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온권승은 침착함을 유지했다.“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앉아.”온모는 온권승의 위엄 앞에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수습하고 자리에 앉았다.곧이어 온권승이 셋째를 장남에게 맡겼다.“셋째가 오늘 몸이 좀 안 좋나 보다. 장온이 네가 데려가서 잘 돌보고 있어. 어디 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온장온은 여전히 의아했지만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예, 아버지.”온장온이 온자월을 데리고 나간 후, 온권승은 담담한 어조로 온모에게 말했다.“실질적인 증거도 없고 모든 건 추측일 뿐이야. 네가 동요하지 않고 있으면 알아서 해결돼.”온모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그랬다. 온사가 생일을 폭로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확실한 증거만 없다면 그녀는 여전히 진국공부의 양녀였다.말은 그렇게 하지만 온모가 양녀의 신분을 진심으로 만족한다는 말은 아니었다.그녀는 이를 갈며 몰래 온사를 노려보았다.‘저 망할 년 때문에 일만 더 꼬이게 생겼네!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기껏 부탁했더니 여자 한 명 못 끌고 와서 이 사단까지 만들어?!’오늘 연회에서 그녀의 생일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아마 내일부터 경성에 흉흉한 소문이 퍼질 것이다.어쩌면 그녀가 진국공 가문의 적녀가 되는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하지만 온사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온모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온자월 체내의 독은 아직 해독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마침 그를 데려간 사람은 형제들 중에 그나마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온장온이었다.물론 온권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굉장히 똑똑한 부류에 속했다.의심의 씨앗을 심어 놓기만 한다면 그는 알아서 진실을 캐내려고 움직일 것이다.그리고 일은 온사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그리고 연회의 연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온사에게는 조력자였고 온모에게는 재앙인 셈이었다.“성녀 전하, 예전에 성인식 올렸던 날이 전하의 생일이 아니었나요?”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제성이 의아한 얼굴로
“정분은 무슨 정분?! 최소택, 입만 열면 사람을 모함하네! 네가 더러운 인간이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보이는 거야?”온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제성은 최소택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대체 누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거야!”“너!”제성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최소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내가 여기서 네 추한 짓을 다 까발려 주기를 바라니? 사람들이 네가 얼마나 음침하고 못난 놈인지 여기서 밝혀줘?”“닥쳐!”최소택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감히 내 얘기를 사람들한테 한다고? 어디서 수작질이야?’충용 후작은 곧 싸움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보고 말리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런데 서자마자 제 상서가 그의 팔목을 잡았다.“최 후작, 애들 싸움에 어른인 우리가 왜 끼어들어? 쟤네들끼리 해결하라고 해. 괜찮아, 괜찮아.”“하지만 여기 진국공도 계신데….”“괜찮아. 자네 형님이 정말 온사가 못마땅해도 여기서 뭘 하지는 않을 걸세.”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태후의 생신연회 중이었다. 태후가 먼저 자리를 뜨기는 했지만 누군가 연회를 망친다면 황제나 섭정왕이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온사가 오늘 일을 크게 만들기로 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북진연을 내보낸 이유도 간단했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섭정왕 전하께서 버젓이 버티고 앉아 있는데, 대체 누가 함부로 나서려고 할까?온모가 먼저 착한 척하며 나선 후에 의미심장한 정보를 공개한다면, 똑똑한 사람은 온모의 본모습을 간파할 것이기에, 그동안 온모가 철벽처럼 유지해 온 착하고 순수한 가면은 벗겨지게 될 것이다.진짜로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은 그녀처럼 다른 사람의 아픈 곳을 찌르지 않는다.이 연회는 결국 제성과 최소택이 밖으로 싸우러 나가면서 끝이 났다.하지만 최소택이 끼어들면서 제성은 결국 원했던 사과를 할 수 있게 되었다.물론 그건 제성 혼자만의 생각이었다.온사는 자꾸만 사과하는 그에게 담담히 말했다.
