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기억나지 않느냐니, 무슨 소리지.
유진은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피식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기억 안 나면 어쩔 수 없죠. 억지로 떠올리진 마세요. 무서운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뒤돌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ㅡ
“앉으세요.”
유진이 차려준 해장국 앞에 앉았을 때, 혼란을 깬 건 내 휴대폰 진동이었다.
채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과 함께 허둥지둥 휴대폰을 들었다.
“어, 응.”
“잘 잤어? 나 지금 친구들이랑 온천 왔어. 여기 너무 좋다. 조만간 같이 오자.”
“으응.”
“당신 목소리가 이상한데?”
눈앞에 앉은 유진은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냐, 좀 피곤해서 더 잘게. 재밌게 놀고 이따 전화해요.”
통화를 마치자, 유진이 숟가락을 들었다.
식탁 위로는 수저 소리만 계속됐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어제 우리 너무 취했나 봐요.”
나는 비겁한 질문을 했다.
결론에 가린 질문을.
“같은 침대에서 자고…. 정말 미안해요. 내가 다른 방에서 잤어야 했는데, 필름이 끊겨서.”
유진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맑다 못해 시린 눈동자로 날 보던 그녀는 비웃듯 입을 열었다.
“필름이 끊기면, 사람이 바뀌나 봐요.”
유진이 낮게 다시 읊조렸다.
“어제 삼촌은, 지금처럼 그렇게 죄지은 표정 아니었는데.”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상체를 내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향기가 훅 끼쳤다.
이 집 어디에도 없어야 할 향기가.
“이모는 삼촌이 착해서 좋대요. 잘생기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고.”
유진이 손을 대리석 식탁 위에 올리며 덧붙였다.
“근데 어제 삼촌은 전혀 안 착했어. 내 얼굴을 조각하듯이 훑으면서, 이건 이모한테는 없는 선이라고….”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웠다.
유진은 내 표정을 감상하듯 조용히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내 안색을 그저 창밖의 풍경을 무심히 보기라도 하는 듯 평온한 목소리와 함께.
“아하하, 그냥 부탁 때문이었겠죠.”
“네?”
“제 부탁 때문에 그러셨던 거죠? 술김에 제가 떼를 썼거든요. 저 만들어달라고.”
순간, 뇌리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시끄러운 술집 조명 아래서 상체를 내 쪽으로 바짝 기울인 채 눈을 빛내던 유진의 얼굴이 스쳤다.
ㅡ저 만들어 주세요.
세상에 하나뿐인 모습으로.
끊겼던 필름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맞아, 그랬어.’
그때, 유진이 식탁에 올려뒀던 손을 천천히 뻗었다.
대리석 식탁 위, 매끄러운 패턴을 따라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끄러져 왔다.
내 손가락 끝 근처에서 멈춘 그녀의 손끝.
닿을 듯 말 듯, 체온마저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거리 끝에 유진의 검지 손끝이 내 검지 끝에 아주 살짝 닿았다.
아찔했다.
살과 살이 맞닿는 면적은 고작 몇 밀리미터도 되지 않았지만, 그 지점에서부터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냥 제 부탁을 들어주시려고 그러셨던 거잖아요? 착.하.시.니.까.”
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끈적하게 감겼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그저 여자친구 조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호의였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던져준 합리화를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그래, 내 잘못이 아니라 술과 유진의 부탁이 만든 상황이었을 뿐일 것이다.
“그럼… 같이 잤던 건?”
나는 마지막 남은 의구심을 뱉었다.
유진은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오히려 내 손끝을 지그시 누르며 피식 웃었다.
“삼촌 소파에서 잔다고 고집 피웠는데, 제가 낯선 공간에 혼자 자는 걸 좀 무서워해요.”
“.......”
“어릴 때부터 그랬거든요. 그래서 옆에만 있어 달라고 했어요.”
“그래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니 마저 먹죠. 어제 점심만 먹고 바로 작업하자고 하셨잖아요.”
“아, 네.”
***
작업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돼요?”
내 시선이 유진의 어깨를 타고 쇄골, 그리고 가슴 부근에서 멈춘 채 떨렸다.
“아… 네.”
나는 손을 어쩌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모든 게 다 이상했다.
