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때의 온모는 독에 당한 것이 온옥지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온장온은 온옥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푹 쉬라고 당부한 뒤, 온권승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넷째는 어떻게 할까요? 사람을 보내 해독초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그래야지. 하지만 저애들이 말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자리에 앉은 온권승이 담담히 말했다.온장온은 의아한 얼굴로 차를 따르고는 자리에 앉았다.“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독약을 넷째가 만들어낸 거라면 그 정도로 대비를 안 해뒀을 리가 없어.”온권승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전에 소택이도 독에 당한 적 있었는데 그 독도 보통의 의원들은 방법이 없다고 해서 이 태의가 나서서 해결했지. 그 일이 있기 전에 충용 후작가에 다녀온 사람이 둘 있었어.”온장온이 긴장한 얼굴로 온권승에게 물었다.“온사와 막수 사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온권승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러자 온장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버지의 의심은 이해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온사는 어릴 때부터 독초와 접촉한 적도 없고, 사람에게 독을 먹이는 짓은 절대 못할 애예요.”온권승은 장남을 힐끗 바라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걔는 아니라 할지라도 걔 사부라면 얘기가 다르지.”“설마 막수 사태 말씀이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아무리 봐도 평범한 승려로만 보이던데요.”“그 여승이 온사랑 충용 후작가에 왜 갔는 줄 아니? 그 사람 그 댁 노부인의 병치료를 위해 간 거야.”온권승은 담담히 말했다.“의술을 행하는 자라면 독도 만들 수 있지.”그는 막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가 아는 사실은 단지 상대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란씨 가문과도 연관이 있고 황실 사람들과도 왕래가 잦았다는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어린 황제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수월관에 맡겼을 리 없기에, 그는 넷째의 독은 어쩌면 막수의 짓이라고 의심했다.그녀가 직접 나선 게 아니라
“저 사람 예전 진국공부 적녀 온사 아가씨 아니야?”“맞아. 그런데 지금은 온사 아가씨가 아니라 폐하께서 친히 책봉하신 성녀이지.”“성녀는 무슨. 그냥 여승이지 뭐!”“조용히 해. 아무리 여승이라도 우리가 건들면 안 되는 존재이셔.”“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몰라. 어찌 저런 악하고 비열한 인간을 성녀로 만들었을까.”“난 괜찮은 것 같은데. 전에 기도의식에서 봤는데 그럴싸하더라고.”“그럴싸하긴 무슨, 얼굴만 좀 예뻤지 마음씨 착한 거로 치면 온사는 여동생에 비해 한참 멀었지.”“저런 인간이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니 재수없어. 안 그래, 제성아?”한 놈은 아예 마차에서 머리를 내밀고 온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혐오의 감정을 드러냈다.그런데 이때 그의 옆에 서 있던 제씨 가문 마차에서 갑자기 커다란 손이 튀어나오더니 턱 하고 그자의 정수리를 후려쳤다.제성은 성난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혓바닥이 왜 이리 더러워? 아침에 양치도 안 하고 왔어? 그러다가 태후마마 눈밖에 나면 어쩌려고!”말을 마친 그는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가림막을 내렸다.그러자 제성에게 맞은 사내는 그가 있는 쪽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이상한 놈일세.”제성 본인도 자신이 요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당나귀차에 앉은 어린 여승을 보고 있자니 분명 촌스러운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제성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머릿속에는 그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절을 하며 남산을 오르던 온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 인상 깊은 기억이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잊혀지지 않았다.그는 그날 돌아온 이후로 틈만 나면 온사의 소식을 알아보았고, 자신이 그녀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온사가 참배를 하며 산을 오른 것은 최소택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최소택을 찾아가서 이 일을 얘기했더니, 그로 인해 온사가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최소택의 수모를 당한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도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는 온사를 직접 만나 사과하는 게 좋겠다고 생
“누군데?”제성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갑자기 무엇이라도 떠오른듯 눈을 부릅떴다.“설마 최소택이 한 짓이야?!”“맞아. 그 녀석이 훔친 거래. 처음에 인정했으면 될 것을 온사한테 뒤집어씌웠다나 봐.”사내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처음엔 나도 안 믿었는데 지금 보니까 소문이 사실인 것 같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맞은편 마차에서 욕설이 들려왔다.“최소택 이 망할 자식이!”제성은 한때 최소택과 꽤 친하게 지냈어서 그의 성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지난번 진국공부에서 최소택의 황당한 말을 들은 후로 그는 최소택에 대해 점점 실망했다. 그래도 점잖은 집안인 충용 후작가의 세자가 전 약혼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짓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아무리 약혼을 파기했어도 온사와 그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을까!제성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마차가 황궁으로 들어간 후, 그는 곧바로 최소택을 찾아갔다.한편, 북진연은 친히 온사와 막수 사태를 호위하여 입궁한 후, 그들을 조용한 편전으로 안내했다.“폐하께서 마차를 보내려고 했는데 말이지.”그러자 북진연은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폐하의 그런 호의를 막수는 단박에 거절해버리고 말았다.“폐하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출가인이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무고 사저도 그 말에 동의했다.비록 당나귀차를 타고 왔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편안했다.수월관은 본디 마음을 정화하고 수련을 하기 위한 곳이기에,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당나귀차가 제격이었다.온사도 이미 수월관 생활에 적응했기에 사부와 사저들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다.그래서 당나귀차가 황궁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막수와 사저들은 가장 여린 온사를 당나귀에 태웠다.처음에는 온사도 약간 쑥스러웠지만 천천히 길을 걷는 당나귀 등에 타고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그래서 당나귀
