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카렐은 생각보다 더 직설적이었다. 부대표 취임 첫 주부터 그랬다. 아침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두꺼운 보고서 묶음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총괄님.” “네.” “이 보고서 필요 없습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뭐?” 카렐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도시 대표들이 이미 같은 내용을 세 번 제출합니다.” “어디에요?” “현지 운영팀, 재무팀, 총괄실.” 그가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도 거의 같습니다.” “그래도 총괄실에는 전체 흐름을 정리한 자료가 필요하잖아요.” “그럼 원본을 공유하면 됩니다.” “형식이 다 다르잖아요.” “형식을 통일하죠.” “그것 때문에 또 시스템을 바꾸자고?” 카렐이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마르틴도 내 의견에 반대하는 편이었지만 카렐은 결이 달랐다. 마르틴은 한 번 돌려 말했다. 카렐은 필요 없으면 필요 없다고 바로 잘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도시별 보고서 하나.” 카렐이 태블릿을 내 쪽으로 돌렸다. “재무·물류·인사 항목만 공통으로 묶고, 나머지는 각 도시가 필요한 내용만 적습니다.” “총괄실 요약은?” “없앱니다.” “없애요?” “총괄님이 원본을 보면 됩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제가 다섯 도시 원본을 다 읽으라고요?” “지금도 요약본에 문제 있으면 원본 다시 보시잖아요.” 정확했다. 더 짜증 났다. “그걸 오늘부터 바꾸겠다고?” “시험 기간 일주일 주십시오.” “효과 없으면?” “원래대로 돌리겠습니다.” 자신감까지 있었다. 나는 결국 허락했다. “일주일.” “충분합니다.” 그리고 정말 일주일 뒤. 보고 업무가 30% 줄었다. 중복 파일은 절반 가까이 사라졌고, 도시 대표들이 보고서 양식 맞추느라 쓰던 시간도 크게 줄었다. 비서가 새 통계를 보여 주며 말했다. “카렐 부대표 안이 생각보다 효과가 큽니다.” 나는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알아요.”
새 부대표 후보는 외부 공개 모집으로 뽑았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조건을 하나 걸었다. 이름. 성별. 나이. 출신 학교. 출신 회사. 그 모든 정보를 1차 심사에서는 가렸다. “경력을 보지 않고 어떻게 임원을 뽑습니까?” 인사팀에서 걱정했지만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경력은 봐요. 회사 이름만 가리는 거예요.” 어디에서 일했느냐보다 무엇을 했는지 먼저 보고 싶었다. 마르틴이 떠난 자리를 유명 회사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채우고 싶지도 않았다. 지원자는 예상보다 많았다.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한 사람이 열두 명. 실무 과제에서 여섯 명. 도시 간 물류 충돌 상황을 주고 해결책을 제출하게 한 뒤 최종 후보는 세 명까지 줄었다. 그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지원자는 유독 이상했다. 임원 경험이 없었다. 대형 조직 총괄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현장 문제 해결 점수는 압도적이었다. 최종 후보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날. 회의실 화면에 첫 번째 이름이 떠올랐다. [카렐 노박.] 스물아홉 살. 체코 출신. 프라하 외곽 물류센터 현장 관리자. 임원 경력 없음. 대기업 본사 근무 경력 없음. 회의장이 바로 술렁였다. “스물아홉이라고요?” 이사 한 명이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부대표 자리입니다.” “알아요.” “현장 관리자 출신을 유럽 지역 부대표로 올리겠다는 겁니까?” “블라인드 점수는 1위예요.” “관리 경험이 부족합니다.” “현장 관리 경력 7년입니다.” “그건 임원 관리와 다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결정하지 않았다. “최종 면접 보고 판단하죠.” 며칠 뒤 카렐이 파리 본사로 왔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정장을 입었지만 익숙하지 않은지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져 있었다. 그래도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나는 일부러 가장 단순한 질문부터 했다. “왜 이 자리를 지원했습니까?” 카렐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현장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현장을
