여기로 데려왔다.이미숙이 비장의 비법을 총동원해 곽승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을 준비했다.바쁜 곽승재가 생각난 고은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에 함께할 수 있는지 물었다.회의 중이던 곽승재는 꼭 제시간에 도착하겠다고 약속했다.곽승재를 기다리는 동안 고은서와 곽승연은 사진첩을 보았다. 곽승재가 선물한 사진첩을 넘기던 중 곽승연이 고은서의 첫 번째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언니, 이 사진 정말 예뻐요. 오빠 휴대폰에서 본 적 있어요.”고은서는 사진첩을 제작할 때 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응, 최근에 친구들 SNS에서 모은 거야.”곽승연이 고개를 갸웃했다.“최근이 아니고 오래전이에요. 그때 저랑 엄마가 Y 국에 살 때 오빠가 왔었거든요? 제가 오빠 휴대폰에서 우연히 봤어요.”고은서는 깜짝 놀랐다. “승연아, 시간을 착각한 거 아니야?”곽승재가 그녀 사진을 보관하다니? 예전엔 그녀를 보면 냉담하고 불쾌해하던 사람이었다.“제가 착각한 게 절대 아니에요!” 곽승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Y 국에서 분명히 봤단 말이에요! 오빠가 이 사진을 별도 폴더에 넣어뒀는데 제가 실수로 발견한 거였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 싫어하더라고요. 오빠가 싫어할까 봐 더 묻지 못했어요.”고은서는 바로 외할아버지 SNS를 열어 확인했다. 외할아

  • 어게인, 비긴   제1311화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민시후가 머리를 약간 숙인 채 선글라스를 써서 표정이 읽히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가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손목에는 은소영 씨가 준 홍두 팔찌가 걸려 있었다.“소영 씨가 준 거예요. 원하신다면 드릴게요. 필경 홍두는 보통 연인끼리 주고받는 거잖아요.”팔찌를 풀려는 순간 민시후가 막았다. “은서 씨한테 선물한 거니까 이제 당신 거지요. 게다가 잘 어울리네요.”민시후 입에서 칭찬이 나오다니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소영 씨의 안목이 뛰어나서 그렇죠.”민시후는 대답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선글라스에 비친 고은서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주변에 발길이 끊긴 순간 공기가 묵직해졌다. 이렇게 나란히 선 지도 오래였다.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턱선을 보며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시후 씨, 재활 과정이 많이 힘들지 않았어요?”낯선 땅에서 온갖 상처, 그리고 시한폭탄 같은 뇌의 혈종…. 모든 게 강한 의지력 없이는 견딜 수 없었을 터였다.고은서의 말에 민시후의 목젖이 움직였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킨 듯했다.미안함이 밀려온 고은서는 일부러 태연한 척 말했다.“지금 와서 묻는 건 위선적이 돼 보이네요. 재활 과정을 가서 보지도 않고 이런 질문이라니...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민시후 씨, 가족분들의 사랑도 듬뿍 받고 지금은 곁에 좋은 분도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은서는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민시후는 여전히 침묵하다가 손을 뻗어 선글라스를 만졌다.고은서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 민시후는 선글라스나 모자로 얼굴을 가렸기에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선글라스를 벗으려는 것 같은 그 순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고개를 돌리니 곽승연이 찾아오고 있었다.민시후는 선글라스를 집어 올릴 뿐 벗으려는 기색은 없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언니, 이 분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 곽승연이 다가와 물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