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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STARGIL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운 좋게 대기업 SG그룹에 입사한 김주임. 하지만 기대했던 회사생활은 군대식 문화, 끝없는 야근, 사내정치와 반복되는 진급 누락으로 얼룩졌다. 주식은 몇 년째 물려 있고, 정신없이 회사만 다니다 보니 어느새 결혼도 하지 못한 채 13년이 흘러버렸다. 어느 날, 술에 취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김주임은 달려오는 트럭과 부딪히고 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그는 13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된 입사 첫날로 돌아와 있었다. 회사의 미래도, 사람들의 속내도, 앞으로 벌어질 사건도 알고 있는 두 번째 인생. 13년 동안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기 위한 직장인의 두 번째 회사생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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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4화. 등산복의 호랑이
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73화. 조건 없는 화해는 없다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Last Updated: 2026-10-28
Chapter: 72화. 송별회 없는 퇴사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Last Updated: 2026-10-27
Chapter: 71화. 먼저 고친 사람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70화. 본인 진술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Last Updated: 2026-10-23
Chapter: 69화. 자료만 두고 가겠다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
Last Updated: 2026-10-22
옆집의 그녀

옆집의 그녀

우연히 마주친 옆집 그녀....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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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2화 — 단톡방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71화 — 청첩장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Last Updated: 2026-10-28
Chapter: 70화 — 전송 대기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Last Updated: 2026-10-27
Chapter: 69화 — 응급실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68화 제야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Last Updated: 2026-10-23
Chapter: 67화 — 창문 아래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
Last Updated: 2026-10-22
내원수의 목숨은 내 것

내원수의 목숨은 내 것

칠 년 전 역모로 멸문한 설씨 가문의 생존자 설연은 원수로 알려진 대군 무강을 암살하려 한다. 그러나 칼을 겨눈 밤, 또 다른 살수들이 그녀를 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무강을 죽였다는 사형 문서까지 발견된다. 무강은 설연을 구하려다 그녀의 독에 중독되고, 정보 길드장 백현과 의원 아란이 두 사람의 탈출을 돕는다. 탈출로 끝에서는 황제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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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6화 약속의 붉은 값
“해가 지면 어떻게 되는데.”설연은 동생의 손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손목에 떠오른 붉은 선이 맥박을 따라 아주 느리게 짙어졌다. 설호가 입술을 열자 아란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그 설명을 해도 되는지부터 확인하자. 대답하지 말고, 지금 아픈지만 고개로 알려 줘.”설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란은 조금 전 맥을 짚었던 자리에 손가락을 대었다. 열도 출혈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관리인이 다가왔다.“돌아가실 시간입니다.”정문익이 의자를 문 쪽으로 돌렸다. 늙은 관리 하나가 길을 막았을 뿐인데 상대의 걸음이 멎었다.“새 표식을 확인했네. 진료 중 환자를 옮기려는 사유와 책임자의 이름을 적게.”“전하의 분부입니다.”“그럼 자네 이름 대신 전하의 이름을 적어도 되겠는가?”관리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정문익은 붓을 들고 기다렸다. 협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피할 곳이 없었다.결국 관리인이 사람을 보냈다. 설호는 누나의 손목을 놓았다. 손끝에 남은 체온이 식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오늘 아침에 맺었어. 약속을 지키겠다는 짧은 서약.”아란의 눈썹이 움직였다.“말해도 된다고 들었니?”“응. 내용은 숨기지 않아도 된대.”잠시 뒤 돌아온 내관이 접힌 원문을 펼쳤다. 피로 찍은 설호의 엄지와 집례관의 수결이 있었다. 정문익은 접수 장부의 번호부터 대조했다. 설호가 원문을 읽고 자기 것이라 확인한 뒤에야 아란이 촛불을 가까이 옮겼다.면회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표식이 나타난다. 해 지기 전에 서약식을 하는 방에 가야 한다. 늦으면 두 다리가 굳지만, 그 방에 도착하면 벌이 멎는다. 절차를 마친 뒤 이 임시 서약은 풀어 준다.설연이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여기에는 새 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없어.”내관이 미소를 지었다.“전하께서 강요하실 리 있습니까.”설호가 웃었다. 입술 한쪽만 움직이는, 누나가 모르는 웃음이었다.“안 받으면 다시 아무도 못 만나는 거지.”설연은 두 가지를 구분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방에 가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65화. 너를 놓친 시간
