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충용 후작은 절망적인 얼굴로 눈을 감았다.성녀는 공주와 동급이었다.성녀를 모함한다는 건 이 나라의 공주를 모함한 것과 같다는 의미였다.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못 빠져나갈 것을 직감했다.북진연은 바로 행동에 착수했다.그가 대동하고 온 흑기군이 충용 후작가 저택을 포위했다.북진연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온아려는 그제야 당황하며 소리쳤다.“이게 뭐 하시는 거죠? 여기 충용 후작가입니다. 아무리 섭정왕 전하라고 해도 나라의 충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충용 후작가만 억울하게 만들면 안 되지. 공정을 위해 부인의 오라버니인 진국공도 불러오겠나?”북진연이 싸늘한 눈으로 온아려를 바라보며 말했다.온아려는 그 눈빛에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불러오면 되죠. 지금 당장 오라버니를 불러오겠습니다!”충용 후작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충용 후작가가 이대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 진국공만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충용 후작은 북진연의 사람들이 저택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그리고 북진연의 일 처리 속도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랐다.일각도 지나지 않아 진짜 범인이 밝혀졌다.과정도 아주 간단했다.북진연은 먼저 모든 충용 후작가 하인들을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옥여설화고가 사라진 날 누가 창고를 지키고 있었는지 확인했다.그리고 그 하인들을 모두 끌어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부터 들었다.이유는 간단했다.근무에 태만한 자들을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그렇게 후작가 하인들은 죽을 고비에 서게 되었다.정원에 온통 피가 튕겼고 맞고 있는 하인들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들도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수많은 살육을 해온 섭정왕 전하라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더욱 컸다.결국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하인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와… 왕야,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근무에 태만했던 것이 아니라… 세자께서 아무 말도
한 병도 아니고 무려 세 병이었다.아무리 온모에게 잘보이려고 가져갔다고 해도 어머니를 위해 한병은 남겼어야 했다.온아려는 그 많은 옥여설화고를 자신은 써보지도 못하고 아들이 남한테 갖다줬다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아들이 온모를 무척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한테 어미인 자신의 물건을 훔쳐서 몰래 갖다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했다.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었다.“그 녀석이 범인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섭정왕 전하 덕분에 사건이 빨리 해결되었어요. 결과가 나왔으니 남은 건 저희에게 맡기세요. 제가 그 녀석 제대로 혼낼게요.”북진연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아려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부인이 혼을 낸다고? 어떻게 혼낼 생각이지?”아들을 아끼는 온아려는 당연히 엄벌을 원하지 않았다.“사당에 무릎 꿇리고 반성하라고 할까요?”“좋지.”예상밖으로 북진연은 흔쾌히 동의했다.온아려의 입가에도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아무리 섭정왕이라고 해도 충용 후작가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하물며 그녀의 뒤에는 진국공도 있었다.온아려가 속으로 의기양양해하고 있을 때, 충용 후작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이대로 쉽게 넘어갈 거였으면 북진연이 흑기군까지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역시나 북진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럼 반달 정도 꿇리면 되겠군. 아마 그 정도면 세자도 반성할 것 같아.”“반달이요?”온아려는 순식간에 언성이 높아졌다.그녀는 분노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며 반박했다.“어떻게 그렇게 오래 꿇고 있게 하나요?”반달이면 최소택의 무릎이 나갈 수도 있었다.“싫어?”북진연의 아름다운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온아려의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말했다.“후작 부인은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럼 반달 더 추가하지. 세자는 충용 후작가 사장에서 한달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것이다.”“뭐라고요?”
