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밤바다.
파도.
멀어지는 두 사람.
그리고 그녀.
나는 그녀와 남자가 천천히 숙소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 남자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친구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썸을 타는 사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밤늦은 시간.
강릉.
둘이 함께 여행을 온 듯한 모습.
솔직히 말하면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웠다.
“그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친구겠지.”
말은 그렇게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웃으며 걸었다.
가끔 그녀가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도 그녀를 바라보며 뭔가 이야기했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괜히 모든 게 신경 쓰였다.
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언제부터 만났는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한동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부러 거리를 뒀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아니.
발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묵는 숙소 쪽으로 두 사람이 걸어갔다.
호텔이었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제법 깔끔한 호텔.
둘은 입구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문이 닫혔다.
끝이었다.
“…….”
나는 호텔 입구를 바라봤다.
안쪽 로비의 불빛이 보였다.
사람들이 오갔다.
프런트 직원.
여행객.
늦게 체크인하는 커플.
그리고 그 안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그 사실이 이상했다.
부산에 있을 때는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맞은편.
고작 몇 미터.
그런데 여기 강릉에서는 호텔 벽 하나가 갑자기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나는 한참 동안 호텔 입구를 바라봤다.
‘같은 방인가?’
그 생각이 들었다.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야.”
괜히 속이 불편해졌다.
남자친구라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상상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 남자가 그녀와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맥주 하나를 샀다.
호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칙—
캔을 땄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시간은 계속 흘렀다.
자정.
새벽 1시.
새벽 2시.
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만 가자.’
그런데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별일이 일어날 것도 없었다.
그녀가 다시 나올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냥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있는 곳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하지만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덮었다.
우리는 왜 계속 마주치는 걸까.
고등학교 때.
같은 버스.
십 년도 넘은 뒤 맞은편 집.
삼성병원.
버스.
동네 계단.
부산 시내 술집.
올리브영.
그리고 강릉.
이 정도면 너무 많이 겹치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생각을 자꾸 의미 있게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묘한 이끌림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여행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시 만났다.
그것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강릉에서.
나는 웃었다.
“이게 우연이면 진짜 대단하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설명할 수 있다.
강릉은 유명한 여행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
부산에서 강릉으로 여행 오는 사람도 많다.
맛집도 다 비슷하게 검색한다.
바닷가도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우연히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녀를 특별하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우연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게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상관없었다.
새벽 3시가 넘었다.
호텔 로비 불빛은 여전히 환했다.
나는 빈 맥주캔을 바라봤다.
“가자.”
이번에는 진짜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갔다.
문을 열었다.
친구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떴다.
“야.”
“왜.”
“너 어디 갔다 왔냐?”
“바람 쐬고.”
친구가 휴대전화를 봤다.
“바람을 몇 시간씩 쐬냐?”
“잠 안 와서.”
친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혼자 좋은 데 갔다 왔지?”
“뭔 좋은 데.”
“솔직히 말해.”
“아니다.”
“헌팅 성공했냐?”
“실패했다니까.”
“그럼 어디 갔다 왔는데.”
나는 옷을 벗어 의자에 던졌다.
“전화 좀 받고. 바닷가 걸었다.”
“새벽 세 시까지?”
“그냥 걷다 보니까.”
친구는 잠깐 나를 봤다.
그러더니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미친놈.”
“자.”
“너도 자.”
나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 남자와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가슴 한쪽이 불편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내가 너무 늦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그녀가 다른 사람과 더 가까워진다면.
그 생각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다.
‘부산에 내려가면.’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려가면 말 걸어보자.’
어떻게든.
아주 평범하게.
우연히 마주친 척이라도.
그녀에게 내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며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
숙취 때문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
머리가 무거웠다.
옆 침대에서 친구가 끙끙거렸다.
“죽겠다.”
“나도.”
“해장하러 가자.”
“뭐 먹게.”
친구가 휴대전화를 켰다.
“근처 맛집.”
검색.
잠시 뒤 친구가 말했다.
“감자옹심이 어때?”
“강원도 왔으니까 먹어야지.”
“여기 유명한 데 있네.”
나는 대충 세수를 했다.
숙소를 정리했다.
짐도 거의 싸놨다.
오늘 밥만 먹고 부산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차를 타고 근처 감자옹심이집으로 갔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애매한 시간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와.”
친구가 말했다.
“여기 맛집인가 보다.”
“검색 1등이잖아.”
우리는 번호표를 받았다.
잠깐 기다렸다.
10분쯤 지나 직원이 불렀다.
“두 분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갔다.
구수한 냄새.
감자전 냄새.
