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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전화가 꺼진 날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9 03:36:07

우리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작은 교외 마을로 갔다.

비서도, 경호도 따라오지 않았다.

도현의 휴대전화는 출발 전에 완전히 꺼졌다.

“불안하지 않아요?”

“매우.”

“그런데 왜 껐어요?”

“당신과 있기로 했으니까.”

마을에는 관광객도 많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시장을 걷고, 이름 없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도현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낯설어했다.

“왜 자꾸 주변 봐요?”

“누가 접근하는지 확인하는 습관입니다.”

“오늘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도 봅니다.”

시장 상인이 내게 꽃 한 송이를 건넸다.

“신혼부부 같네요.”

도현은 바로 말했다.

“맞습니다.”

상인이 웃었다.

“아내를 아주 좋아하나 봐요.”

“네.”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강가에 도착했을 때 도현이 물었다.

“오늘 행복합니까?”

“갑자기요?”

“확인하고 싶습니다.”

“네.”

“회사 없이도?”

“당연하죠.”

그는 물가를 바라봤다.

“저는 회사가 없으면 제가 무엇인지 오래 몰랐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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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9화. 장갑을 낀 손

    오전 보고는 예상보다 빨리 끝날 줄 알았다. 문제도 크지 않았다. 파리 팀이 새 외주 업체를 선택했고. 계약 금액도 권한 범위 안이었다. 법무 검토도 끝났다. 절차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이 업체로 확정했어?” 담당 팀장이 화면 너머로 대답했다. —네. 어제 계약서까지 전달했습니다. “다른 후보가 하나 더 있었잖아.” —있었습니다. “거기가 조건은 더 좋지 않았어?” 잠깐 침묵. —총액은 조금 낮았습니다. 대신 현장 대응 속도가 늦었습니다. 나는 자료를 다시 넘겼다. 숫자만 보면 내가 골랐을 업체는 다른 곳이었다. “그래도 연간으로 보면 차이가 꽤 나는데.” 카렐이 옆에서 말했다. “파리 팀 판단으로는 현재 업체가 운영 리스크가 낮습니다.” “알아.” “그러면 문제 있습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골랐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뿐. 한예린이 내 얼굴을 보고 눈치를 챘다. “서윤아.” “응.” “반려하려고?” “아니.” “그런 표정인데.”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화면 속 담당 팀장에게 물었다. “결정한 사람이 누구예요?” —저와 현장 책임자입니다. “둘 다 이 업체가 낫다고 판단했고?” —네. “그럼 됐어요.” 상대가 잠시 멈췄다. —추가 검토 필요 없으십니까? “없어요.” 통화를 종료했다. 카렐이 나를 봤다.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조금.” “그런데 그대로 두셨고.” “권한 줬으니까.” “결과가 나빠지면?” “그때 보면 되지.” 나는 자료를 덮었다. “내 선택이랑 다르다고 잘못된 건 아니잖아.” 한예린이 웃었다. “그 말을 네 입으로 하는 날이 오네.” “왜.” “예전에는 네 선택이 제일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잖아.” “지금도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카렐이 바로 말했다. “그 부분은 변하지 않으셨군요.” 나는 그를 노려봤다. “나가.” “다음 회의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8화. 정답 없는 그림