온권승의 방문은 온사가 예상했던 바이긴 했지만, 항상 진중하고 냉철하던 아버지가 이렇게 급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황궁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찾아올 줄이야.막수 사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온사에게 물었다.“내가 같이 나갈까?”“왜 오셨는지는 아니까 그러실 필요 없어요.”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막수에게 말했다.“그래. 내가 했던 말만 명심하면 돼.”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궁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온권승은 편전에서 멀지 않은 구석진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온사가 나오는 걸 보고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그가 있는 곳을 힐끗 바라본 후에 편전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그러고는 온권승을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진국공 어르신께서 나를 먼저 보자고 하셨으면서 왜 다가오질 않으시는 거죠?”온권승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다.불과 두 달 사이에 딸이 자신을 이 정도로 경계할 줄은 몰랐다.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등 뒤에 있는 이에게 손짓을 한 후에 온사에게 다가갔다.온사는 온권승의 어깨너머로 이쪽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비록 너무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온권승이 데려온 그림자 호위 정도로 보였다.온사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에 있었다.부녀는 거리를 두고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온권승이었다.“해독약이 너한테 있어, 아니면 네 사부에게 있어?”온사는 담담한 미소로 답했다.“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성녀인 제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온권승을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그를 분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권위로 누르는 거였다.특히나 항상 무시하고 심지어 혐오하던 딸에게 갑자기 권위로 밟히게 되었으니 속이 꽤나 쓰릴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온권승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온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이제 시치미를 뗄 줄도 알고… 참 많이 컸구나.
원하는 건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법이었다.온권승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뒤돌아서 그곳을 떠났는데,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숨어 있던 그림자 호위가 모습을 드러냈다.“나리.”그러자 온권승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여기서 지키지 말고 지금 바로 수월관으로 가. 온사와 막수의 방을 뒤져서라도 어떻게든 해독제를 찾아내거라.”“예.”그림자 호위가 떠난 후, 온권승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군아, 네 딸은 역시 널 닮아서 참으로 매정하구나. 하지만 난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야.”하물며 상대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불효녀였다.온권승은 침착한 표정을 하고 그곳을 떠났고, 그가 떠나자마자 추월은 방금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온사에게 전했다.온사는 냉소를 지었다.“역시나, 처음부터 나랑 협상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어.”방금 정말 온권승의 곁으로 다가갔더라면 아마 그 그림자 호위가 바로 움직였을 것이다.협박이 가능하니, 그녀와 협상할 이유도 없었다.온권승의 의도를 알아챈 온사는 역겨워서 금방이라도 토해버릴 것만 같았다.“이 나라의 진국공이라는 사람이 자기 딸에게 이런 비열한 수를 쓰려고 했다니.”어쩌면 온옥지는 온권승을 가장 닮은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떻게 할까요? 제가 돌아가볼까요?”“아니. 해독제는 수월관에 없어.”온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해독제는 옥패 공간 안에 있었기에, 온권승이 수월관 전체를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그러므로 그녀는 오늘의 연극이 점점 기대되기 시작되었다.잠시 후, 연회가 시작되었다.온사는 예부의 안배에 따라 먼저 태후를 위해 경을 읊고 축원을 올렸다.축원이 끝난 후, 각 가문에서 선물을 내놓을 시간이었다.온사는 이제 온씨 가문 사람이 아니기에 진국공부를 대표해서 선물을 선보일 임무는 자연스럽게 온모에게 돌아갔다.온모는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당연히 놓치지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태후의 치하도 받았다.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온모가 입을 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온사에게로 쏠렸다.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본 것처럼 보는 사람도 있었다.어쨌거나 경성에서 가장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온사였다.온모는 술잔들 들고 온사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언니가 집을 떠난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네. 집이 많이 그립지?”온사는 담담히 대꾸했다.“안타깝지만 그건 아니야.”그러자 온모는 입술을 오므리며 웃더니 일부러 온사의 옆으로 다가와서 앉고는, 소리를 낮춰 온사를 비아냥거렸다.“괜찮은 척하지 마. 집을 떠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가문 전체가 완전히 내 것이 되었네? 이제 아버지에게 딸은 내가 유일하고 오라버니들에게도 내가 유일한 여동생이야.”“내가 전에 네가 빨리 집을 나가라고 얼마나 바란 줄 아니? 예전에는 그리도 눈치가 없었는데, 두 달 전부터 갑자기 똑똑해졌어.”온모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온사의 어깨를 짓누르며 물었다.