마르틴이 떠난 뒤 그의 자리는 한 달 동안 비워 두었다. 정확히는, 비워 두기로 했다. 사직 절차가 끝난 다음 날부터 인사팀에서는 후임 후보 명단을 올려 보냈다. 내부 승진 두 명, 외부 영입 세 명. 경력도 좋았고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명단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총괄님.” 인사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운영 부대표 자리를 한 달 이상 비우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아요.” “그러면 바로 면접 일정을 잡을까요?” “아니요.” “왜요?” 나는 비어 있는 마르틴 자리를 바라봤다. 책상도 치우지 않았다. 의자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빈자리도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지 보고 싶어요.”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대체 인력을 두지 않고요?” “네.” “업무 공백이 생기면요?” “그때 뽑죠.” “조직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흔들리는 지점부터 봐야죠.” 예전 같으면 불안해서 하루도 못 버텼을 것이다. 누군가 떠나면 즉시 다른 사람을 넣고. 빈 칸이 보이면 채우고. 문제가 생길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기다렸다. 첫 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틴이 맡았던 도시 간 일정 조정은 한예린과 각 도시 대표들이 나눠 처리했다. 둘째 주. 바르샤바와 프라하 사이 물류 일정이 한 번 충돌했다. 나는 개입하려다가 멈췄다.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묻자 프라하 대표가 말했다. “저희끼리 조정해 보겠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세요.” 두 시간 뒤 해결됐다는 보고가 왔다. 셋째 주. 스톡홀름 신규 장비 승인 문제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았다. 현지 대표와 기술팀이 협의했고, 도현 쪽 기술·전략팀은 자문만 했다. 일은 계속 돌아갔다. 마르틴이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가 좋은 부대표였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도 굴러가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틴의
마르틴이 갑자기 사직서를 냈다. 아침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뒤였다. 그는 평소처럼 침착한 얼굴로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그가 내민 건 얇은 서류 한 장이었다. 나는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표정이 굳었다. [사직서.] “이게 뭐예요?”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이유는요?” “개인 창업입니다.” 나는 바로 서류를 받지 않았다. “경쟁사 갑니까?” “아닙니다.” “다른 회사 스카우트?”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마르틴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제가 직접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뜻밖이었다. 마르틴은 지금까지 운영 부대표로 부족함이 없었다. 현장 이해도도 높았고, 각 도시 대표들과의 조율도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모든 걸 직접 떠안지 않아도 되도록 가장 먼저 밀어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회사인데요?” “도시 간 폐기물 순환 기술입니다.” 그는 준비해 온 자료를 꺼냈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을 다른 도시의 생산 원료로 다시 연결하는 플랫폼. 프라하에서 남는 소재를 바르샤바에서 재활용하고, 파리에서 폐기되는 포장재를 스톡홀름에서 재가공하는 방식이었다. 우리와 경쟁하는 사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우리가 계약하거나 투자할 수도 있는 분야였다. “언제부터 생각했어요?” “오래됐습니다.” “얼마나요?” “총괄님이 유럽 지역 총괄로 선임되기 전부터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오래?” “네.” “왜 말 안 했어요?” 마르틴이 아주 조금 웃었다. “총괄님이 붙잡을 것 같아서.” “붙잡을 건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직서를 내려다봤다. 마르틴이 빠지면 당장 일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한예린도 있고. 각 도시 대표들도 이전보다 훨씬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아쉬웠다. 좋은 사람을 보내는 건 언제나 아쉬웠