    도현이 건축 스케치 수업에서 돌아온 건 오후 네 시쯤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 “왔어요?” “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답이었는데.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도현은 가방을 내려놓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얼굴로?” 그가 나를 봤다. “무슨 얼굴인데요.” “마음에 안 드는 결과 나온 얼굴.” 몇 초 침묵. 정답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여줘요.” “싫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거절했다. “진짜?” “네.” “망쳤어요?” “망친 건 아닙니다.” “그럼?” 도현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서재로 들어갔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몇 분쯤 지나자. 결국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 “왜요?” “와보십시오.” 역시. 나는 웃으며 서재로 갔다. 책상 위에는 오늘 그린 스케치가 펼쳐져 있었다. 작은 카페 내부 같은 공간이었다. 창문. 테이블. 벽. 사람이 앉을 자리 몇 개.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그런데 종이 한쪽에 강사가 적은 메모가 있었다. [너무 정확하게 그리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바로 도현을 봤다. “이거 때문에?” “네.” “왜.” “제가 정확하게 그린 게 문제라니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뭐라고 설명했는데요?” 도현은 의자에 앉았다. “선은 정확한데 공간이 답답하답니다.” “아.” “그리고.” 그가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사람이 실제로 움직일 것 같지 않다고.” 나는 그림을 한참 봤다. “조금 그런 것 같기도.” 도현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응.” “어디가.” “여기.” 나는 테이블 두 개 사이를 가리켰다. “도현 씨는 간격 맞추려고 딱 맞춰놨는데.” “네.” “사람은 꼭 정중앙으로만 걷지는 않잖아요.” 그의 표정이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7화. 의장실의 문이 닫힌 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도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회의 끝나면 잠깐 올라오십시오.] 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 평소 같으면 집에서 볼 사람인데. 회사에서 따로 부르는 건 드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잠시 뒤. [있습니다.] 끝. 나는 괜히 입꼬리를 올렸다. 한예린이 맞은편에서 나를 봤다. “왜 웃어?” “안 웃었는데.” “웃었어.” “착각.” “도현 씨?”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일이나 해.” “맞네.” 무시했다. 회의는 네 시 반에 끝났다. 프라하와 뮌헨에서 새 승인 구조 첫 주 결과가 올라왔다. 속도는 예상보다 빨라졌고. 오류도 허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카렐이 중간에서 다시 권한을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자료를 덮으며 말했다. “이대로 한 달 더 봐요.”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조정 필요한 건 따로 표시하겠습니다.” “직접 다시 승인하겠다는 뜻 아니지?” 카렐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제 그 질문 그만하셔도 됩니다.” “왜.” “저도 배웁니다.” 한예린이 옆에서 웃었다. “드디어.”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나간 뒤.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도현에게서 온 메시지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회의 끝나면 잠깐 올라오십시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의 의장실은 같은 건물 안이지만.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다. 특히 둘만 있으려고 가는 일은 더 없었다. 문 앞에서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익숙한 목소리. 문을 열었다. 도현은 창가 쪽에 서 있었다. 재킷은 벗어 의자에 걸쳐뒀고. 셔츠 소매는 내려와 있었다. 완전히 회사의 차도현. 나는 문을 닫으며 물었다. “왜 불렀어요?” “문 잠그십시오.” 손이 멈췄다. 나는 그를 봤다. “여기서?” “네.” “주인님.” “아직 그 호칭은 쓰지 마십시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위기는 집과 달랐다. 나는 문을 잠갔다. 철컥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6화. 퇴근하지 않은 얼굴

    오전 열한 시. 한예린이 내 책상 위에 서류를 한 장 내려놓았다. 평소처럼 두꺼운 보고서도 아니었다. 표 한 장. 승인선 몇 개. 그리고 내 이름 옆에 빨간 표시. 나는 바로 물었다. “이건 뭐야?” “없애려고.” “뭘?” 한예린이 내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 “여기.” 나는 다시 종이를 봤다. 유럽 지역 소규모 운영비 승인. 지금까지는 도시 책임자. 재무 담당. 그리고 마지막에 내 이름까지 들어가 있었다. “왜 갑자기?” “갑자기 아니야.” “그럼?” “지난 석 달 봤는데 네가 여기서 반려한 건 두 건.” “두 건이면 했잖아.” “둘 다 서류 누락.” “그것도 문제지.” “그건 재무에서 걸러도 돼.” 한예린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총괄이 볼 필요 없는 걸 계속 총괄이 보고 있어.”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금액 기준은?” “기존 그대로.” “예외 항목은?” “법무 리스크 있으면 올라와.” “신규 업체는?” “초기 세 번까지만.” “그 이후는?” “도시 재무 승인.” 나는 다시 표를 봤다. 내 이름 하나가 빠지면. 한 달에 수십 건은 덜 보게 된다.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한예린이 바로 알아챘다. “싫어?” “싫다기보다.” “불안해?” 나는 잠시 망설였다. “조금.” “왜?” “문제가 나도 내가 늦게 알게 되잖아.” 한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총괄이 모든 문제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어.” 나는 웃었다. “그건 또 맞네.” “그리고.” 한예린이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는 것과 모든 문제를 사전에 잡는 건 달라.” 그 말에 나는 잠깐 멈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렐에게 하던 말이었다. 권한을 넘겼으면. 첫 오류에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카렐도 봤어?” “응.” “뭐래?” “빼는 게 맞대.”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5화. 오늘은 내가 정해