“오라버니, 드디어 오셨네요!”온아려는 온권승을 보자마자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다.“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저와 소택이 둘 다 최양봉 저 망할 놈한테 팔려갈 뻔했어요!”“무슨 헛소리야?”온권승은 온아려에게 호통쳤다.“부군한테 망할 놈이 뭐야? 충용 후작 부인으로 산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성깔을 못 고쳤어?”“오라버니, 저 도와주러 오신 거 아니에요?”온권승이 담담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온아려는 순간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렸다.“널 도와주러 온 건 맞다만 그렇다고 예의 없이 구는 건 용납못해.”말을 마친 온권승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충용 후작에게 말했다.“처남, 내 동생이 어릴 때부터 진국공부에서 곱게만 자라 철이 없어. 자네도 혼인한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잘 받아주더니 왜 오늘은 못 참고 폭발한 거야? 게다가 충용 후작 부인더러 남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라고 하다니.”충용 후작은 냉소를 지었다.평소였다면 진국공의 체면을 봐줬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남이요? 형님 동생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이 여편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입니다!”온권승은 인상을 찌푸리며 온아려에게 시선을 돌렸다.온아려는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하듯 말했다.“별로 큰일은 아니에요. 그냥… 온사 그 계집애를 좀 오해해서 생긴 일인데 섭정왕이 찾아오시더니, 고모인 나한테 그 계집애 찾아가서 사과하라지 뭐예요….”“그래요, 외삼촌! 섭정왕은 대체 왜 그런대요? 왜 그렇게까지 온사 편만 드냐고요!”속박이 풀린 최소택은 재빨리 일어나서 맞장구를 쳤다.“이 불효자식이 그 입 다물지 못해!”충용 후작은 힘주어 아들을 노려보며 호통쳤다.“네가 몰래 네 어미의 옥여설화구를 훔쳐서 온모에게 갖다주지 않았으면 이 사단이 났겠어?”“아직도 제 잘못을 모르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충용 후작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온권승은 온모까지 엮였다는 얘기에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온아려를 싸늘히 노려보며 재촉했다.“대체 무슨 일이
온권승은 불쾌한 표정으로 충용 후작을 노려보았다.충용 후작은 지금 온사가 안타까울 뿐이었다.“만약에 형님께서 평소에 방관하지 않았더라면 온사가 지금 이 지경이 됐겠어요?”“걔 형님 친딸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언제 그 아이를 친딸처럼 품어줬나요? 한낱 양녀에 불과한 애가 적녀보다 더 총애를 받는데, 참으로 편애가 심하십니다. 혹시 우리에게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아버지!”“최양봉!”온아려와 최소택 모자는 후작이 이렇게까지 온권승의 앞에서 대놓고 반발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평소였다면 충용 후작도 진국공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반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온아려는 오라버니가 와서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부군과 오라버니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그녀는 다급히 후작을 말렸다.“부군, 그만하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오라버니는 한 번도 누굴 편애하지 않았어요. 제가 온사를 싫어해서 그런 거니 오라버니한테 뭐라하지 마세요!”“온아려, 나도 눈 있어.”충용 후작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을 바보로 알지 마. 다른 사람은 온사 생일을 몰라도 시아버지가 될 뻔한 나는 잘 알아.”충용 후작의 말에 온권승은 순간 당황했다.“그 아이의 생일은 아마 며칠 전이었을 거야. 그런데 진국공부는 굳이 그 아이의 생일과 성인식을 두 달 앞당기고 양녀의 생일에 맞춰서 둘이 같은 날 성인식을 치르게 했지. 형님, 온사보다 두 달이나 먼저 태어난 딸을 온사의 동생으로 만들다니.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겁니까?”“최양봉!”이번에는 온권승이 소리를 질렀다.그는 섬뜩한 표정을 하고 최양봉을 노려보며 되물었다.“지금 날 의심한는 건가?”“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충용 후작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진국공부를 떠났다고 해서 아무도 그 아이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예요. 걔 혼자가 아닙니다. 걔의 등 뒤에는 란씨 가문이 있어요.”란씨 가문은 과거 경성의 귀족 가문이었다.조상 삼대
소식을 들은 온사는 어이가 없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요?”온아려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온사는 그녀가 진심으로 사과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온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사저에게 물었다.“사저, 충용 후작 부인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나요?”“있어. 관복을 입은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가 있었어.”관복을 입고 온아려와 함께 이곳으로 온 사람이라면 온권승 아니면 충용 후작이 틀림없었다.지난번에 온권승이 와서 기분 안 좋게 돌아갔으니 아마 당분간은 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충용 후작이고, 젊은 사내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최소택일 것이 분명했다. 온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경서를 내려놓았다.“나가봐야겠군요.”“사매야, 겁낼 거 없다. 내가 같이 갈게.”온사가 나간다는 소리에 최근에 그녀와 부쩍 친해진 무고 사저가 말했다.“걱정하실 것 없어요. 아마 별일은 아닐 거예요.”온사가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안 돼. 그 인간들 올 때마다 널 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데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충용 후작 부인은 지난번에도 와서 널 모함하고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우지 않았니.”“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사람 부르게!”열정적인 무고 사저의 말에 온사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알았어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사저.”그렇게 두 사람은 수월관 대문 앞으로 갔다.역시나 온사가 예상했던 것처럼 충용 후작가 일가족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최소택은 충용 후작에 의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옆에는 성인 팔뚝만한 몽둥이가 놓여 있었다.온아려는 안쓰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밖으로 나온 온사를 보고 눈을 반짝 빛냈다.“온사야, 드디어 나왔구나. 고모랑 고모부가 얼마나 기다렸다고!”온아려는 다급히 다가가서 온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예전에 온사를 대할 때랑은 완전히 다른 말투와 행동이었다.온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충용 후작은 고개를 들어 온사를 바라봤다가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착잡해졌다.