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숙취는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잘 떨어졌네.”그러고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중얼거렸다.“이제 누님에게 칭찬받으러 가봐야겠군.”그의 손에는 온옥지의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범숙취는 그 머리카락을 들고 창주성으로 돌아갔다.그는 일단 흑기군 영지로 가서 온사를 찾았지만 온사는 그곳에 없었다.그래서 창주성으로 갔더니 새로 연 약방 앞에 약재를 추가하는 온사가 보였다.“제가 도와드릴까요?”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온사의 시야에 능글거리는 웃음을 짓는 범숙취가 들어왔다.“벌써 다 처리했어?”온사는 좀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다.범숙취는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고작 살인 가지고. 이런 건 제게 있어서 가장 쉬운 일이랍니다.”“이거 보세요. 그 온옥지 놈의 머리카락이에요. 일부러 증거로 가져왔으니 확인해 보세요.”“됐어.”온사는 그가 내민 머리카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누님은 저를 그렇게 믿으시나요?”범숙취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온사는 그를 힐끗 보고는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범숙취는 온사가 자신을 해하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곧이어 온사는 다시 손을 내렸다.그리고 범숙취는 그녀의 손등에 조금 전에는 없던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이… 이건 약충인가요?”범숙취는 범가에 있을 때 약충을 본 적 있었다. 그래서 좀 특이해 보이는 벌레를 보자 가장 먼저 약충을 떠올렸다.“누님도 혹시 약충 소환사인가요?”온사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러나 범숙취가 또다시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귀찮은 듯 말했다.“이건 독벌레야. 뭐, 약충으로 봐도 상관없고.”온사는 거미로부터 범숙취가 일을 행한 모든 과정과 온옥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했기에 그가 임무를 완수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그녀는 범숙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미를 공간으로 돌려보낸 후, 단약 하나를 꺼내 건넸다.“이제 가도 돼.
“그래요? 형님은 역시 통이 크시네요. 진국공가의 공자님 다워요.”범숙취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치 온옥지의 제안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그러나 온옥지는 상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어떻게든 범숙취의 마음을 돌리려고 말했다.“물론이지. 네 말처럼 난 진국공가의 아들로서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켜. 그러니 걱정 말고 날 좀 끌어올려줘. 후회하지 않을 거야.”“그래요. 형님이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죠. 제가 형님을 여기서 끌어올려 드리면 되는 거죠?”“그래, 날 올려주기만 하면 돼.”온옥지는 올라가기만 하면 주도권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이번 여정을 떠나면서 아무런 준비도 안 해온 것은 아니었다. 많은 독약을 챙기고 있었기에 올라가기만 한다면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때가 되면 빌어야 할 사람이 누가 될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온옥지의 생각과는 다르게 소년은 한참이 지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웃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온옥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내 부탁을 수락했으면서 왜 아직도 날 올려주지 않는 거지?”범숙취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형님의 부탁을 수락하긴 했지만 저는 누님의 부탁이 먼저인걸요. 누님께선 당신을 죽이라 명하셨으니, 형님이 죽은 이후에 끌어올려 드리겠습니다. 어때요?”온옥지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지금 날 농락한 거야?”범숙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오해세요, 형님. 정말 형님을 끌어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형님께서도 살아 있을 때 끌어올리라는 얘기는 없으셨잖아요. 먼저 누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다 약속했으니 당연히 형님이 죽은 후에 시신을 끌어올려 드려야죠.”“너!”온옥지의 얼굴은 분노로 퍼렇게 질렸다.점점 힘이 딸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가 저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온옥지는 치미는 분노를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대체 원하는 게 뭐야? 뭐든 말만 해!”그는 범숙취가 탐욕에
온옥지는 반신불수가 된 하반신을 끌며 필사적으로 밖을 향해 기었다. 어떻게든 마차에서 뛰어내려야 살 수 있었다.그러지 않으면 마차와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몸이 산산조각날 것이다!절벽이 점점 가까워지자 온옥지는 이를 악물고 옆으로 굴렀다.“악!”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온옥지가 탔던 마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온옥지는 위태롭게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식은땀이 비처럼 흐르고 시야가 흐려졌다.위기의 순간 그는 성공적으로 마차에서 굴러나왔지만 절벽과 너무 가까워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다행히 떨어지기 직전에 튀어나온 돌 하나를 잡고 겨우 매달려서 살아남았다.그러지 않았다면 마차와 함께 부서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온옥지는 등골이 오싹했다.그러나 하반신을 쓸 수 없는 그는 기어올라갈 수가 없었다.온옥지는 절망에 찬 비명을 질렀다.“안 돼!”‘난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제발 누가 좀 도와줘!’“당신이 온옥지야?”이때, 정수리 위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옥지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면 온사가 보낸 암살자일 거란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그러나 고개를 들고 익숙한 얼굴을 보자 순간 충격에 빠졌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어투로 물었다.“막내니?”“네, 오라버니.”범숙취는 절벽 위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물으려던 온옥지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아니, 이자는 온모가 아니야!’비록 온모와 굉장히 흡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는 분명 소년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일부러 여자 소리를 내서 날 속인 거야?”분노한 온옥지가 소리쳤다.범숙취는 온모를 닮은 순진무구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왜 그러세요, 형님? 저 억울합니다.”만약 온사가 여기 있었다면 무조건 범숙취가 온모와 만난 적이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지금 그가 하는 말과 행동 모두 온모와 완전히 똑같았다. 그가 지금 소년 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온옥지가 온모와 가장