    퇴근 직전. 내 메일함에 한예린이 보낸 보고서 하나가 들어왔다. 제목은 짧았다. [유럽권 승인 구조 2차 조정안] 나는 파일을 열었다. 첫 페이지부터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프라하. 뮌헨. 파리. 바르샤바. 리스본. 그런데 이번에는 각 도시별 책임자가 직접 승인할 수 있는 금액 범위가 더 넓어져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카렐 이름이 빠진 부분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예전 같으면 카렐을 거쳐야 했을 승인 두 개가 각 도시 책임자에게 바로 넘어가 있었다. 한예린이 내 자리로 왔다. “봤어?” “응.” “어때.” “많이 넘겼네.” “카렐이 먼저 제안했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카렐이?” “응.” “진짜?” 한예린이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얼마 전까지 하나 틀리면 다시 다 가져오려고 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기준을 더 명확하게 만들었대.” 나는 자료를 다시 봤다. 승인 금액. 위험 등급. 보고 시점. 어느 경우에만 상위 책임자에게 올라오는지. 생각보다 세세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그럼 승인?” 나는 바로 결재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한예린이 나를 봤다. “왜.” “카렐 불러봐.” “수정할 거 있어?” “아니.” “그럼 왜.” “한번 듣고 싶어서.” 십 분 뒤. 카렐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나는 자료를 돌려 보여줬다. “이거 네가 만들었어?” “초안은 제가.” “왜 이렇게 많이 넘겼어?” 카렐은 잠시 자료를 봤다. “제가 계속 중간에 있으면.” “응.” “결국 다 제 판단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게 싫어졌어?” “싫은 건 아닙니다.” 카렐은 솔직했다. “편합니다.” 나는 웃었다. “편하다고?” “제가 보면 빠르니까요.” “그런데?” “그 편함 때문에 구조가 느려집니다.” 한예린이 옆에서 말했다. “이제야 알았대.” 카렐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봤다. “원래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 안 했지.” 카렐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4화. 온도의 차이

    오후 회의가 끝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결정할 일은 다 끝났는데. 이상하게 손이 노트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예린이 지나가다 내 책상을 두 번이나 봤다. 세 번째에는 결국 멈췄다. “뭐 해?”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는 사람이 화면을 그렇게 노려봐?” 나는 모니터를 한번 보고 닫았다. “진짜 끝났어.” “그럼 가.” “아직 다섯 시 반이야.” “퇴근 시간 다 됐잖아.” “조금 애매해서.” 한예린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뭐가 애매해.” “그냥.” “회사에 더 있고 싶은 거야?”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집에 가기 싫어?” “그것도 아니고.” “그럼 가.” 너무 단순한 결론이었다. 나는 결국 웃었다. “요즘 다들 나를 회사에서 내보내려고 해.” “네가 안 나가니까.” 한예린은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참고로 카렐도 오늘 여섯 시 전에 간대.” “왜?” “아내랑 저녁 먹는다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카렐이?” “응.” “진짜?” “사람이 결혼을 하면 변하긴 하나 봐.” 나는 웃었다. “그걸 카렐한테 말해봐.” “싫어. 표정 무서워져.” 한예린이 먼저 나갔다. 나는 잠시 더 앉아 있다가 결국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정말. 남은 일이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도현은 부엌에 있었다. 나는 현관에서부터 물었다. “뭐 해요?” “차.” “갑자기?” “춥지 않습니까?” 그제야 알았다. 밖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기온도 아침보다 확실히 떨어졌다. 나는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은데.” 도현이 머그컵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손.” “왜?” “줘보십시오.” 나는 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손등을 만졌다. “차갑습니다.” “밖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차 마시라고.” “잔소리 안 하네.” “따뜻한 걸 주면 되지 왜 잔소리를 합니까.” 나는 웃었다. “그것도 맞네.” 거실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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