파리 센터에 새 회의실이 생겼다.벽 전체가 투명 유리였다.복도에서도 안이 훤히 보였고, 맞은편 사무실에서도 누가 앉아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개방성과 소통을 강조하자는 취지라고 했지만 나는 들어가자마자 표정이 굳었다.“싫어요.”마르틴이 바로 물었다.“왜요?”나는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계속 누가 보는 기분.”“실제로 보고 있긴 하죠.”“그 말이 더 싫은데.”마르틴이 웃었다.“블라인드 설치 요청할까요?”“네. 회의 중에는 닫을 수 있게.”그날 오후 도현에게 새 회의실 이야기를 했다.사진까지 보내자 그는 잠시 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하루만 그대로 사용해 보십시오.”“왜요?”“숨겨야 할 일이 없는 회의라면 크게 문제없지 않습니까?”나는 바로 표정이 굳었다.“그거랑 보는 건 다르죠.”도현도 내 목소리가 달라진 걸 알아챘다.“설명해 주십시오.”“숨길 게 없다는 이유로 계속 보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나는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사람이 집중 못 할 수도 있고, 표정 하나까지 계속 보인다고 생각하면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어요.”도현은 잠시 침묵했다.예전 같으면 자기 논리를 한 번 더 설명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맞습니다.”“뭐가요?”“제가 잘못 말했습니다.”너무 빨리 인정해서 오히려 내가 멈췄다.도현이 덧붙였다.“숨길 것이 없는 것과 보여 줄 의무가 있는 것은 다르군요.”“네.”“블라인드 설치하십시오.”“이미 신청했어요.”“빠르군요.”“이런 건 빠르게.”회의실은 그날 하루만 그대로 사용했다.생각보다 더 불편했다.회의 중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안을 바라봤고,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의식했다.한 직원은 발표 중 말을 멈추기도 했다.“괜찮아요?”내가 묻자 그녀는 민망한 듯 웃었다.“계속 밖에서 보는 것 같아서요.”결국 회의를 다른 공간으로 옮겼다.저녁에 호텔로 돌아왔을 때 도현은 이미 와 있었다.그런데 거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새로운 규칙은 내가 만들었다.잠들기 전 한 문장.하루 동안 말하지 못한 것을 딱 하나만 말하기.설명도 길게 하지 않고, 변명도 붙이지 않고, 상대가 바로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 것.그냥 오늘 마음속에 남은 문장 하나를 꺼내 놓는 규칙이었다.처음 제안했을 때 도현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 한 문장입니까?”“길게 말하면 또 회의 되잖아요.”“우리가 대화를 회의처럼 합니까?”“가끔요.”“누가 더 그렇습니까?”나는 대답 대신 침대에 누웠다.“오늘부터 시작.”도현은 더 따지지 않았다.첫날.불을 끄고 나란히 누운 뒤 내가 먼저 말했다.“오늘 마르틴한테 화났어요.”도현이 바로 물으려 했다.“왜—”“질문 금지.”입을 다물었다.몇 초 뒤 자기 차례가 왔다.“오늘 당신이 마르틴과 웃는 걸 보고 질투했습니다.”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또?”“질문 금지라면서요.”자기가 만든 규칙도 아닌데 벌써 잘 써먹었다.“알겠어요.”그날은 정말 그것으로 끝냈다.왜 화났는지.왜 질투했는지.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하지 않았다.그냥 서로 그런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만 알고 잠들었다.둘째 날.내 차례.“오늘 회의 무서웠어요.”도현의 몸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평소 같으면 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참았다.자기 차례가 오자 말했다.“오늘 당신이 전화를 안 받아서 불안했습니다.”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도 질문하고 싶었다.얼마나 불안했는지.또 옛날처럼 이상한 생각까지 했는지.그래도 참았다.한 문장이니까.대신 어둠 속에서 손만 조금 움직였다.도현의 손등에 손끝이 닿았다.그도 잡지는 않았다.손등끼리 가볍게 닿은 채 그대로 잠들었다.셋째 날.이상하게 내 차례가 어려웠다.하루 종일 별일은 없었다.회의도 무난했고.마르틴과도 안 싸웠고.도현과도 연락을 잘했다.그런데 밤이 되자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나는 한참 천장을 바라봤다.도현이 옆에서 기다렸다.재촉하지 않았다.“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