들깨 냄새.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빈 테이블을 찾으며 안쪽을 봤다.
그리고—
또 멈췄다.
“…….”
심장이 순간 쿵 내려앉았다.
‘설마.’
창가 쪽.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녀.
그리고 어젯밤 그 남자.
나는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친구가 내 등을 밀었다.
“야, 뭐 해?”
“어?”
“앉자.”
“어.”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또?’
진짜 또?
어젯밤 해변.
호텔.
그리고 오늘 아침.
감자옹심이집.
나는 친구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와는 대각선 방향이었다.
몇 테이블 떨어져 있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았다.
‘미쳤네.’
나는 메뉴판을 보는 척했다.
“뭐 먹을래?”
친구가 물었다.
“어?”
“옹심이.”
“어. 그래.”
“감자전도?”
“응.”
대답은 했지만 머리는 온통 그녀 쪽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보였다.
어제 밤과는 조금 달랐다.
화장도 옅은 것 같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편안한 느낌이었다.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번에는 창문 너머가 아니다.
골목 건너편도 아니다.
같은 식당.
같은 공간.
말소리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가까이 있었다.
‘와.’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또 달랐다.
엄청 화려한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눈이 갔다.
표정.
눈매.
웃는 모습.
젓가락을 들고 음식 먹는 모습.
별것 아닌 행동들이 계속 보였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이상하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보고 싶었다.
친구가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툭 쳤다.
“야.”
“왜.”
“너 뭐 보냐?”
“뭘.”
“아까부터 자꾸 저쪽 보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는 사람 있어?”
순간 뜨끔했다.
“아니.”
“근데 왜 그래.”
“그냥 사람 많아서.”
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너 어제부터 좀 이상하다.”
“술 덜 깼나 봐.”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김이 올라오는 감자옹심이.
감자전.
나는 국물부터 한 숟가락 먹었다.
“아.”
뜨겁다.
친구가 웃었다.
“천천히 먹어.”
나는 다시 그녀 쪽을 힐끗 봤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나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철렁했다.
‘봤나?’
숟가락을 들고 괜히 국물만 바라봤다.
1초.
2초.
3초.
다시 살짝 봤다.
그녀는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후.’
눈은 안 마주친 것 같다.
다행이다.
그런데 묘했다.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들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존재를 한번쯤은 알아줬으면 했다.
‘나를 기억하려나.’
병원에서 스쳤고.
버스에서 한번 눈이 마주쳤고.
동네 계단에서도 같은 길을 걸었다.
혹시 얼굴 정도는 본 적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전혀 기억하지 못할까.
나는 친구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몇 번 더 그녀를 바라봤다.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자는 평범해 보였다.
나보다 잘생긴 건가?
키는?
직업은?
나이는?
또 비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한심하다고 느꼈다.
저 사람은 그녀 옆에 앉아 있다.
나는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혼자 비교하고 있다.
‘그래.’
갑자기 생각이 정리됐다.
이렇게 계속 바라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이 너무 명확했다.
만약 정말 남자친구라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은 제대로 사람 대 사람으로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말도 걸어보고.
이름도 알고.
목소리도 듣고.
어떤 사람인지 직접 알고 싶었다.
창문 너머의 모습 말고.
진짜 그녀.
‘부산 내려가면.’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다가가자.’
이번에는 정말.
핑계 만들지 말고.
백수라서.
용기가 없어서.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그런 이유로 계속 미루지 말자.
적어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
같은 동네 사람이니까.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
거기서 시작하면 된다.
나는 감자옹심이를 먹었다.
이상하게 아까보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조금 뒤 그녀와 남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
친구가 말했다.
“야.”
“왜.”
“진짜 뭐 있지?”
“뭐가.”
“아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
“잠을 못 자서 그래.”
“수상하다.”
나는 웃었다.
“먹기나 해.”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창밖으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이 잠깐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이번에는 불안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보게 될 것 같았다.
부산으로 내려가면.
맞은편 집.
병원.
동네.
어디에서든.
우리는 다시 마주칠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믿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믿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 수도 있다.
의미 없는 사건들을 내가 멋대로 이어붙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자꾸 만난다.
계속 겹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계속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친구가 물었다.
“부산?”
“어.”
“운전 네가 해.”
“술 다 깼다.”
“어제 그렇게 마시고?”
“나 멀쩡해.”
친구가 웃었다.
나는 계산대로 걸어가다가 식당 문을 한번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부산에 내려가면—
더 이상 창문 너머에서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한번.
그녀 앞에 서보겠다.
그리고 내 존재를 알리겠다.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