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건 용서받아도 되는 짓이야?”온사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온자월을 노려보며 물었다.“정말 궁금하네. 날 독살하려던 게 아니면 대체 뭘 하려고 했었지? 말해!”“나한테 이 약을 먹이고 나를 진국공부로 끌고 가려고 했었어? 그리고 날 거기 가두고 네가 그렇게도 아끼는 막냇동생의 손에 피 말려 죽일 생각이었어? 아니면 내 배라도 가르려고?!”온사는 점점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오랜 시간 가슴에 맺혀 있던 분노가 완전히 폭발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이후에 경악한 세 사람의 눈빛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고 눈을 감았다.“사부님, 저 좀 나가서 진정 좀 하고 싶으니… 이자는 사부님께서 대신 심문해 주세요.”온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쾅 하고 방 문을 잠갔다.그녀가 남기고 떠난 말은 남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경악을 가져다주었다.막수와 추월은 굳게 닫힌 방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온자월은 잠깐의 놀람 후에 분노가 폭발했다.“우리 막내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리고 무슨 배를 갈라?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고! 날 모함하려면 그럴싸한 이유라도 댔어야지!”“넌 닥쳐!”막수 사태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중에 확인하면 알겠지. 어쨌거나 그 약은 잘 가져왔어.”막수가 추월에게 눈빛을 보내자 추월은 곧바로 온자월을 제압했다.막수 사태는 약병을 열고 물도 없이 그대로 온자월의 입을 열고 약가루를 그의 입에 반절 털어넣었다.“쿨럭, 쿨럭!”온자월은 사레가 들려서 연신 거세게 기침을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약가루를 토해내려고 헛구역질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막수 사태가 많은 양을 먹였기에 얼마 안 지나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점차 두 눈에 초점을 잃어가는 온자월을 바라보며 막수 사태는 가장 궁금했던
막수 사태는 순간 당황했다.온자월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끼익!등 뒤에 있던 문이 열리자, 온사가 문밖에 서 있었다.“무우야….”막수 사태의 걱정스런 눈빛에 온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사부님. 저 이미 진정했어요.”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런 답을 들을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온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온자월의 앞으로 다가가 싸늘하게 물었다.“내가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고?”“그래, 너가!”온자월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감정은 매우 격한 상태였다.“어머니가 널 낳지 않았다면 난산으로 몸이 상해 심각한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도 않았겠지!”그러자 온자월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멍한 눈빛에 가득 찬 증오심은 아마 온사를 향한 것일 것이다.하지만 온사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어머니는 우리랑 약속하셨단 말이야. 우리의 성장을 항상 뒤에서 지켜봐 주신다고.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어. 딸이 좋다면서,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낳아주고 싶다면서 너를 낳으셨어. 그런데 그 여동생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온자월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렸다.“그래서 난 온사가 싫어. 걘 어머니를 죽인 살인범이니까! 걔만 아니었으면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와 형님들도 어머니를 잃지 않았을 거라고!”막수 사태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온자월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온사가 이내 그녀를 막았다.그녀는 온자월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었다.이건 전생의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던 진실이었다.너무 허무하고 우스워서 헛웃음만 나왔다.온사는 싸늘한 눈으로 온자월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너와 다른 형제들이 다 그것 때문에 나를 싫어한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들이야.”상처입은 온사를 위로하려던 막수는 뜻밖에 온사의 말에
막수 사태는 앞으로 다가가 온사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그래, 착하지. 걱정 마. 자군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이니까 널 이해해 줄 거야.”‘그렇지만 네가 겪은 서러움과 고통을 보게 된다면 속상하고 슬퍼하겠지…’막수 사태는 이런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미안해, 자군아. 내가 네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그래도 온사는 너처럼 강한 아이라서 참 다행이야. 이 아이는 역경 앞에 무너지지 않았어.’하지만 강한 아이는 그만큼 힘든 시련을 겪게 되기 마련이다.막수 사태는 안쓰러운 얼굴로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실컷 울 때까지 조용히 바라봐 주었다.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온사는 겨우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그녀는 약간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푹 젖은 사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사부님. 요즘따라 울보가 된 것 같네요.”사실 온사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어릴 때부터 진국공부에서 곱게 떠받들리며 자란 귀족 아가씨였다.그래서 전생의 그녀는 너무도 쉽게 온모에게 짓밟혔다.이번 생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그래도 약한 모습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누군가의 사주가 없었더라면 저 인간이 직접 수월관까지 찾아와 제게 약을 먹이려 했을 리가 없어요.”본인 입으로 온사를 혐오한다고 한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이런 비열한 수까지 써가며 그녀를 진국공부로 끌고 가려 했을 리가 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은 온모가 맞는데 온모가 평소 자주 하던 행세와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날 진국공부에 끌고 가서 괴롭히려고 한 것일까?’온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온자월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시켜서 온 것이지?”여기산 온자월의 대답은 온사의 추측과 거의 맞아떨어졌다.“넷째가...”“온옥지가?!”막수 사태는 싸늘해진 어투로 그에게 물었다.“이 약을 그럼 그 놈에게서 받은 것이야?”“맞아.”확답을 들은 막수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역시나 일가족이 역겨운 쥐새끼들이네.”“이렇게까지 해서 날 데려