제성은 최소택 이름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버지, 앞으로 제 앞에서 그 자식 이름은 꺼내지도 마세요. 제가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긴 하지만 저 걔처럼 인성 고약하고 품위 떨어지는 인간 아닙니다.”몰래 바람이 난 것도 그런데 전 약혼녀를 모함하는 짓까지 벌이다니!그와 한때 친구였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도둑질도 도둑질이지만 타인을 모함하는 건 악질 중에 악질이었다.오늘 연회에서 최소택이 한 짓을 까발리고 악질이라고 욕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이미 많이 봐준 거였다.“그래, 그래. 얘기 안 하마.”제 상서는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그래도 너무 선을 넘지는 마. 아무리 그래도 충용 후작의 외동아들 아니니. 게다가 외삼촌이 진국공인데. 이 일은 이미 섭정왕께서 나서서 정리하셨으니 넌 그만 끼어들어.”“아버지, 걱정 마세요. 지금은 걔 얼굴 보기도 싫어요! 저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요.”하지만 제성은 한껏 신나서 말했다.“성녀 전하께 생일 선물을 전달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제대로 된 걸 준비해야죠.”제 상서는 한심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경고했다.“선물을 할 거라면 정성을 들여야 할 거야. 너무 비싼 것만 사지도 말고. 지금 성녀 전하는 소박하게 수련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야. 금은보화 같은 것들을 가져갔다가는 전하의 신분을 모독하는 것과 같아.”아버지의 가르침에 제성은 머리를 탁 쳤다.“맞아요! 아버지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럼 전 뭘 선물해야 할까요?”“그건 네가 오래 골라야지. 적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만 잊지 마.”제성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제 상서가 그제야 아들이 말귀를 알아들었구나 하고 흐뭇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제성이 말했다.“적당하고 합리적인 건 어떤 걸까요?”제 상서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아 버렸다.한편, 미리 밖으로 나온 온장온과 온자월은 마차를 타고 먼저 진국공 저택에 도착했다.그런데 문지기가 아무리 기다려도 마차에서는 사람
온자월의 말에 온장온은 한참동안 침묵에 빠졌다.의심을 했던 적은 있었지만, 온사의 생일날 전에는 두 여동생 사이의 생일 순서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다.섭정왕이 모두의 앞에서 사실을 꼭 집어 말했을 때에야 그들은 분명 같은 나이인데 온모의 생일이 온사보다 빠르고 원래는 언니었어야 할 애가 막내가 되었었다는 것을 인식했다.이런 세세한 것들을 그들은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온장온은 갑자기 죄책감이 들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온사의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잊은 그들이니 어찌 이런 것에 주의를 기울였을까?비록 아버지가 나중에 막내가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하려고 생일을 앞당겼다고 해명했지만 그날 이전까지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별일 아니라서 얘기를 안 한 걸까?아니면 정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수월관에서 처소로 돌아간 그날 온장온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결국 그는 애써 자신을 설득하기로 했다.‘아버지께서는 결백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분이야. 그리고 어머니께서 계실 때 두분 사이도 너무 좋으셨어. 그러니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배신했을 리는 없어.’그런 쪽으로 생각을 돌리자 더 이상의 의심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의심을 하고 있는 온자신에게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따끔히 경고까지 했다.섭정왕과 진국공은 조정에서 정적이라고 볼 수 있었기에, 그쪽에서 이 일로 아버지를 모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을 지우려고 해도 이미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다.그리고 온자월은 온사가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이었기에, 일단 그녀는 연회에서 모두의 마음에 의심을 심었다.그리고 온장온에게 증거는 없지만 어찌 보면 명백해 보이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예전에 심었던 의심의 씨앗을 키우기 시작했다.“네가 한 말을 나는 오늘 못 들은 거로 하겠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에게도 헛소리하지 말거라. 알겠어?!”온자월의 눈빛이 흔들리더
온자월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나랑 얘기하는데 뭘 그리 긴장해? 등 뒤에 뭐 감췄어?!”그러자 온모는 조심스럽게 감췄던 것을 꺼내놓았다.그것을 본 온자월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봉선루의 오리구이잖아?! 막내 네가 일부러 날 위해 사온 것이냐?”온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오라버니는 연회에서 먼저 돌아오셨으니 배고플 것 같아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사왔어요. 오라버니는 봉선루 오리구이를 가장 좋아하시니까요.”온장온을 찾아가려던 온자월은 일단은 일을 미루기로 했다.“역시 막내는 세심하다니까. 오라버니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고.”온자월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온모를 안으로 이끌었다.“어서 들어와서 앉아. 마침 나도 배고프던 참이었으니 같이 먹자.”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후, 온자월은 기대에 들뜬 얼굴로 오리구이를 싸고 있던 유지를 풀었다.그러자 온모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저는 됐어요. 연회에서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거든요. 오라버니 혼자 드세요.”가장 사랑하는 막냇동생이 주는 음식이니 온자월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온모가 배부르다고 하니 정말 그런 줄 알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렇게 반 마리 정도 먹자 갑자기 심한 두통과 현기증이 찾아왔다.아직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지 못한 온자월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온모에게 말했다.“막내야, 오리구이에….”온모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한 채, 모르는 척 그에게 되물었다.“예? 오리구이가 왜요?”“오리구이에… 독이 들었…!”그 말을 끝으로 온자월은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식탁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그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온모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무능한 것. 굳이 내가 직접 움직이게 만들다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더니 온자월을 끌어서 침상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그렇게 잠든 것처럼 만든 후, 남은 오리구이를 챙기고 모든 흔적을 지운 뒤, 온자월의 처소를 떠났다.다
