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네가 내 정원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지.”온사는 피식 웃고는 약초밭에 심은 약초들을 바라보았다.거기에는 사람이 환각을 보게 하는 독약도 있었다.외부에서는 구하기 힘든 약초라고 하는데 그녀가 독약을 배우고 싶다 하여 북진연이 일부러 그녀를 위해 구해다준 약초였다.약재 씨앗 중에는 그것 외에도 적지 않은 독약 씨앗과 묘목이 있었다.지금 약초밭에 심은 것은 곧 꽃이 필 묘목이었다.온사는 김사도가 계속 밖에만 서 있어서 독약을 알아본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그런데 얼마 안 지나 그는 스스로 이 정원에 발을 들였다.이국 사내는 독을 쓸 줄 알아도 독초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 않았다.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 속임수에 쉽게 속아넘어갔을 리 없었다.국수는 그의 체내에 흡입한 독초의 약효를 촉진하는 작용이었다.이 정도 성년 사내를 쓰러뜨리려면 약초의 향을 맡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온사는 오늘의 최대 수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추월, 얘는 주방에 가둬. 이따가 내가 볼일 다 보고 다시 어찌 처리할지 고민해 보자.”김사도를 처리하기 전에 일단 옥패 공간에 들어가보고 싶었다. 김사도에게 그 지네는 아주 중요한 벌레인 듯했다.추월이 김사도를 끌고 간 후에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 옥패 공간을 열었다.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지네가 있는 곳이 느껴졌다.그것은 냇가에 있었다.온사가 도착했을 때, 지네는 냇가에 엎드려 령수를 마시고 있었다.“이런 괘씸한 놈, 감히 내 령수를 훔쳐 마셔?”온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오두막으로 가서 저 녀석을 포획할 뭔가를 찾으려 했다.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철렁하더니 무언가와 연결된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그 신경 쓰이는 느낌은 천천히 지네에게까지 연결되었다.냇가에서 물을 마시던 지네는 그녀의 생각을 느낀 건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오지 마!”이 녀석의 독에 당한 적 있는 온사는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뒤로 후퇴했다.그리고 지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온사는 놀란
그게 아니라면 김사도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지네를 내놓으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온사는 김사도도 같이 있는 자리에서 지네가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지 궁금했다.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녀석, 이리 와. 네 주인을 보러 가야지.”그렇게 온사는 지네를 데리고 주방으로 왔다.안으로 들어가자 기둥에 꽁꽁 묶여 있는 김사도가 보였다.“파군아? 파군! 이리 와, 파군!”온사가 독지네를 데리고 들어가자 의식을 회복한 김사도가 뭔가를 느낀 건지 지네를 부르기 시작했다.“이 녀석 이름이 파군이었어?”온사는 손수건으로 싼 시커먼 독지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그러자 김사도는 다급히 자신의 벌레를 부르기 시작했다.“파군… 이리 와. 와서… 날 구해줘.”그는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듯했다.주인의 부름을 들은 독지네는 바로 김사도를 향해 다가갔다.그런데 뒤에서 온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파군, 어딜 가니? 당장 돌아와.”그러자 김사도를 향해 다가가던 독지네가 걸음을 멈추더니 온사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파군, 이 멍청이가 어디 가?”김사도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기둥에 찧었다.지금 보고 있는 것도 환각 같았다.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벌레가 저 여자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이건 분명 환각이야.’분명 저 성녀가 자신에게 먹인 독이 약효가 지나가지 않은 거라고 김사도는 확신했다.“어서 이쪽으로 와, 파군. 쿨럭… 저 여자한테 가지 마. 저 여자 널 분해해서 가마솥에 끓일 여자야.”온사는 웃음을 꾹 참았다.구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추월이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사태, 환각제의 약효가 곧 사라질 텐데 좀 더 먹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 말에 온사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 저 인간을 상대할 방법은 이미 찾았어.”온사는 독지네와 김사도 사이의 연결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고 싶었다.어쩌면 저 벌레를 갖고 김사도를 통제할 수도 있었다.온사의 시선은 벌레에게서 기둥에 묶여 있는 김사도에게로 옮겨갔다.그녀는 피식 웃음을