“그러니까 누가 가르쳐줬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온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온모는 그 동안 그녀의 변화를 누가 뒤에서 가르쳤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온모의 머리로는 절대 온사가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물론 알았다고 해도 그땐 이미 늦었다.“나한테 굳이 다가와서 떠보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온사는 시선을 아래에 두고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온모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말 안 해도 돼. 어차피 조만간 알아낼 거니까.”말을 마친 온모는 손에 든 술잔을 온사의 찻잔과 부딪치고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그럼 약속한 거다? 다음 내 생일 때 집으로 와. 내가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 볼게. 그냥 와서 날 위해 기도경 좀 읊어주면 돼. 어때? 언니도 좋지?”“아니, 싫어.”가증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온사는 단박에 거절했다.그러자 온모가 울적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싫어? 언니는 여전히 내가 그렇게 싫어? 난
온사는 말을 마친 후에 눈썹을 찡긋하며 온모에게 가소롭다는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에는 도발의 의미가 명백했고 방금 온모의 도발에 대한 복수처럼 보이기도 했다.“온사, 그만해!”진국공부 사람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벌떡 일어선 사람이 있었다.온모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최소택은 분노의 눈빛으로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성녀가 되었다고 온모를 모욕해도 된다고 착각하지 마! 내가 여기 있는 한 아무도 온모 못 괴롭혀!”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옆에 있던 제성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야, 최소택. 아가씨들끼리 얘기 중인데 넌 뭐라고 끼어들어?”제성은 연회가 시작한 이후로 최소택에게 한방 먹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연회 끝나기도 전에 또 나서서 잘난 척하는 최소택이 보였다.제성은 주저없이 앞으로 나서서 최소택을 제압했다.“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성녀 전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지.”아무도 제성이 온사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호부상서 제 대인마저도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저 자식은 오늘따라 왜 그러는 것이야?’“넌 무슨 헛소리야?! 날 도와주는 것도 고사하고 지금 온사 쟤 편을 들어?”최소택은 불쾌한듯 인상을 쓰며 제성을 밀쳤다.“이거 안 놔? 나 여기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나도 여기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제성이 냉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최소택은 그저 그가 농담한 건 줄로 알고 다시 온사에게로 시선을 돌려 경고했다.“내가 했던 말 명심해. 알았어?”온사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이상한 눈길로 제성을 바라볼 뿐이었다.기회를 봐서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던 제성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펴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제성이 너 무슨 그런 멍청한 웃음을 짓고 있어?”호부상서의 질문에 제성은 순간 굳은 표정으로 버럭 화를 냈다.“누가 멍청하게 웃었다고 그래요?”순식간에 표정이 변한 아들을 바라보며 제 대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세상에나! 어찌 이럴 수가!”“어쩐지 온사의 생일이 올해는 좀 이상하다 했는데… 진짜 생일이 아니었을 줄이야!”“그럼 그 날은 대체 누구 생일이지?”“뭔가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네.”“언니가 진짜 언니가 아니었고 동생이 동생이 아니었어. 진국공 집안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네.”“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영문을 모르는 누군가는 옆사람에게 묻기 바빴고, 이미 눈치챈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온권승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온권승은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온자월을 잡았다.온자월은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온권승의 눈에 초점을 잃은 아들의 눈동자가 보였다.“그래, 온사. 너 정말 고약한 짓을 했구나.”지금도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온권승은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온사는 평소처럼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온권승에게 들려주었다.“진국공 어르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네요.”“네가 몰라?”온권승은 자기가 딸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네가 모를 리 없지.”이렇게 티가 나는데 예전에 만만히 보고 방심하지 않았다면 온자월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면 온사에게 자신들을 도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너 이런 식으로 네 오라비들을 이용해 먹는 거, 앞으로 얘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널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지도 않니?”“그걸 어찌 이용이라고 말씀하시나요?”온사는 아미타불을 읊은 후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잊으셨나요? 제가 진작에 말씀드렸었죠. 누가 날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요.”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딸을 마주한 온권승은 처음으로 이 아이의 속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성녀의 신분으로 그를 도발하고 승려의 신분으로 그와 맞서고 있었다.분명 그가 버렸던 온사가 맞는데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지금의 온사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만만하고 어리석던 사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