그런데, 유진이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삼촌, 손이 왜 그렇게 떨려요? 비율 본다면서요. 어제처럼… 만져봐야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아 제 허리로 가져갔다.
***
“후우! 후우—!”
심장이 흉곽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땀에 젖은 침대 시트.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순간적으로 옆을 보았다.
아무도 없음에 깊은 한숨이 터졌다.
“후.”
나는 축축해진 이마를 짚으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작업실에서 유진의 허리에 손을 올린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오히려 현실이 비현실 같았다.
“역시 그건 꿈… 이었나.”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익—.
유진이었다.
“꺽?”
꿈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내 하얀 와이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손끝을 넘어 길게 내려온 소매.
그리고 셔츠 밑단 아래로 가차 없이 드러난 하얀 허벅지.
그건 채영이 내 셔츠를 입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괴할 정도로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일어났어요?”
채영의 공간.
채영의 침대.
그리고 난 채영의 남자.
그런데, 모든 것의 중심에 유진이 내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ㅡ
식탁 위에는 유진이 차린 아침상이 놓여 있었다.
깨작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있으려고요?”
내가 묻자, 젓가락질하던 유진이 멈칫하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삼촌이 그랬잖아요. 피규어 제작 구도 잡힐 때까지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고.”
“…내가요…?”
“네, 삼촌이 그랬으면서 왜 딴소리예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유진 씨. 여기는 이모랑 내가 사는 집인데.”
그래, 아무리 채영의 조카라도 이건 아니다.
그런데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밥알을 씹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여기에 이모는 없는데요?”
그녀의 태연함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거 같던 그때였다.
탁. 타닥—.
거실 통창 밖에서 무언가 유리를 두드리는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벚꽃 폈어요.”
유진이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햇살을 받은 와이셔츠가 투명하게 비치며 그녀 몸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도 이미 너무 많은 걸 본 기분이었다.
“밥 먹고 같이 가요.”
“네? 어딜 가요?”
내가 반문하자, 유진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방금까지의 차가움은 어디 가고 억울함이 가득한 ‘여자의 눈빛’이었다.
“설마! 아무리 ‘피규어’ 작업 때문이라도,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파괴적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체온과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이상하게도 내게는 뜨거웠다.
“며칠 뒤면 이모 와요. 그럼 나랑 올해의 이 벚꽃은 못 봐요. 그래도 안 갈 거예요?”
모텔을 나서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며칠 내내 물속에 처박혀 있다가 겨우 얼굴만 내민 사람처럼, 가슴 안으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거 같았다.유진 씨가 주변을 살피며 내 손을 꽉 붙들었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유진 씨의 눈가가 아직 조금 붉어져 있었다.울었던 얼굴.그런데도 웃으려 하는 얼굴.나는 손에 힘을 줬다.“가요.”유진 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새벽 골목은 조용했다.편의점 불빛.새벽이슬에 젖은 아스팔트.멀리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까지.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그런데 우리는 정말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사람들 같았다.나는 피규어 상자를 품에 안은 채 걸었다.유진 씨 시선이 잠깐 그 상자 위로 내려앉았다.“…규현 씨…”나는 작게 웃었다.고맙다는 얘기를 할 것 같았다.“아녜요. 말했잖아요. 당신을 만들 거라고.”정말이었다.이건 단순 피규어가 아니라,내가 처음으로 내 의지로 붙잡은 삶 같은 게 들어 있었다.유진
“씻고 나올게요. 바로 출발해요.”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곧 욕실 문이 닫히고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쏴아아.나는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테이블 위에 놓인 피규어가 보였다.도색이 살짝 번져 있었다.규현 씨가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가슴이 먹먹해졌다.“나만 입 다물면 돼.”나는 천천히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그런데 문득, 아주 이상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아이.심장이 뛰었다.나는 스스로도 놀란 얼굴로 숨을 멈췄다.‘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그런데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만약, 정말 만약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러면 이모도 함부로 못 하지 않을까.