하지만 마중을 나간 사람은 온사가 아니었다.온권승은 상대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온사는 어디 있지? 당장 나오라고 해!”막수는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계단에 서서 온권승을 내려다보았다.“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넌 여전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막수 사태의 말에는 진한 비웃음이 느껴졌다.분명 앞에 서 있는 상대는 이 나라의 권력자인 진국공인데도 그녀는 전혀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상대를 가소롭게 바라보기까지 했다.“난 지금 너랑 옛날 얘기하러 온 게 아니야. 당장 그 아이를 내놔. 안 그럼 내 성격 너도 알지?”“네 성격?”막수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파렴치하고 비열한 성격 말이야? 옛날처럼?”온권승의 얼굴이 음침하게 변했다.그는 채찍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막수, 잊지 마. 셋째와 넷째도 그 여자의 아이야. 넌 그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온사 걔만 옹호할 참이야?”“아버지인 네가 지켜주고 있잖아?!”막수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의지할 곳 하나 없는 무우만 불쌍하지. 사부인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대체 누가 지켜주겠어?”그 말을 들은 온권승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막수를 노려보았다.“역시나 셋째와 넷째가 걸린 독은 네 걸작이었군.”그 말에 막수는 흠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내 걸작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지? 진국공, 난 네가 오늘 누굴 잡으러 왔는지 상관하지 않아. 다만 수월관에 진입하려면 법도대로 해야지.”그 법도란 바로 황제의 허락이었다.온권승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안 들어가도 돼. 하지만 온사 걔는 제 오라비들이 자기 때문에 죽어가는 걸 지켜만 보진 않을 거야. 그러니 당장 기어서라도 나오라고 전해!”온사에게 협박을 가하는 온권승의 모습에 막수의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했다.“온권승! 말조심해야 할 거야. 넌 폐하께서 친히 책봉하신 성녀에게 기어나오라고 명령할 자격 없어!”그 순간 수월관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그리고 바로 그때, 마침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
“마침 섭정왕 전하도 오셨으니 진국공은 전하께 의중을 여쭈시면 되겠네요. 나한테 물어보면 대답은 같으니까요.”수월관에 들어가려면 법도대로 하라는 말이었다.폐하의 허락 없이는 온씨 일가 사람을 절대로 안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온권승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당장 들고 있는 이 채찍으로 저 거슬리는 북진연의 뺨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럴 필요는 없네. 굳이 법도를 따지겠다면 내 친히 폐하를 뵙고 오지.”온권승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감히 자기 오라비들을 독살하려 한 인간을 언제까지 성녀의 자리에 두나 폐하께 독촉이라도 드려야겠어!”말을 마친 온권승은 차갑게 뒤돌아섰다.그런데 이때, 흑기군이 다가오더니 진국공부의 마차를 가로막았다.“지금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참고 있던 온권승의 분노가 폭발했다.“별다른 뜻은 없네.”남자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더니 손짓을 했다.“나이 든 진국공이 여기까지 오는데도 힘들었을 텐데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너무 급할 것 없어. 이미 왔으니까 밖에서 기다리게.”말을 마친 북진연은 성큼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막수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문을 닫은 후에 관내로 돌아갔다.그 모습을 본 온권승은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반 시진 후, 온권승이 슬슬 짜증이 올라올 무렵에 수월관 대문이 드디어 다시 열렸다.이번에는 온사도 같이 나왔다.그녀는 온권승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진국공 어르신 두 아들이 독에 걸렸다는데… 아직 저택에 있다고요?”“그래.”온권승은 그녀를 빤히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니 지체 말고 빨리 갑시다.”“가?”온권승이 물었다.“나랑 저택에 간다고?”“저택에 안 가고 어떻게 아드님 독을 치료합니까?”그 말을 들은 온권승은 드디어 온사가 반성한 줄 알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해독약은 있고?”온사는 비웃음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저는 처음부터 제 손에 해독제가 있다는 말을 한 적 없습니다.”“저와
결국 그 예감은 적중했다.온사가 마차에 오른 후, 흑기군이 바로 그 마차를 장악했다.마부에서 호위까지 전부 흑기군으로 교체되었다. 절대 가까이 못 오게 하겠다는 온 씨 가문의 의지가 보였다.그 모습을 본 온권승은 똥 씹은 표정을 했다.“이건 진국공부의 마차입니다!”“지금은 성녀 전하의 마차가 되었지.”북진연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물론 자네는 성녀 전하를 마차에서 내리라고 할 수는 있네. 그럼 성녀 전하는 자네와 함께 국공부로 가려 하지 않겠지.”온권승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으나 북진연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바로 그때, 마차 안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출발할 거죠? 서로 시간낭비 맙시다!”북진연이 미소를 지으며 온권승에게 물었다.“지금 자네한테 묻고 있지 않나, 진국공. 갈 거요, 말 거요?”온권승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갑시다.”두 시진 후, 온사는 북진연과 흑기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진국공 저택으로 돌아왔다.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한때 행복하게 살았다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 나온 이곳을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손은 왜 그러오?”등 뒤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온사는 그제서야 자신이 손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왜 그런지는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더 이상 전생의 길을 걷지 않고 있지만 그녀는 뼛속 깊이 이 곳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갑자기 커다란 손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따뜻한 온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을 녹여주려는 듯이 꽉 잡아주었다.온사는 놀란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북진연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겁내지 마시오.”온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전하….”그녀가 뭐라고 하려는데 온권승이 다가왔다.온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그러고는 누가 보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큼 앞으로 한발 나섰다.혼자 남은 북진연은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