설연은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동생이 살아 있다는 기쁨은 눈앞에 있었지만, 그 질문을 덮고 끌어안을 수는 없었다.“죽은 줄 알았어.”설호의 입술이 비틀렸다.“나도 처음엔 그랬어.”그는 방울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손바닥에 금속이 박힐 만큼 쥐고 있었다.“그런데 누나는 살아서 나갔다고 했어. 대군이 골라서 데리고 나갔다고.”“나는 의식을 잃었어. 누구를 고를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어.”설호는 고개를 돌렸다.“그다음에는 고를 수 있었잖아.”설연은 아무 말도 못 했다.죽은 줄 알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혼자 기다린 사람의 밤을 지워 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진실을 그에게 믿으라고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네 이름이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어. 나도 그 이름만 믿었어.”“내 이름을 부른 적은 있어?”설연이 그를 보았다.“잠들 때마다.”그녀는 숨을 골랐다.“큰 소리로 부르면 누가 들을까 봐 입을 막고 불렀어. 어느 날부터 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서, 내 목소리로 네 대답까지 했어.”설호의 손가락이 조금 펴졌다.“미쳤네.”“응.”그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설연은 처음으로 동생에게서 자신과 닮은 표정을 보았다.문가의 관리가 기침했다.설호는 곧바로 표정을 거뒀다. 설연은 그 속도를 기억해 두었다. 이 방에서 오래 살아남은 방식일 것이다.그녀는 조금 더 낮게 말했다.“네가 믿을 때까지 확인해. 내가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알았는지 기록도 보여 줄게.”“대군 말도 믿으라고?”“아니.”설연은 단호하게 답했다.“나도 그 사람 말을 확인하고 있어. 나를 구한 것과 다른 사람을 남긴 건 따로 물어야 하니까.”설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예상한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누나가 그 사람 편이라고 들었어.”“누가 말했어?”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가를 보지도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설연은 질문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난 네 말을 들으러 왔어. 네가
Last Updated: 2026-10-28
Chapter: 64화. 방울의 주인은 따로 있다
설연은 황제보다 청년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그는 일어나 인사했다. 너무 익숙한 동작이었다. 허리를 굽히는 깊이도, 눈을 내리는 시점도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알고 있었다.설연은 그 익숙함이 아팠다.황제가 은방울을 탁자에 놓았다.“기억나느냐.”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연은 방울을 손대지 않고 보았다. 옆면의 작은 찌그러짐. 어릴 때 설호가 돌계단에 발을 부딪쳤던 자리였다. 붉은 끈은 없었다. 궁의 새 비단 끈으로 바뀌어 있었다.“수문에서 들려주신 것도 이것입니까?”“알아듣는구나.”황제가 미소 지었다.“설씨 집에서 거둔 물건을 보관해 두었지.”방울이 그 손에 있었다는 사실은 설호가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죽은 아이의 물건만으로도 누이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설연은 자신이 그 소리에 돌아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돌려주세요.”그녀가 말했다.황제의 손가락이 멎었다.“네게?”“주인에게요.”청년의 눈이 올라왔다. 황제는 잠깐 그를 보더니 방울을 그의 앞에 밀었다.“가져라. 네 누이가 달라는구나.”청년은 바로 집지 않았다. 설연도 대신 가져다주지 않았다. 한동안 작은 물건 하나가 세 사람 사이에 놓여 있었다.설연은 방울에 묶인 새 끈을 보았다. 어머니가 쓰던 매듭은 아니었다. 물건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돌보던 손은 모두 바뀌어 있었다. 저 아이의 옷깃과 약그릇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돌아왔다고 그 손들의 자리를 한꺼번에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방울을 가져다주려던 마음을 거두고, 그가 선택할 때까지 기다렸다.아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 환자의 진료 경과와 약재 계정을 대조하고자 합니다. 처음 치료한 기록부터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황제가 그녀를 보았다.“살아 앉아 있는데도 믿지 못하느냐?”“저는 이름으로 진료하지 않습니다.”짧은 침묵 뒤 황제가 웃었다.“보여 주어라.”관리에게서 온 것은 제본된 경과첩이었다. 정문익은 번호와 보관 도장을 확인하고, 처음 진료한 뒤 인수 의원이 바뀐 날짜를 차례로 읽었다.
