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안에 사람 있어요?”이서가 발아래를 바라보자, 문 아래 빈 공간으로 한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있어요.”“윤이서 씨 맞죠? 남자 친구가 들어온 지 오래됐다고 걱정하길래 내가 대신 들어와 봤어요.” “윤이서 씨, 괜찮아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야기를 듣던 하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이만 돌아가 봐.] “그래.”[내가 한 말, 꼭 기억해야 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알았지?] “그래, 알겠어.”순순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이서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인자한 노인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이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서 역시 예의상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이 인사가 그녀의 걷잡을 수 없는 수다 본능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그녀는 이서를 잡고 은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한테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는 남자 친구는 난생처음 봐요. 아마 아가씨는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남자 친구가 화장실 입구에 서서 오고 가도 못하고 있더군요.” “아이고,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재미있네요.” 이서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남자 친구가 평소에는 표현을 잘 안 해주나 봐요?” 이서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에이, 그런 눈으로 쳐다볼 거 없어요. 여태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딱 보면 딱 알죠.” “묵묵히 챙겨주고 생색내지 않는 사람인 것 같더군요. 저런 남자를 만난 건 복이에요, 복.”“그런가요?”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 노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은철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나한테 묵묵히 헌신해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은철을 비꼬는 이 생각은 마음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이의 희미한 실루엣 역
하은철의 눈빛에서 관심을 느낀 이서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괜찮아, 이만 돌아가자.” “그래.”은철이 이서와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이서가 자연스럽게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할머님...” “아, 밖에서 한참 기다렸는데도 안 나오길래, 나 대신 살펴봐달라고 부탁드린 거야, 왜?” “아무것도 아니야. 너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너무 많이 해주시길래 네가 고용한 사람은 아닌가 싶어서.” 은철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철은 고개를 돌린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분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아니야.이서는 은철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듯했다.“은철아, 나 좀 피곤해.”“그래? 그럼 결혼식에 대한 세부적인 대화는 내일 다시 나누자.”“결혼식? 결혼식을 벌써 올리려고?”이서가 걸음을 멈추고 다급하게 물었다. ‘결혼식은 한 달 후에나 할 줄 알았는데...’ “조금 빠른가?”은철이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나는 최대한 빨리하고 싶어. 사실,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부터 하면 좋겠어.”이서는 억지로 웃음 짜냈지만, 어떠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침묵을 지키던 이서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철의 눈빛이 다소 차가워졌다. ‘이서가 결혼을 승낙하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혼인신고 하기 전까지는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작은 아빠가 이서랑 결혼할 때 가짜 신분을 사용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어.’ 은철은 즉시 주 집사를 불러 이서와 지환의 사실혼 관계를 없던 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같은 시각, 방에 들어온 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최대한 빨리 H선생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나에게서 얻지 못한 답을 H선생님에게서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하지만 지환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주먹을 거두었고, 주먹은 이상언의 코만 스치고 지나갔다. 십년감수한 상언이 가슴을 치며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아, 너...” 지환의 음침한 눈빛이 상언을 향하자, 상언은 즉시 하려던 말을 삼켰다. 글러브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지환이 즉시 탈의실로 향했다.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임현태가 상언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이 선생님, 이런 상황에서는 대표님께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요?” “설마 이대로 주저앉게 내버려두실 건 아니죠?” “내버려두는 거 말고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잖아요?” 상언이 난감하다는 듯 되물었다. 현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표님께서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지환이 녀석도 사람이잖아요.” 감회에 겨운 표정을 지어 보인 상언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황급히 지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지환아, 집에 가려고?”지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한 상언과 현태가 지환을 따라 차에 올랐다. ‘늦은 밤이라 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야. 대낮에 이렇게 난폭운전을 했다면 분명 사고가 났을 거야.’ 30분 후, 세 사람이 탄 차량이 한 술집 앞에 멈춰 섰다. 상언과 현태가 상황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차에서 내린 지환은 술집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그는 익숙한 복도를 따라 룸으로 향했다. 지환은 이 술집의 단골손님이라 할 수 있었기에, 그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술집 사장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두 배 더 주세요.”지환의 말을 들은 사장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네, 알겠습니다.”“107호실에 원래 드시던 양의 두 배 더 넣어드려!” 처음에 상언과 현태는 두 배로 늘어난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종업원들이 끊임없이 양주를 들고 와 책상 위를 채우고, 바닥까지 늘