“읍! 읍….”지네가 물에 잠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둥에 몸이 묶인 김사도가 발버둥치기 시작했다.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마치 숨을 못 쉬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안면근육도 흉하게 일그러졌다.마치, 물 안에서 파군이 느끼는 고통을 김사도도 똑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이 지네를 죽이면 김사도가 죽거나 중상을 입는 걸까요?”온사는 지네가 죽는다고 김사도가 죽을 거라고 보지는 않았다.정말 그런 거라면 아마 독지네를 풀어서 병기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벌레를 신경 쓰는 정도로 봐서 파군이 죽으면 그에게 큰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사실을 확인한 온사는 손을 뻗어 나무통의 물을 전부 바닥에 부어버리고 축 늘어진 지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파군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김사도의 상황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그 소란 덕분에 김사도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그는 이를 갈며 온사를 노려보았다.“여인이 독하면 무섭다더니 대명인이 한 말이 역시 틀린 게 아니었어!”온사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또 욕해 보시지?”김사도도 지지 않고 덤볐다.“퉤! 이 악랄한 여자야!”온사는 나무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롱박으로 안에 물을 부었다.“너!”김사도는 화들짝 놀라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마치 그가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조여왔다.파군이 아직 나무통에 있었다.“읍…”손발이 묶인 김사도는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쳤다.추월이 어찌나 꽁꽁 묶었는지 그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속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온사는 느긋하게 나무통의 물을 쏟아버렸다.“쿨럭….”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된 김사도는 게걸스레 공기를 들이마셨다.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악랄한 여자야! 이러고도 네가 선량한 척하는 성녀야? 너 힘없는 벌레를 그런 식으로 괴롭히고도 양심의 가책도 안 느껴?”온사는 손사래를 치며 그에게 말했다.“너 나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구나. 그럼 해명을
온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사도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온모가 순수하고 선량해? 천진난만? 웃기고 있네. 내 살면서 이런 웃기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군!”김사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걔 그냥 사기꾼이야. 걔는 우리 모두를 속였어. 그 망할 어미랑 같이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온사는 그가 실컷 욕설을 퍼부은 뒤에야 담담히 말했다.“내 말 또 한번 끊으면 네 벌레를 계속 괴롭힐 거야.”온사는 손가락으로 나무통을 가리켰다.김사도는 그제야 풀이 죽어 말했다.“알았어, 계속해봐.”“네 주인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저 벌레 얘기를 하자.”온사는 약간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저 녀석은 네가 날 독살하라고 보낸 놈이지. 저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아?”게다가 공간의 령수마저 몰래 훔쳐 마신 놈을 지금까지 살려둔 것만으로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저놈이 령수를 먹고 변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니 난 저 놈을 예뻐할 수가 없어. 방금처럼 고통받기 싫으면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야 할 거야.”이미 포로가 된 김사도는 더 이상 반항할 수도 없었다.“물어봐. 아는 건 답해줄게. 모르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고.”온사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넌 온모가 네 주인이 아니라고 했어. 그럼 온모랑은 어떤 관계지? 너희랑 온모, 그리고 온모의 어미 말이야.”수많은 암살자들이 온모의 지시에 따랐다.온사는 그들이 온모 어미의 부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사도가 하는 걸 보니 생각과 전혀 다른 것 같았다.“우린 그 여자의 어미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김사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관계를 설명하자면 독에 당한 허수아비라고 보는 게 맞겠지.”“허수아비?”온사는 예상치 못했던 답에 살짝 놀랐다.“그래. 우리의 체내에는 온모의 어미가 몰래 먹인 독이 들어 있어. 일년에 한번씩 발작을 일으키고 해독제가 없으면 죽기보다 힘든 고통을 겪어야 하지. 그러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독
