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며칠 동안 이상했다.
눈을 뜨면 그녀 생각.
밥을 먹다가도 그녀 생각.
취업공고를 보다가도 문득 맞은편 창문 생각.
샤워하다가도,
편의점에 가다가도,
잠들기 직전에도.
“하…….”
나는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처음에는 심심해서였다.
백수가 되고 하루가 너무 길어졌고,
그 무료한 시간 속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발견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없는 시간에도 그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출근했을까.
쉬는 날일까.
강아지들은 뭐 하고 있을까.
혹시 누구 만나는 건 아닐까.
그 생각까지 들면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내가 뭔데.”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이름도 모른다.
연락처도 모른다.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남자친구가 있을까 봐 기분까지 나빠지는 걸까.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거 진짜 병인데.”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며칠 집을 떠나자.
환경이 문제다.
매일 맞은편에 그 집이 보이니까 그런 것이다.
창문이 보이고,
옥상이 있고,
그녀가 집에 들어오는 모습까지 보이니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안 보면 괜찮아질 것이다.
마침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야, 여행 갈래?”
“어디?”
“강릉.”
“갑자기?”
“바다 보고 회 먹고 술이나 마시자.”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바로 말했다.
“가자.”
강원도 강릉.
차에서 내리자 바다 냄새부터 달랐다.
“와.”
파도 소리.
바닷바람.
사람들.
평일인데도 생각보다 북적였다.
부산에도 바다가 있지만,
여행 와서 보는 바다는 역시 느낌이 달랐다.
친구가 팔을 벌렸다.
“야! 이게 여행이지!”
“촌스럽게 왜 이래.”
“백수 둘이 여행 왔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
“너는 백수 아니잖아.”
“회사원도 마음은 백수다.”
“개소리.”
둘 다 웃었다.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바로 바닷가로 나갔다.
일단 회.
광어.
우럭.
오징어.
그리고 새우.
“와, 이거 봐라.”
친구가 새우를 들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이거 얼마인지 아냐?”
“몰라.”
“나도 몰라.”
“미친놈아.”
소주잔을 부딪쳤다.
짠.
한 잔.
두 잔.
바닷가에서 먹는 술이라 그런지 더 빨리 올라왔다.
회를 먹고,
조개구이까지 먹었다.
불판 위에서 조개가 입을 벌렸다.
치익—
버터 냄새와 바다 냄새가 섞였다.
“캬.”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좋다.”
진짜 좋았다.
오랜만에 머리가 조금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맞은편 집 생각도,
취업 생각도,
재홍이 했던 말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래.’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여행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내 인생을 살면 된다.
그녀 하나 때문에 하루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
저녁이 되자 해변 분위기가 달라졌다.
조명이 켜지고,
음악 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어딘가에서는 맥주 페스티벌 비슷한 행사를 하고 있었다.
긴 테이블.
푸드트럭.
생맥주.
음악.
커플들.
그리고 남녀 무리들.
친구가 내 팔을 툭 쳤다.
“야.”
“왜.”
“여자 많다.”
“그러네.”
“오늘 한 명 건져보자.”
나는 피식 웃었다.
“건지긴 뭘 건져.”
“너 소개팅 안 한 지 얼마나 됐냐?”
“몰라.”
“너 그러다가 진짜 혼자 늙는다.”
“닥쳐.”
그런데 술기운 때문인지 나도 조금 들떴다.
주변을 둘러봤다.
예쁜 여자도 많았다.
친구끼리 여행 온 사람들.
커플.
여자 둘.
여자 셋.
문득 생각했다.
‘그래.’
다른 여자를 만나면 된다.
왜 하필 그 누나여야 하지?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나는 준수한 편이다.
키도 나쁘지 않고,
관리만 조금 하면 외모도 어디서 크게 빠질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백수지만 대기업도 다녀봤다.
아예 답 없는 인생도 아니다.
“야.”
내가 친구를 봤다.
“오늘 번호나 물어볼까?”
친구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갑자기 적극적인데?”
“여행 왔잖아.”
“가자.”
술기운이 용기를 줬다.
처음에는 여자 둘이 있는 테이블 근처로 갔다.
“저기요.”
여자들이 돌아봤다.
“혹시 여행 오셨어요?”
“네.”
“저희도 여행 왔는데 같이 맥주라도…….”
“아, 죄송해요.”
“아…… 네.”
끝.
친구가 뒤에서 웃었다.
“야, 개빨리 끝났네.”
“닥쳐.”
두 번째.
이번에는 혼자 사진을 찍고 있는 여자.
“사진 찍어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네.”
끝.
“야.”
친구가 배를 잡았다.
“너 여자 꼬시는 거 왜 이렇게 못하냐.”
“시끄러워.”
“대기업 간판 없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죽을래?”
그래도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거절당해도 여행지라 그런지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술도 들어갔고.
세 번째에는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혹시 번호 좀…….”
“남자친구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또 실패.
“하.”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준수한 외모는 개뿔.”
친구가 말했다.
“야, 네가 너무 어색해.”
“나도 알아.”
“너 요즘 여자랑 대화 안 했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났다.
맞은편 집 누나.