임현태와 이상언이 눈을 마주쳤다. 결국 상언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연하지.” “이서는 곧 하은철이랑 결혼하게 될 텐데?” 지환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룸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서는 이미 모든 과거를 잊었어. 심지어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조차도... 하지만, 이서를 탓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 이서가 날 잊은 건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나도 다 안다고...”지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침울해졌고, 룸 안의 두 사람은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잠시 취하고 싶을 뿐이야. 1초라도 이서를 잊어버리고 싶다고. 그것도 안 된다는 거야?” 서로의 눈을 마주친 현태와 상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묵묵히 지환의 곁에 앉았다. “마실 거면, 우리랑 같이 마시자.”상언이 술 한 병을 들고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친구가 뭐 별거야? 힘들 때 같이 있으면 친구지.”현태 역시 호기롭게 술병을 열었다.“대표님...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같이 마셔 드릴게요.”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젖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바로 이때, 상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나에게서 결려온 전화였다. “쉿, 하나 씨야.”상언은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후, 구석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전화를 받았다,“하나 씨, 무슨 일이에요?” [잠이 안 와서 그러는데, 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상언은 뛸 듯이 기뻤지만 아직 술을 마시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곤란하면 안 와도 돼요.] 하나의 낮은 목소리는 상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듯했다.[그냥 자죠, 뭐.] “기다리세요, 금방 갈게요.”말을 뱉은 상언은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었다. “집에 있는 거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은 상언이 지환에게 다가갔지만,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지환 고
재빨리 지환을 바라본 임현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가야 된다는 거죠?”지환이 입을 열었다. 현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가보세요, 난 괜찮으니까.”지환이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하지만 그는 결코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밖이에요?]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심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쁜가 보네요. 그럼 방해하지 않을게요.]“아니야!”현태가 불쑥 말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난처해하기 시작했다. “이만 가봐요.”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가게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별일 있겠어요?” 인상을 찌푸린 채 망설이던 현태는 결국 소희를 만나러 가는 것을 택했다. “대표님, 이 술집에만 계셔야 해요. 만약 대표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 선생님께서 저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알겠으니까 이만 가 봐요, 난 세 살짜리 어린 애가 아니에요.” ‘농담할 여유는 있으신가 봐.’현태는 지환의 농담을 듣고 나서야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소희에게 갈 수 있었다.현태가 떠난 후, 룸에 홀로 남은 지환은 마침내 모든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개를 젖힌 채 모든 술병을 비운 지환이 허탈하다는 듯 술병을 집어 던졌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이서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술에 취했던 탓일까. 코끝이 시큰시큰해지고, 두 눈이 눈물로 젖어 들자, 아른거리던 이서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지환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천만여 마리의 개미가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환이 손을 들어 가슴을 눌렀지만 마음의 통증은 점차 더 악화되는 듯했다. 지환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의 통증은 계속되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의 통증이 잦아들지는 않았다. 지환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마음의 통증은 시종일관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심해지는 듯했다. ‘이서가 하은철이랑 결혼을 할 줄이야.’ 그는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자, 지환이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았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를 확인한 그는 1초간 멍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이내 날카로운 유리를 힘껏 목에 들이댔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상황을 확인한 남자가 즉시 달려들어 지환이 손에 들고 있던 날카로운 유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지환은 단념하지 않았고, 널브러진 유리를 주워 사정없이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다. “찌르세요, 이렇게 죽어준다면 나야 고맙죠. 경쟁자가 줄어드는 거니까요.” 그 남자의 목소리가 지환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지환이 고개를 들어 룸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소지엽이었다.소지엽은 지환이 넋을 놓은 틈을 타서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빼앗았다. 