정말 가족이 되어버리면.아이라는 결속으로 정말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면.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나는 급하게 얼굴을 감쌌다.무서웠다.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그런데도. 그 생각이 계속 자라나고 있었다.ㅡ욕실 문이 열렸다.희미한 김이 함께 흘러나왔다.젖은 머리칼 사이로 물방울이 천천히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나는 침대 끝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고 있었다.규현 씨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며 작게 웃었다.“기다렸죠? 가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규현 씨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순간,나는 황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유진 씨?”규현 씨 눈동자가 흔들렸다.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그래, 무서웠다.조금만 늦었어도 여기 오지 못했을 것 같아서.조금만 더 현실에 붙잡혀 있었으면,정말 다시는 이 사람에게 닿지 못했을 것 같아서.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규현 씨를 끌어당겼다.규현 씨 몸이 침대 위로 무너지듯 눕혀졌다.놀란 얼굴이었다.그러나 밀어내지 않았다.늘 그랬듯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나는 그 위에 엎드리며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뜻했다.그래, 여
ㅡ규현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나는 말없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그리고 천천히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톡톡톡.스스로 지웠던 기억이 떠오르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그때 그 일’ 이후로 난 유진이를 내 시야 밖에 일부러 뒀다.그리고 적당한 보상을 유진이의 엄마에게 쥐여줬다.그 증거로 유진이는 알바 하나 하지 않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공시생으로 굴러먹을 수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용돈이라며 유진이에게 매달 돈을 보내주기도 했지만.그리고 유진이는 특출난 모습을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다.음, 그래.유진이 엄마에게 들은 것으로는 그냥 멍청한 조카에 가까웠다.다른 남자 조카들처럼.소리 지르면 주눅 들고, 조금만 잘해줘도 금방 손을 벌리려고 하고.공짜는 세상에 없다는 걸 모르는 애들.그 정도로 생각해서 종종 화를 냈다.그저, 남자 조카들에게 했던 것처럼.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 있는지.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뭐, 뭔가를 알려주기에도 멍청한 머리가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내 배 아파 낳은 것도 아닌데, 유진이는 나를 닮아 있었다.”나는 고개를 천천히 뒤로 기댔다.“처음엔 그냥 흥미롭고 궁금했어.”뭐가 그렇게 흥미로웠을까.뭐가 그렇게 궁금해졌을까.그래, 내 머릿속에 그 이유가 스쳤다.‘혹시, 나만 그런 게 아닌 건가.’그 생각이 들던 순간부터였다.유진도 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나로 끝날 수 있는 이 위태로운 시스템이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손끝이 다시 책상을 두드렸다.톡톡 - 톡.규현 씨 얼굴이 떠올랐다.작업실에서 날 내려다보던 눈.처음이었다.그 사람이 날 내려다봤던 건.그리고 아무 감정도 없었다.전부 연기였으니까.“유진아, 규현 씨는 망가질 거야.”담담하게 중얼거렸다.여전히 내겐 화도, 원망도 없었다.이미 전개와 결말을 알고 있는 설계자의 태도 정도.“정원 밖의 야생에게.”규현 씨는 아직 모른다.자유가 얼마나 비싼
76화 : 정원 밖으로. 정원 안으로유진에게서는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나는 모텔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아무 메시지도 없었다.전화도 없었다.시간만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좁은 모텔방 안은 싸구려 방향제 냄새로 가득했다.분홍빛 형광등은 이질적이었다.그래, 채영의 집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난 스스로를 계속 납득시키고 있었다.괜찮다.잠깐 꼬인 것뿐이다.유진 씨도 지금 정신이 없을 거다.곧 연락이 올 거다.나는 그렇게 계속 스스로를 설득했다.침대 옆에 내려뒀던 피규어 상자를 천천히 끌어왔다.불안했다.상자를 열었다.아직 덜 마른 도료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나는 조심스럽게 피규어를 꺼내 모텔 방 안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도색이 번져 있었다.정말 조금. 하지만 분명히 번져 있었다.“…하.”상자 안에서 흔들리며 묻어난 거였다.나는 급하게 수정 도구를 찾으려다 멈췄다.없다.지금 이곳은 작업실이 아니다.조명도 도구도 없다.수정할 수 없었다.나는 한동안 피규어만 멍하니 바라봤다.“…유진 씨.”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 순간이었다.후회가 스쳤다.ㅡ가서 완성해요.“그냥 그때 바로 떠날걸.”채영을 향해, 그녀를 향해 외치기 전에,유진 씨 손을 잡고 바로 나왔어야 했다.입술을 천천히 깨물었다.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래도 의미는 있었잖아.”한 번은 이겼다.적어도 마지막 순간 채영을 내려다봤다.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이 답답함 속에서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나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켰다.