Last Updated: 2026-10-27
Chapter: 63화.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 입
“지금은 안 가.”설연이 답했다. 평생 떠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킬 수 있는 것부터 말해야 했다.아란은 청년의 곁에 무릎을 낮췄다. 손목을 잡기 전에 허락을 구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맥을 짚고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약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언제야?”“아침 종이 울리기 전입니다.”관리가 처방첩을 가져왔다. 정해진 복용은 아침과 밤이었다. 흥분할 때 추가로 먹이라는 말은 별도의 관리 지침에 있었고, 의원의 처방 표시는 없었다.아란은 두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처방한 의원에게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환자는 거부하고 있고, 숨도 돌아오고 있어요.”관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란은 약잔을 버리지 않았다. 무엇이 든 약인지 검사할 수 있게 그대로 두고 추가 투약만 멈췄다.청년의 손가락이 탁자 아래에서 펴졌다.설연은 그 움직임을 보고서야 자신도 숨을 참았다는 것을 알았다.“잠들면 무서워?”“깨어났을 때 무엇이 없어졌을지 모르니까요.”그는 물그릇을 바라봤다.“방도 바뀌고, 돌보던 사람도 바뀌고. 어떤 날은 제 이름도 바뀌었습니다.”설연은 정우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자신의 실망이 부끄러웠다. 그에게는 그것도 살아남아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었을 텐데.“어떤 이름으로 불러 주면 좋겠어?”청년이 처음으로 그녀를 오래 보았다.“아직 부르지 마십시오.”그 말에 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내밀고 싶었으나 무릎 위에 두었다.정문익이 자신은 약재 계정과 환자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러 왔다고 설명했다. 청년은 듣다가 물었다.“확인하고 나면 무엇을 하실 건데요?”설연이 대답하려 하자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저를 데려가겠다고 하지 마세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들 말했습니다.”그녀는 준비한 말을 삼켰다.“그럼 네가 물어봐. 나부터 확인해.”청년은 정문익의 붓을 보았다. 설연은 그 시선을 따라가고 나서야 이 대답들도 관청의 종이에 남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잠시 멈춰 달라고 청하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62화. 나를 찾는 사람
설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아란이 팔을 붙잡았다. 나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너무 빨리 일어난 몸이 기울었기 때문이었다.“그 환자가 내 이름을 알아?”전갈을 가져온 내관은 청우재 관리가 쓴 답을 펼쳤다. 계정 조회의 사유를 환자에게 알리자 직접 면담을 원했다고 적혀 있었다. 서명란에는 설호가 아닌 다른 이름이 있었다.정우.설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이름을 바꿨을 수도 있어.”아란이 말했다.“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알아.”설연은 종이를 접지 못했다. 알고 있다는 말로 손의 떨림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면담은 이튿날 아침으로 정해졌다. 황제는 허락했다. 정문익의 입회와 아란의 동행을 붙이고, 환자의 거처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일은 금했다.너무 순순한 허락이었다.백현은 허가서의 뒷면까지 읽었다.“열쇠를 저쪽에서 주면 문턱 아래도 봐야 해.”설연이 그를 보았다.“함정인 줄 알아.”“알면서 혼자 가지만 않으면 돼.”아홉째 날 아침, 청우재의 문이 열렸다. 백현은 면담인에 포함되지 않아 바깥 접수처에서 기다렸다. 대신 드나드는 약 상자의 번호를 확인할 수 있는 감찰 서리와 함께 있었다.안쪽 정원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환자를 위한 의자마다 볕이 들었지만, 길이 갈라지는 곳마다 시위가 있었다. 