“미안하구나, 온사야… 예전에 혼약을 파기한 일도 그렇고 옥여설화고도 그렇고 그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너무 많이 있었던 같다.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너에게 상처를 주었구나.”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온사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그러자 온사는 순간 당황했다.충용 후작이 같이 온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 어떻게든 온아려에게서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인 사람이 충용 후작 본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그녀는 잠깐 동요하는 듯하다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후작의 사과를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뭐라고? 온사, 너 정도껏 해! 아버지께서 이렇게까지….”최소택은 온사가 주제를 모르고 건방지게 군다고 생각해서 분노에 휩싸였다.이 나라의 충용 후작이 한낱 여승에게 사과를 하는데 저리도 건방을 떨다니!“당장 안 닥쳐?”충용 후작은 눈을 부릅뜨고 아들에게 경고를 주고는 온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온사야….”“후작, 소인은 이미 진국공부의 딸이 아닙니다. 충용 후작가와는 진작에 혼약을 파기했지요. 그날 성인식에서 소인은 앞으로 충용 후작가와는 연을 끊겠다고 명백히 말씀드렸습니다.”충용 후작이 떨떠름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사이,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관계를 정리하면서 정도 끊어냈는데, 호칭부터 바꾸셔야지요.”온사의 매정함에 충용 후작마저 당황했다.‘이 아이는 진심으로 우리들과 연을 끊을 생각이야.’충용 후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는 간곡하게 부탁하듯 말했다.“그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니. 나와 네 어미는 소싯적부터 친구였는데….”“어머니는 이제 없잖아요.”온사는 매몰차게 충용 후작의 입을 틀어막았다.전혀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빛에 충용 후작은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온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온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온아려를 바라보았다.온아려가 제 발로 사과하러 찾아온 것마저 놀라웠기에, 그녀에게 용서를 바라는 게 더 의아했다.이때 온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그녀는 눈앞의 삼인방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그녀는 자신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저들의 표정이 궁금했다.아니나 다를까, 온아려는 바로 화가 폭발하더니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사과도 했고 우리 아들이 네 앞에 무릎 꿇고 사과도 했잖니! 대체 뭘 더 바래?”온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온아려를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했다.‘어디서 협박을 받고 왔구나.’그게 아니라면 평소에 줄곧 그녀를 적대하고 무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고개를 조아릴 이유가 없었다.누구의 협박인지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이 대명왕조에 충용 후작 일가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들 인물은 많지 않았다.온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사과는 받지 않겠다고요.”“온사, 적당히 해! 너무하잖아, 이건!”분노한 최소택이 소리쳤다.“내가 너무해?”그러자 온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반박했다.“내가 아무리 너무해도 당신들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거야. 한 사람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모함하고 한 사람은 건방지게 내 결백을 더럽히는 말들을 남발하고 다니는데. 당신들 모자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너!”“그리고 피해자인 척하지 마. 모함을 당한 건 네가 아니잖아. 그리고 당신들은 딱 봐도 진심에서 사과하러 온 것도 아닐 텐데 나에게도 용서를 거부할 권리가 있지 않나?”말문이 막힌 최소택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온사는 온아려의 푸르뎅뎅한 표정을 보며 만약에 충용 후작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바로 달려들어 예전처럼 자신을 물어뜯지 않을까 생각했다.“성녀님 말씀이 맞습니다.”이때, 충용 후작이 입을 열었다.“성녀님이 피해자이시니 억울한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니 지금 용서를
“넷째 오라버니께서도 뭔가 눈치채신 거죠?”온옥지의 처소로 찾아온 온모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온옥지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온사 언니가 출가한 이후 큰 오라버니랑 둘째 오라버니가 점점 변해가고 있어요.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너무 걱정돼요.”그날 온사의 생일 때문에 수월관에 다녀온 이후로 온자신은 줄곧 사당에서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나중에 장남 온장온이 온사의 선물은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한 덕분에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그날 이후로 온장온과 온자신은 수시로 외출했다.온모는 몇번이나 그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두 형제 모두 그 요구를 거절했다.온모의 위기감은 점점 막중해지고 있었다.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온옥지를 찾아갔다.온가의 사형제 중에 가장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은 장남인 온장온이 아니라 줄곧 몸이 안 좋아 바깥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온옥지였다.물론 온모는 속으로 그런 그를 무시하고 비웃었다.예전의 그녀에게 필요한 건 너무 똑똑한 꼭두각시보다 기가 세고 강한 꼭두각시가 더 필요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진국공부 사형제는 전부 멍청한 존재가 맞았다.온옥지는 그나마 이용할 가치가 있지만 아주 조금일 뿐이었다.진국공부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게 됐을 때, 그들은 그저 그녀에게 짐이 될 뿐이었기에, 그때가 되면 더 강한 지원군을 찾아 기생할 것이다.그리고 그녀에게는 이미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지난번의 실패를 겪은 후, 온모는 진국공부에서의 자신의 입지부터 다지기로 했다. 속으로는 이런 음침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넷째 오라버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큰 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는 온사 언니가 집에 안 돌아오려고 하니까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아요. 더 이상 오라버니들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 오라버니가 나서서 좀 설득해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