온자월이 수월관으로 간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온옥지는 혹시나 온자월이 들킨 게 아닐까 걱정했다.만약에 들켰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온옥지가 수월관으로 사람을 보내야 하나 고민할 무렵, 드디어 온자월이 돌아왔다.그가 돌아왔을 무렵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라 온옥지는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종이 바깥에 대고 물었다.“누구십니까?”“나야.”침상에 누우려던 온옥지는 바로 동작을 멈추고 시종을 시켜 문을 열게 했다.“셋째 공자.”방 안으로 들어온 온자월이 시종에게 말했다.“넷째랑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넌 이만 나가보거라.”시종은 온옥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인이 고개를 끄덕여서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형님, 왜 이제야 돌아오셨습니까? 온사는요? 걔 데리고 안 왔어요?”침상에 걸터앉은 온옥지가 물었다.‘온옥지가 너에게 묻거든 이렇게만 대답해.’온자월의 눈이 잠시 초점이 나갔다가 곧이어 정상으로 돌아와서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그날 저녁에 수월관으로 갔더니 야행복을 입은 자랑 마주쳤어. 그자랑 싸우게 됐는데 놈이 도망가더라고. 그래서 쫓아갔는데 결국 놓쳐버렸어.”“야행복을 입은 자요? 원래 온사의 처소에 있던 자인가요? 아니면 형님처럼 온사에게 뭔가 하려고 찾아간 자일까요?”온옥지는 온자월의 수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온자월이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나랑 같은 목적일 거야. 그런데 그 자가 온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나도 몰라.”온옥지가 담담히 말했다.“온사 걔가 쌓은 업보가 워낙 많으니까요.”온자월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말수가 적은 그의 반응에 온옥지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한번 쳐다보다가 말했다.“참, 형님. 아직 손을 쓴 게 아니라면 내가 준 약은 그대로 가져오셨겠죠?”온자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병을 온옥지에게 건넸다.약병을 받은 온옥지가 말했다.“오늘은 시간도
온권승은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온자월을 불렀다.그러자 온자월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는데, 그가 방밖을 나가기도 전에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큰일 났어요!”온권승 일가족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온옥지의 시중을 들던 시종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리, 큰 공자, 빨리 넷째 공자의 처소에 가보세요. 큰일 났어요!”식탁에 마주앉았던 가족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무슨 일이야? 넷째가 정말 아프기라도 한 거야?”“그게 아니라….”시종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넷째 공자께서 갑자기 말을 하지 못하세요!”“뭐라고?”한참 후, 온씨 일가족은 온옥지의 침상 앞으로 달려가서 긴장한 얼굴로 의원의 진단을 기다렸다.진맥을 마친 의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아섰다.“어제나 오늘 넷째 공자께서 뭐 이상한 거 드신 적은 없나요?”온장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넷째는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아서 약을 많이 먹다 보니 식욕이 떨어져서 얼마 먹지도 못해. 세끼 식사 외에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그럼 이상한 걸 접촉한 적은요?”의원이 또 물었다.“그건 넷째 본인만 알겠지.”하지만 온옥지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온몸에 힘이 빠져 붓대도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온장온이 물었다.“의원, 대체 우리 넷째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요?”“제 판단이 맞다면 아마 중독인 것 같습니다.”“중독?”온권승 일행은 이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어떤 간덩이 부은 자가 진국공부 저택에서 독을 푼단 말인가!“혹시 해결 방법은 없어?”의원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해독제를 드리고 싶지만 워낙 복잡한 독이라 해독약이 없다면 해결이 힘들 겁니다. 그러니 더 실력 있는 의원을 찾아보시지요.”온권승은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 의원의 의술은 경성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이런 사람도 해독약을 만들 수 없다면 절대 평범한 독은 아닐 것이었다.온권승이 명
시종들이 온옥지의 방에서 밀실을 수색해낸 순간, 온권승은 이 일이 단순한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그래서 일단은 안을 수색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눈치 빠른 이 태의는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척을 하며 약가루의 연구에만 집중했다.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간 뒤, 이 태의는 굳은 표정으로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나리, 이건 저도 어쩔 방법이 없네요.”이 태의마저 방법이 없다는 말에 온권승은 인상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독이기에 이 태의마저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이게 그렇게 독한 약이었소?”“해독이 어려운 이유는 안에 들어 있는 약의 성분이 복잡한데다가 흔히 볼 수 없는 사린이라는 희귀 독초가 들어가 있습니다.”