여전히 연락은 없었다.“회사에 출근했다고… 왜…”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유진 씨가 왜 다시 회사에 갔지.”왜.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하게 엉키기 시작했다.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문득 주머니 안쪽에 손을 넣었다.딱딱한 종이 감촉이 손끝에 걸렸다.사채업자 명함이었다.나는 멍하니 그걸 내려다봤다.그리고 불현듯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나는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입술이 천천히 굳었다.그 순간이었다.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난 황급히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난 거의 미친 사람처럼 주차된 차량의 앞 유리 너머 연락처를 확인했다.한 대, 두 대를 지나고 준중형 승용차 앞 유리 너머에 유진의 연락처가 있었다.그녀의 차였다.“…뭐야.”차는 있는데, 사람이 없다.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채영.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곧장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이어졌다.“응.”너무 차분한 목소리에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내 목소리만 거칠게 울렸다.“유진 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잠시 침묵이 이어졌다.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등골이 천천히 서늘해졌다.“어처구니가 없네. 유진이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해. 멀쩡히 회사 출근한 애를.”“…뭐?”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멍하니 유진 차를 바라봤다.머릿속이 점점 엉키기 시작했다.무슨 소리야.도대체 유진 씨가 왜 출근을 해.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그때였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찾는 거야?”“정말 당신이 뭔가 한 게 아니라고?”채영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그러니까, 내가 왜 그러냐고. 이규현 씨, 당신은 정말 날 몰랐군요?”그 순간이었다.나는 깨달았다.방금 전까지 작업실에서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붙잡던 여자와, 지금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전혀 다르다는 걸.아니.이쪽이 원래 얼굴이었다.“그리고 감히 나한테 소리를 질러?”가슴이 서늘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달칵.전화가 끊겼다.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그대로 서 있었다.***밤을 또 새웠다.속이 울렁거렸다.그런데 차는 멈추지 않았다.운전대를 잡은 엄마는 계속 신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이모가 진짜 너 많이
지갑을 꺼내 들었다.곧장 블랙카드를 꺼내 망설임 없이 바닥에 던졌다.툭.“가져가.”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래, 이제 끝이다.나는 뒤돌아 작업대 위 피규어를 상자에 조심스럽게 담았다.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손끝에 끈적한 감각이 묻어났지만 그대로 상자 안에 밀어 넣었다.머릿속에서 누군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이겼다.이겼다.이겼다.뒤에서 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그건 왜 가져가.”손이 잠깐 멈췄다.그러나 곧 다시 움직였다.나는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내 손으로 만든 거야.”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난 멈추지 않았다.“당신 돈으로 산 재료여도 만든 건 나야. 왜, 퍼티값이라도 이체해 줘?”정적이 흘렀다.아주 짧은 침묵 끝에, 채영이 작게 웃었다.“…그래. 가져가.”나는 그대로 채영의 옆을 지나쳐 작업실 밖으로 걸어갔다.그리고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순간이었다.“아, 규현 씨.”발걸음이 멈췄다.천천히 뒤를 돌아봤다.“…왜. 난 당신이랑 더 할 말 없ㅡ”나도 모르게 말이 끊겼다.그리고 순간, 뭔가 등골이 서늘해졌다.이상했다.조금 전까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붙잡던 여자가 없다.채영은 평소처럼 서 있었다.아주 익숙한 얼굴로.딸꾹질도 멎어 있었다.“지갑이 닫히는 순간.”목소리가 뭔가 오싹했다.“그 고결한 예술은 허기가 되고.”채영의 시선이 상자를 향했다.“사랑은 비참한 구걸로 전락해.”“…뭐?”채영은 상자에서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봤다.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잊을 수 없었던,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던 그 눈으로.“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나는 애써 채영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정말 끝났다.나는 결국 저 집에서 나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거의 뛰듯 공동현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아침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휴대폰을 꺼냈다.유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ㅡ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