고개를 숙이자 지환의 손에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지엽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지환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흘긋 바라본 지환은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지환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은 지엽이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꽤 고집이 있으시네요. 처치하지 않아서 감염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뭐, 저한테 나쁠 건 없지만요. 대표님이라는 경쟁자가 사라지면 이서가 저한테 올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지환은 그제야 침묵하여 손수건을 주워 손을 감쌌다. 발버둥 치며 몸을 일으킨 지환이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왜 돌아온 거야?”“이서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돌아오지 않을 수는 없죠.”지엽이 지환을 바라보았다.‘돌아오기 전에는 한바탕 때려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이서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지환이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M국에서도 이서를 주목하고 있었나 보군.” “그럼요.”지엽이 말했다.“하지만 이번 소식을 알게 된 건 제가 이서를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이서와 하은철의 약혼 소식을 접한 지엽 역시 크게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가 재빨리 돌아온 것은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을
“안 그러면 어쩔 건데?”지환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자조적인 말투로 말했다.“나더러 두 사람의 약혼을 깨고 이서의 앞에 나타나서 이서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라는 거야?” “그렇게 과격한 방법을 쓰실 필요는 없잖아요.”지엽은 지환의 말투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눈썹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한테 방법이 있어요. 대표님은 모르셨겠지만...” “당장 말해!”지환이 술병을 움켜쥐었다. “사실,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이서를 데려오는 거죠.” 지엽은 지환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 나갔다.“국내는 하은철의 세상이라, 하은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고 할지라도, 해외는 아니잖아요. 이서를 해외로 데려가면 거기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예요.”지환이 술병을 만지작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대표님께서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지엽이 들뜬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지금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은철을 따돌리고 이서를 해외로 데려가냐는 거예요.” ‘물론 이서가 협조만 해준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이서가 기억을 잃은 상황이잖아.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우리라면 이서를 해외로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몰라.’ 지환이 고개를 들어 지엽을 바라보았다. “이서를 외국으로 보내려는 게, 정말 이서만을 위한 생각인 거야?” 넉살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지엽은 자신의 진심을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하하, 하은철이라는 그 나쁜 놈한테서 이서를 떼어놓으려는 것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서를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죠.” “물론 지금이야 대표님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연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지환은 코웃음을 쳤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런 말씀도 없으세요? 인정하시는 거예요?” 지엽이 다리를 움직이며 지환을 떠보았다. 하지만 지환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지엽이 참
서서히 몸을 웅크린 지환은 룸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추위를 느낀 그는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룸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지환의 상태를 염려한 사장이 그에게 담요를 덮어주었지만, 그마저도 그의 뒤척임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자학적인 방식을 이용해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했다. 마침내 떠오른 태양이 지환을 자학과 어지러운 고통으로부터 끌어냈다. 정신을 차린 지환은 고통을 직면해야만 했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이서에게 걸려 온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지환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지환이 즉시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시각, 이서는 건성으로 하은철과 결혼에 대한 것을 상의하고 있었다. 어젯밤 H선생님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이서는 홀로 베란다에 앉아 하나의 말을 되새겼었다.그 결과, 그녀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은철과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계속 은철이한테 시집가면 안 된다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아.’ “도련님, 그럼 호텔은...”큰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을 느낀 이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씀 나누고 계세요. 저는 바람 좀 쐬고 올게요.”그녀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은철도 이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서야, 왜 그래? 왜 아침부터 계속 우울해 보이는 거야?”“어젯밤에 잠을 잘못 잤나 봐.”이서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괜찮아, 나가서 바람을 좀 쐬면 나아질 것 같아.” 은철이 생각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다녀와.” 이서는 그제야 마당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 집사가 참지 못하고 은철을 향해 말했다.“도련님, 아무래도...” “이서 아가씨께서 마음을 다잡게 하려면 반드시 순조로운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요.”주 집사가 휴대전화를 들고 결혼식 계획을 짜러 갔다. 같은 시각.집을 나온 이서는 오랜만에 자유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