“이것 때문에 저도 해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희귀 약초인 청사화가 들어가야만 해독할 수 있지만 경성에서 유일하게 하나 있던 청사화는 이미 일년 전에 사용되었죠. 지금 그걸 구하려면 힘들 겁니다.”이 태의의 한숨소리에 온권승 일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이 태의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실 건 없어요. 독성이 강한 독이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거든요. 공자에게 독을 먹인 자는 아마 목숨을 취할 생각이 없었나 봅니다.”온권승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이 독으로 넷째 공자는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지만 몸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해독하지 않아도 온옥지가 죽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기껏해야 말을 할 수 없고 침상에서 내릴 수 없을 뿐이었다.약간 의식을 회복한 온옥지는 눈을 뜨자마자 그 말을 들었다.그는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아무리 입을 열고 말을 하려고 해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결국 감정이 격해진 그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넷째야!”다행히 이 태의가 돌아가지 않았기에 침술로 다시 의식을 깨울 수 있었다.이 태의는 자신의 말을 듣고 충격 받아 기절했다고 생각해서 다급히 온옥지를
“아까는 네 독이 맞다면서 고개는 왜 흔드는 것이냐?”온장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하지만 온옥지 역시 억울하고 갑갑한 마음뿐이었다.최면제는 그가 만든 것이었지만 이런 효과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그의 최면제에는 중독자가 말을 못하고 온몸에 기력을 잃게 만드는 효과는 절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약을 가져다준 온자월을 떠올리자 온옥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빨리 말해봐요! 형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거죠?’설마 그의 약을 누가 바꿔치기 한 것일까?‘온사? 아니면 그 야행복을 입은 자..?’온옥지는 스스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기에, 그저 온자월의 대답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애원의 눈빛에 온자월은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았다.온옥지는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마침 그때, 둘 사이의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넷째 오라버니, 왜 계속 셋째 오라버니를 보고 계세요? 셋째 오라버니가 뭐 아는 거라도 있나요?”온모의 목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온자월에게 향한 탓에, 아무도 온모의 눈빛에 비친 혐오감을 보지 못했다.‘멍청한 것들!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는… 이러니 평생 약골로 살지.’온모는 비참한 온옥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온사의 작품임을 직감했다.‘그렇게 자신 있어하더니 이게 뭐야? 데려오라는 애는 안 데려오고 자기가 당하는 꼴이라니!’온모는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저런 것들에게 기댄 내가 잘못이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어.’“셋째 오라버니, 아는 게 있으면 말씀 좀 해보세요. 넷째 오라버니가 너무 안쓰럽잖아요.”온모는 안타까운 얼굴로 온자월을 다그쳤다.그녀는 온자월이 자신에게 불리한 답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사형제 중에 가장 그녀의 말을 잘 듣는 개가 온자월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평소의 온자월과는 완전히 달랐다.온장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막내 말이 맞아. 셋째야, 아는 게 있으면 어서 말해봐.”그
온자월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온자신은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퍽!온자신의 주먹에 온자월은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졌다.그리고 곧이어 분노에 사무친 주먹질이 시작되었다.“너희들 왜 그랬어! 어떻게 동생한테 그럴 수가 있어! 온사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었어도 걔 너희들한테 뭐 잘못한 적도 없잖아! 너희가 뭔데 걔한테 그런 짓을 해? 너희가 뭔데!”온자신은 그 약이 개조된 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자신의 두 남동생이 짜고 여동생에게 독을 먹이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피를 나눈 남매인데 그렇게 화목하게 지냈는데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만해! 그러다 애 죽겠어!”온권승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바닥에 쓰러진 온자월은 반격도 하지 않고 그저 온자신의 매를 그대로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온자신의 귀에 아버지의 호령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분노한 목소리로 온권승을 향해 소리쳤다.“아니, 아직 부족해요!”그는 고통과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이 모든 것에는 아버지의 잘못도 있고 저의 잘못도 있고 우리 모두의 잘못이에요. 하지만 온사가 뭘 잘못했죠? 걔가 왜 우리한테 이런 짓을 당해야만 하는 거냐고요!”아버지는 틀렸다. 그는 온사를 집에서 내쫓지 말았어야 했다.큰 형님도 틀렸다. 그는 온사의 말을 믿어줬어야 했다.그리고 그 역시 잘못했다. 온사에게 욕을 퍼붓고 매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셋째, 넷째, 그리고 막내까지!온자신은 처음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온모를 노려보았다.“왜 저들에게 온사를 찾아가라고 했니? 너 쟤네들이 온사를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왜 굳이 쟤네들에게 그런 일을 시켰어?”온모는 온자신의 사나운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곧이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이 멍청이가 지금 나한테 화를 내? 감히 나한테?’온모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지만 지금 상황에 같이 화를 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그녀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