한편, 창주성을 떠난 온옥지의 마차는 빠르게 성설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어쩐 일인지 그는 오늘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이미 몇번이나 온모를 위해 온사에게 해를 가하려 했으니 지금쯤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데려온 호위 둘은 중상을 입었고 그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니 온사가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온옥지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일전에는 어떻게 하면 용골련을 빼앗아올지 고민해 왔는데 이제는 그것도 관심이 없어졌다.그는 당장 창주를 떠나 경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경성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있으니 온사도 함부로 자신을 대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온옥지는 곧바로 마부석에 있는 호위에게 명령했다.“좀 더 빨리 가자꾸나!”“예, 공자님!”호위들은 모시는 공자가 왜 갑자기 길을 재촉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채찍을 휘둘렀다.이때 온옥지가 그들에게 물었다.“지금 성설성까지 거리가 얼마 정도 남았지?”“대략 두 시진 정도 남았습니다.”“최대한 빨리 성설성에 도착해야 한다. 서둘러!”성설성에는 사람이 많으니 온사가 그를 해할 마음이 있어도 백성들의 눈치를 볼 거란 판단에서였다.성설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호위를 새로 고용할 수도 있으니 경성까지는 안전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그러나 온사가 보낸 살수는 이미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그들이 성설성을 앞두고 있을 때쯤, 전방에 섬광이 번뜩이더니 마부석에 앉은 호위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또다른 호위는 미처 온옥지에게 전달도 못하고 그대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모든 건 조용히 진행되었다.마차 안 온옥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밖에서 잠깐 들린 신음소리만 들었다.그는 경계 어린 목소리로 바깥에 대고 물었다.“무슨 일이냐?”평소라면 바로 대답이 들려왔을 텐데 마차는 계속 가고 있는 와중에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온옥지는 급기야 가림막을 열었다. 마부석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
“한명이면 되나요? 몇 명 더 죽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목숨을 보전하는 조건이 살인이라는 얘기에 범숙취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평소의 느긋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그에게 있어 살인은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일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온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내가 원하는 목숨은 딱 하나야. 네가 창주로 온 그자를 죽여주기만 하면 네 목숨을 살려주고 널 경성으로 데려가 아버지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어.”“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이제 말씀해 보세요. 제가 누굴 죽이면 되나요?”범숙취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그는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그러나 이어진 온사의 말에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네가 죽일 사람은… 온옥지야.”뜻밖의 인물이 온사의 입에서 나오자, 범숙취는 순간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지금 누굴 죽이라 하셨습니까?”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재차 물었다.온사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범숙취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설마 진국공부의 온옥지는 아니겠죠?”“그 인간 말고 누가 있겠어?”온사가 담담히 되물었다.“저는… 전하의 뜻을 잘 모르겠… 아니, 잠깐만요!”범숙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사는 뒤돌아서 문밖으로 향했다.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범숙취는 다급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니, 그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허나 경성에 있는 사람을 제가 무슨 수로 죽인단 말입니까! 일단 저를 먼저 경성으로 데려가 주십시오!”뒤돌아선 온사가 말했다.“굳이 경성까지 갈 필요 없어. 지금이라도 가능하니까.”“그게 무슨 뜻이죠?”“내 말은 그 인간 지금 창주에 있다고. 위치는… 아마 성설성으로 향하는 길에 있을 거야. 지금 쫓아간다면 그 인간이 성설성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겠지.”온사는 이렇게 말하면 범숙취가 주저할 줄 알았다. 온옥지는 아버지의 적자이고 만약 그가 온옥지를 죽인다면 가문으로 복귀하
그래서 그녀는 이곳 창주에서 넷째 오라버니를 처리하기로 했다.흑기군 영지를 떠난 온사는 바로 온옥지를 쫓아가지는 않았다.그쪽은 유성이 보낸 독충이 있으니 온옥지가 어딜 가든 행방을 알 수 있으니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 잘 이용하기로 했다.온사는 지부 관저를 찾아갔다. 북진연은 최근 구휼 물자의 보급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온사는 그 틈을 타 홀로 범숙취를 찾아왔다.지난번에 그가 온권승의 사생아인 걸 알아낸 이후, 처음으로 다시 그를 만나러 오는 거였다.“누님, 오셨어요?”범숙취는 어두운 밀실 안에서도 조용한 발걸음소리를 듣고 온사가 왔음을 바로 알아차렸다.그는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인사를 건넸다.“내게 누님이라 부르지 말거라.”온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흑기군이 촛불을 가져와 방 안을 밝혔다.범숙취는 오랜 시간 밀실 안에 갇혀 있었던 것치고는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었다.“누님, 드디어 우리가 혈연관계인 것을 인정하고 저를 데려가려는 건가요?”온사가 거절하건 말건, 범숙취는 집요하게 누님이라는 호칭을 썼다.온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경고했다.“마지막으로 말할게. 날 누님이라 부르지 마.”“네가 온권승의 사생아가 옳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 네겐 날 누님으로 부를 자격이 없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그 말을 들은 범숙취는 큰눈을 깜빡이며 서운한 어투로 물었다.“그럼 누… 성녀 전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해야 저를 인정해 주실 건가요?”“내가 널 동생으로 인정할 일은 없어. 네가 무고하든 그렇지 않든, 네가 온권승의 사생아인 이상, 그 인간이 내 어머니를 배신한 증거이니까.”범숙취는 생각보다 단호한 온사의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온사는 계속해서 말했다.“비록 널 인정하진 않겠지만 네 목적이 뭔지는 알아. 일전에 날 누님이라 친근하게 부른 것도 어떻게든 나와 관계를 엮어 보겠다는 것 아니야. 그리고 날 이용해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