나는 그렇게 매일 그녀를 봤는데,
정작 대화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모르는 여자에게는 번호까지 물어보고 있다.
웃겼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다른 여자 만나면 잊혀지냐?’
대답은—
아니었다.
잠깐 잊고 있었을 뿐이다.
어딘가에서 여자 웃음소리가 들리면 그녀가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키가 비슷한 여자가 지나가면 뒤를 돌아봤다.
긴 머리가 보이면 순간적으로 시선이 갔다.
“미치겠네.”
“뭐가?”
친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 깊었다.
우리 둘 다 꽤 취했다.
숙소로 돌아가 편의점 맥주를 또 꺼냈다.
“야, 이게 마지막이다.”
“아까도 마지막이라며.”
“진짜 마지막.”
캔을 땄다.
칙—
나는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TV에서는 아무 프로그램이나 나오고 있었다.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너 요즘 여자 있냐?”
“없어.”
“근데 왜 아까부터 멍때리냐.”
“그냥 취해서.”
“뻥치네.”
“자라.”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맞은편 집에 사는 한 살 위 누나를 매일 몰래 바라보고 있는데,
이제는 하루 종일 그 여자가 생각난다고?
친구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맥주를 다 마시고 친구는 먼저 뻗었다.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이상했다.
결국 숙소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나 쐬자.”
밤바다.
사람이 낮보다 훨씬 적었다.
파도 소리가 크게 들렸다.
철썩.
철썩.
멀리 조명들이 반짝였다.
커플 몇 명이 해변을 걷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었다.
‘좋네.’
여행 오길 잘했다.
적어도 집에 있을 때처럼 맞은편 창문만 보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녀 생각도 조금씩 잊으면 된다.
며칠만 안 보면.
한 달.
두 달.
취업하고 바빠지면 자연스럽게 잊을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혼잣말했다.
“그러면 돼.”
그 순간이었다.
앞쪽에서 남녀 한 쌍이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커플이겠거니.
밤바다에 커플이 한둘인가.
남자는 검은 티셔츠.
여자는 밝은색 상의.
두 사람은 천천히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여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
걸음이 멈췄다.
심장이 갑자기 철렁했다.
‘설마.’
술을 너무 마셨나?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나는 다시 봤다.
머리.
키.
걸음.
얼굴.
“……누나?”
입 밖으로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맞았다.
그녀였다.
맞은편 집.
삼성병원.
버스.
올리브영.
그 여자.
그녀가 강릉에 있었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왜?’
여기가 부산도 아니다.
우리 동네도 아니다.
강릉.
차를 타고 몇 시간을 올라온 여행지.
그런데—
왜 여기서 또 보는 거지?
그리고 그다음에야 옆에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
남자.
둘이 함께 걷고 있었다.
거리도 가까웠다.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남자친구?’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당연한 건가.
서른쯤 된 여자다.
직장도 있다.
예쁘고.
사교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남자친구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래.”
작게 말했다.
“남자친구겠지.”
그런데 입으로 말하니 기분이 더 이상했다.
남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그 웃음이 내가 술집 밖에서 봤던 웃음과 비슷했다.
나는 괜히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질투.
그 단어밖에는 없었다.
‘웃기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질투하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내 존재도 모른다.
오늘 이 강릉에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남자가 부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리가 부러웠다.
밤바다.
그녀 옆.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는 자리.
‘저게 나였으면.’
그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가 저기 있어야 했는데.’
무슨 근거로?
아무것도 없다.
그녀와 대화조차 한 적 없는데.
그런데 술 때문인지,
질투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계속 자라났다.
고등학교 때 같은 버스.
십 년이 넘어서 맞은편 집.
삼성병원.
버스에서 다시 마주침.
동네 계단.
부산 시내 술집.
올리브영.
그리고—
강릉.
“이게 말이 되나.”
나는 중얼거렸다.
이 많은 장소에서 계속 마주친다.
부산 같은 도시에서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동네니까.
생활 반경이 겹치니까.
그런데 강릉까지?
나는 바다를 바라봤다.
술이 머리를 이상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의미를 붙이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운명인가.”
말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미쳤다. 박동진.”
운명이라니.
그녀는 남자와 걷고 있는데.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무슨 운명.
그런데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와 남자는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질투가 났다.
속이 쓰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감정이 있었다.
반가움.
강릉까지 와서 그녀를 봤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게 좋았다.
나는 그녀를 잊으려고 여기까지 왔다.
다른 여자에게 번호도 물어봤다.
맥주도 마셨다.
바다도 봤다.
친구와 웃었다.
그런데 결국—
오늘 하루의 마지막에도 그녀가 있었다.
나는 밤바다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마음속에 조금씩 자리 잡았다.
어쩌면 내가 아무리 멀리 가도—
계속 그녀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게 단순한 우연인지,
내가 만들어낸 망상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믿고 싶었다.
우리가 계속 마주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지금 그녀 옆에서 걷고 있는 저 남자의 자리에,
내가 서게 될 수도 있다고.
파도가 다시 밀려왔다.
철썩—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이번에도…… 너네.”
잊으려고 온 여행이었다.
그런데 강릉에서조차 다시 만나버렸다.
이제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쫓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꾸만 그녀 쪽으로 끌려가고 있는 건지.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