의미심장한 말에 온모는 순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너희들 오랫동안 해독제를 먹지 못했니?”김사도가 이를 갈며 답했다.“그래. 아주 오랜 고통의 시간이었지.”그들은 해독제를 못 먹은지 이미 3년이 지났다.세번의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해독제를 받지 못했다.그래서 그들의 인원수는 삼백 명에서 이미 이백 남짓으로 줄었다.그러다 금주로 온사를 암살하러 갔다가 실패하면서 또 반이 줄었다.현재 그들은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가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그럼 왜 죽이지 않고 살려뒀어?”온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김사도는 한심하다는 듯이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성녀인데, 출가한 승려 주제에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말 안 할 거야?”온사는 그를 노려보며 압박했다.“해, 해! 하면 되잖아.”김사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우리도 죽이고 싶지. 그런데 온모의 어미는 죽기 전에 우리들한테 자신은 해독제의 처방을 온모에게 전수해 주었고 그러니 우린 온모 걔가 처방전을 해독할 수 있는 날까지 잘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했어. 그럼 독을 완치할 수 있는 해독제를 받을 수 있다고.”“최후의 해독제? 정말 그렇게 말했어?”“맞아.”“너희는 그걸 믿고 온모를 지켜준 거야?”온사는 무슨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김사도를 바라봤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속은 것 같았다.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해독제만 있으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데 온모가 최후의 해독제를 그들에게 줄 리가 없었다.그들의 체내의 독을 완치한다면 온모는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김사도와 그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 온모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었다.‘그동안 그 고생을 했으니 해독제를 받으면 온모를 갈가리 찢어 죽일 수도 있겠지.’“왜 그런 눈으로 봐? 안 들을 거야?”김사도는 온사의 눈빛이 불쾌했다.“알았어, 빨리 말해봐.”온사는 김사도가 순순히 말해줄 때 더 많은
애지중지하는 지네를 남기고 가라니 김사도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넌 파군을 쓸 일도 없는데 왜 굳이 데리고 있으려는 거야?”“그걸 네가 어찌 알아?”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도 저 녀석의 독을 연구하고 싶다고.”“알았어.”김사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이제 나 좀 풀어줘야지?”온사는 등을 돌려 나무통에 있는 지네를 공간에 들여보낸 후, 추월에게 눈빛을 보냈다.추월이 다가와 장검으로 김사도를 묶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김사도는 밧줄을 벗어던지고 뻐근한 손목과 발목을 문질렀다.“독벌레는 내가 가진 게 좀 있어. 거미, 전갈, 불개미도 있고. 어떤 걸 원해? 지금은 줄 수 없고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올게.”“다 줘.”온사는 주저없이 말했다.김사도는 눈을 부릅떴다.“정말 전혀 사양을 안 하네. 그 많은 독충을 먹여 살릴 방법은 있고? 그것들에게 네가 당할 수도 있는데?”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싸늘히 대꾸했다.“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내가 뭐 너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아?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충독에 당해 죽을까 봐 그러지. 그럼 나도 또 해독제를 연구할 사람을 새로 찾아야 하잖아.”김사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걱정 마. 내가 죽으면 너와 온모 먼저 죽이고 죽을 거니까. 그러니 네가 다른 사람을 찾아갈 일은 없어.”그녀를 도와 진실을 파헤치거나, 죽음을 기다리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였다.분명한 협박에 김사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사람 시켜 좀 알아볼게.”말을 마친 그는 온사의 주방을 떠났다.환각제 밭을 지날 때, 김사도는 한송이 챙겨갈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그러자 등 뒤에서 온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내 약초 건드리면 난 네 파군의 배를 가를 거야.”김사도는 순간 손을 내렸다.“참, 쪼잔하긴.”“누가 쪼잔해? 넌 도둑놈이야. 추월, 당장 저놈을 발로 차서 내쫓아 버려!”“야, 야! 하지 마. 내가 갈게!”김사도