담은 높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담 위로 손이 닿기 전에 화살이 닿을 자리였다.설연은 창과 기둥 사이의 거리를 셌다.아란이 옆구리를 가볍게 건드렸다.“환자 보러 왔어. 건물 해체하러 온 거 아니고.”“세기만 했어.”“그게 시작이잖아.”정문익은 듣지 못한 척 앞서 걸었다. 다만 자신의 서리에게 출입 시각을 적으라고 했다.면담실 문 앞에서 관리가 칼을 맡기라고 했다. 설연은 허리의 칼을 풀었다. 수령표를 받아 품에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기를 놓는 손보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더 떨렸다.방 안에는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어린아이가 아니었다.설연은 그 사실 하나에 발을 멈췄다. 동생이 살아 있다면 열여덟 살이라는 것을 수없이
Last Updated: 2026-10-23
Chapter: 61화. 살아 있다는 말 대신
설연은 다음 달이라는 세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 약은 어디로 갔어.”목소리가 낯설었다. 울지도 않았는데 목이 잠겼다. 아란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책 아래쪽을 짚었다. 수령처는 이름 대신 배송 번호로 적혀 있었다.“이 번호부터 맞춰 보자.”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궁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부수고 나면 남은 자들이 사람부터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회수 담당 내관이 책을 가져가려 했다. 정문익의 서리가 손을 내밀어 막았다.“분실 시도와 연결된 부분입니다. 해당 쪽을 입회하에 베끼고 원본은 봉해 주십시오.”내관은 상급자에게 확인을 보냈다. 답이 올 동안 설연은 의자에 앉았다. 한 번도 편해 본 적 없는 등이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먼저 버티지 못했다.아란이 물을 내밀었다.“마셔.”“지금은…….”“살아 있는 사람을 찾으려면 찾는 사람도 살아 있어야지.”설연은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 말 속에 살아 있다는 단정이 없어서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해가 기울 무렵 제한된 사본 작성이 허용됐다. 다른 환자의 이름은 가리고 설호의 계정과 배송 번호만 남겼다. 원본을 가져간 사람, 봉인한 사람, 사본을 받은 사람을 모두 기록했다.정문익은 반역 사건의 가족 명단도 확인하게 했다. 약을 받는 설호가 설연의 동생과 같은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그날 밤 돌아온 답에서 번호는 일치했다.설씨 대감의 둘째 자식, 설호. 생모를 적은 칸은 설연의 어머니와 달랐다. 어른들은 종이에 선을 그어 두 아이를 나눴지만, 어린 설호는 언제나 설연의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누나가 있는 쪽이 따뜻하다며.설연은 기록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이제야 동생이 이복이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릴 만큼, 그 선은 오래 잊고 살았다.“시신을 확인한 사람은?”그녀가 물었다.정문익이 별지를 넘겼다.군대가 함께 죽었다고 보고했을 뿐, 설호의 시신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죽었다는 말도 믿을 수 없게 됐
Last Updated: 2026-10-22
THE LEGEND OF DARKNESS(어둠의 전설)

THE LEGEND OF DARKNESS(어둠의 전설)

밀레스 농가 출신의 18세 소년 케이가 네 명의 동료(레아, 세리아, 니엘, 도건)와 함께 길드 '황혼의 별'을 결성하여 마이소시아 대륙을 모험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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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2화 규정과 손바닥
아버지가 쓰러진 건 그날 오후였다.쓰러졌다기보다 일어나지 못했다. 헛간 앞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 그대로 주저앉았다. 지팡이가 마당에 굴렀다. 염소가 놀라 울타리 쪽으로 달아났다.케이가 부축하자 아버지가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무릎이 반쯤 굽은 채 굳어 있었다. 세리아가 붙잡아 두었던 열흘이 지나고 사흘째였다. 굳는 속도가 빨랐다. 붙잡아 둔 만큼을 한꺼번에 되찾으려는 것처럼.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치마를 벗어 걸고, 수레를 끌어왔다. 형 로안이 대장간에서 뛰어왔다. 셋이서 아버지를 수레에 태웠다."교회로."엄마가 말했다."돈이 없잖아요. 166골드밖에……""알아."엄마가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그래도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 볼 거야. 신부님 앞에서. 안 되면 안 되는 거고."교회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로웰은 작았다. 감자밭 셋째 줄 집 아버지가 수레에 실려 간다는 소문은 마을 반 바퀴를 돌기도 전에 교회에 먼저 닿았다.오르반 신부가 교회 문간에 나와 있었다. 수레 위의 아버지를 보고, 무릎을 보고, 엄마를 보았다.엄마가 정말로 무릎을 꿇으려 했다. 신부가 그 팔을 잡았다."그러지 마시오.""신부님, 첫눈까지 닷새래요. 그 안에 꼭 갚을게요. 아들이 벌고 있어요. 땅을 팔아서라도……""압니다."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괴로운 얼굴이었다."하지만 의식은 헌금이 먼저입니다. 교단의 규정이오. 내가 한 집을 봐주면, 내일 다른 집도 봐줘야 하고, 그러면 세린 수도원은 교단에 갚을 것이 없어지오. 그러면 다음엔 사제를 보낼 수도 없게 되고."신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케이는 그걸 알았다. 틀리지 않은 말이 사람을 더 아프게 할 때가 있다는 것도.교회 창문이 열렸다.세리아였다. 근신 중이라 문밖에 나오지 못하는. 창틀을 붙잡고 수레 위의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매를 걷었다. 두 번."세리아."신부가 낮게 불렀다. 경고였다.세리아는 창틀을 넘었다.사제복 자락이 창틀에 걸렸다.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제41화 다락의 문
식당 2층 다락으로 가는 계단은 열세 칸이었다. 케이는 그걸 세며 올라갔다. 일곱 번째 칸에 그릇이 놓여 있었다. 마르타 아줌마가 올려 보낸 아침 수프. 반쯤 비어 있었다. 열 번째 칸에 또 하나. 어제 저녁 것. 그건 손도 대지 않았다.다락 문은 닫혀 있었다. 문틈으로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 그리고 무언가 탄 냄새가 새어 나왔다.케이는 문을 두드렸다."……밥이면 계단에 두고 가.""밥 아니에요."문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사과하러 왔으면 내려가.""사과 아니에요.""그럼 뭔데."케이는 문 앞에 섰다. 할 말을 생각해 왔다. 계단 열세 칸 동안 세 번 바꿨다. 결국 처음 생각한 걸로 했다."부탁하러요."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손바닥 한 뼘만큼.레아의 얼굴이 그 틈에 있었다. 눈 밑이 검었다. 붉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다. 모자는 쓰지 않았다. 손가락 끝마다 잉크가 묻어 있었다."……부탁?""양 우리가 습격당했어요. 어젯밤에. 숲 가장자리까지 거미줄이 쳐졌고요. 여왕이 다시 낳기 시작했대요."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문이 한 뼘 더 열렸다.다락 안은 종이 바다였다. 바닥에도 침대 위에도 창틀에도 종이가 깔려 있었다. 대부분 숫자와 그림이었다. 웅덩이, 화살표, 그리고 땅 밑으로 뻗은 선들. 탁자 위에는 그레타의 노트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 시료병 하나. 카일 편에 보내고 남은 마지막 하나였다."모레 정오에 숲 바위에서 모이기로 했어요. 니엘이랑. 다섯이.""다섯?""레아 씨, 세리아 씨, 카일 씨, 니엘, 저.""카일은 왕도 가는 길이잖아.""……네.""세리아는 근신이고.""네.""니엘은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며. 바위에 그렇게 썼다며."케이는 놀랐다. 레아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베른 아저씨가 마르타 아줌마한테 말했고, 아줌마가 밥 올려 보내면서 말했어. 로웰은 작아."레아가 문틀에 기댔다."그러니까 확실한 건 너 하나잖아. 그런데 왜 다섯이라고 썼어."케이는
Last Updated: 2026-10-28
Chapter: 제40화 다시 모이는 이유