서홍화를 구할 길이 없으니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온사는 달랐다.처방을 보니 해독제가 맞는 것 같았고 그녀는 서홍화를 갖고 있었다.김사도 무리가 계속 온모가 해독제를 만들어 주길 기다렸다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물론 그렇게 쉽게 김사도에게 해독제를 줄 생각은 없었다.이 약초가 필요한 사람이 그들뿐이 아니었다.온사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든 공간의 약초를 현세에서 재배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해독약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한 온사는 처방전을 도로 숨겼다.다음 날, 그녀는 산을 내려갈 생각으로 짐을 정리했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어제 오후에 심은 철피석괴가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물론 그것은 옮겨 심기 전에 희석한 령수를 주어서 토양 속에 영기가 아직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영기가 철피석괴가 완전히 외부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버텨줄지는 모를 일이었다.온사는 대전으로 가서 아침 공부를 시작했다.기도까지 마친 그녀는 어머니의 위패가 있는 편전으로 가서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마침 장명등을 든 막수가 안으로 들어왔다.“사부님, 등유를 넣으러 다녀오시나 보네요. 저 시키지 그랬어요.”“괜찮아.”막수 사태는 장명등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어제 네 거처에 또 누가 찾아갔다더구나?”“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이국인 사내 김사도가 찾아왔는데 제가 잘 해결했어요.”“해결했어? 이렇게 빨리? 놈은 독충을 잘 쓴다고 하지 않았어?”“그렇긴 한데 제가 한수 위니까요. 저는 독왕인 사부님이 친히 가르친 제자잖아요.”온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어리광 부리기는. 말해, 오늘은 또 어딜 가려고?”온사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사부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보따리를 잔뜩 들고 나왔는데 내가 장님도 아니고.”막수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바깥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굳이 산을 내려가야겠느냐.”“화내지 마세요, 사부님. 뭐 좀 사러
“온사 넌 양심이 없어?”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온모의 앞으로 다가온 온자월은 다짜고짜 욕부터 퍼부었다.“어떻게 그 많은 그림자 호위를 다 죽였어? 그들은 우리 진국공부 사람이잖니! 그걸 보시고 아버지가 몸져누운 걸 몰라?”“몰라, 알고 싶지 않아.”온사는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넌 정말 양심을 개나 줬구나!”“내가 양심이 없어?”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내가 양심이 없으면 너희가 그렇게 싸고 도는 막내는 뭐지? 오라버니를 독살하려고 한 짐승인가?”“난 신경 안 써!”온자월은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아니었으면 막내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하, 멍청하기는.”온사는 그와 단 한마디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뒤돌아서 갈 길을 가려는 그녀의 앞을 온자월이 가로막았다.“어딜 가? 막내 네가 납치해서 숨겼지? 빨리 말해! 대체 애를 어디에 숨긴 거야?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어!”온사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그렇게 막내가 보고 싶으면 나가서 찾아. 나 찾아와도 소용 없어. 내가 모른다고 하면 정말 모르는 거야!”“너!”온자월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뒤 봐주는 사람 있다고 건방 떨지 마!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아?”짝!온사는 주저없이 손을 들어 그의 귀뺨을 때리고는 차갑게 말했다.“난 널 때렸어. 그리고 넌 날 못 때려. 용기 있으면 한번 해봐.”온자월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네. 하긴, 지금도 주제 파악을 못하면 진국공가 사람들 모두 감옥행이 될 테니까.”“건방 떨지 마, 온사!”“건방 떠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온사는 그의 어깨를 밀치고는 가던 길을 갔다.그 자리에 홀로 남은 온자월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멍청한 정도로 놓고 보면 최소택 그 멍청이랑 비슷한 수준이네.”온사도 길을 가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러고 나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