종이 울린 건 자정이 지나서였다.수확제 날과 같은 박자였다. 이번엔 끝없이.케이는 헛간 이층에서 굴러 내려왔다. 칼을 들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엄마가 부엌 창문을 열었다. 형이 문간에 망치를 들고 나와 있었다."어디야!""서쪽! 토비네 언덕!"형이 외쳤다. 대장간 쪽에서 들었다고.서쪽 언덕으로 뛰었다. 달이 밝았다. 언덕 위 양 우리에서 비명이 들렸다. 양들의 비명. 그리고 토비의 비명.언덕을 넘자 보였다. 하얀 것들이 양 우리 울타리를 넘고 있었다. 거미였다. 개만 한 것들. 열, 스물. 굴에서 불을 피해 살아남은 새끼들이 그새 자라 있었다. 등에 빨간 무늬가 생기기 시작한 것들.토비가 양 우리 문 앞에서 쇠스랑을 휘두르고 있었다. 울면서. 그 뒤에 양들이 한쪽 구석에 몰려 떨고 있었다. 맨 앞에 하얀 양 한 마리. 뭉치였다."토비 씨!"케이가 뛰어들었다. 거미 하나가 토비의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케이는 칼을 짧게 쥐었다. 바투도, 윈드블레이드도 쓰지 않았다. 기초 검술. 하르카의 왼손이 가르쳐 준 대로, 상대의 다리를 보고, 먼저 갈 자리를 읽고.찔렀다. 다리 관절. 거미가 기우뚱했다. 한 번 더. 쓰러졌다."케, 케이……""뒤로요! 양들 뒤로!"거미들이 케이에게 몰려왔다. 다섯, 여섯. 케이는 하나씩 상대했다. MP를 아꼈다. 기술은 돈이랑 같아. 칼만 썼다. 맞았다. 물렸다. 찔렀다.일곱 번째 거미가 케이의 등 뒤로 돌았다. 케이가 돌아섰을 때 늦었다.바람이 지나갔다.거미가 반으로 갈라졌다. 등 뒤에서 날아온 반달. 윈드블레이드였다. 케이 것이 아니었다.하르카였다. 언덕 아래에서. 왼손에 바람 무늬 칼을 들고. 오른팔은 목에 매단 채로."……왼손으로 돼요?""오늘 처음 됐어."하르카가 언덕을 올라오며 칼을 휘둘렀다. 반달 하나가 또 날아갔다. 빗나갔다. 울타리 기둥을 쳤다."아직 반은 안 돼."바르칸이 반대편 언덕에서 나타났다. 칼도 없이, 맨손으로. 거미 하나를 집어 들어 다른 거미에게 던졌다. 둘이 같이
Last Updated: 2026-10-27
Chapter: 제39화 왼손
케이는 하르카 옆 기둥 앞에 섰다. 마당에는 기둥이 둘 있었다. 하나는 하르카가 왼손으로 치고 있었고, 하나는 비어 있었다.케이는 아무 말 없이 빈 기둥을 쳤다.하르카가 케이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자기 기둥을 쳤다. 왼손으로. 퍽.둘은 그렇게 쳤다. 해가 지고, 마당에 등불이 켜지고, 닭들이 닭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케이는 천 번을 쳤다. 하르카는 몇 번을 쳤는지 몰랐다. 하르카의 왼손 목검은 처음보다 덜 빗나갔다. 그래도 짚을 가르지는 못했다. 퍽, 퍽. 둔한 소리.다음 날도 왔다. 그다음 날도.사흘째 저녁, 하르카가 목검을 내렸다."너 사과 안 하네.""하지 말라면서요.""그래서 대신 기둥 치는 거냐.""아버지가 그러래요."하르카가 코로 웃었다. 그리고 목검으로 마당 한가운데를 가리켰다."나와. 대련.""교관님 왼손으로요?""싫어?"케이는 목검을 들고 마당 한가운데로 나갔다. 하르카가 맞은편에 섰다. 왼손에 목검. 오른팔은 천으로 감아 목에 매단 채."규칙. 너는 바투는 쓰지 마. 크래셔는 당연히 안 되고. 윈드블레이드도 안 돼. 기초 검술만.""그럼 저 그냥 칼 휘두르는 거잖아요.""그래. 그게 전사야."하르카가 움직였다.느렸다. 오른손 때와 비교하면 반도 안 됐다. 케이의 눈이 다 따라갔다. 왼발이 먼저 나왔다. 왼손잡이의 반대 패턴. 케이가 비켜서 반격했다. 하르카가 막았다. 어색하게. 목검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케이는 그 틈을 보았다. 찌르면 닿는다.찌르지 않았다.하르카의 눈이 가늘어졌다."……봐주냐.""아니요.""봐주잖아.""교관님 팔이……"퍽.목검이 케이의 옆구리를 때렸다. 왼손으로. 느렸는데,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케이가 봐주느라 멈춘 그 순간에."내 팔 보지 마. 내 칼 봐."케이는 숨을 골랐다. 다시 자세를 잡았다.이번엔 봐주지 않았다. 하르카도 봐주지 않았다. 느린 칼과 느린 칼이 부딪혔다. 하르카는 왼손이 서툴렀지만, 칼이 어디로 올지 읽는 눈은 그대로였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제38화 바르칸의 서랍
길드에는 바르칸 혼자였다. 해 질 녘이었다. 탁자를 닦던 손이 케이가 들어오자 멈췄다.케이는 접수대 앞에 섰다. 동전을 꺼내 올려놓았다. 지평선 위의 별.바르칸은 동전을 보았다. 오래 보지 않았다. 한 번 보고, 눈을 감았다."마르타가 말했냐.""반만요. 나머지는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래요."바르칸이 탁자를 닦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접수대 너머가 아니라, 손님 쪽 탁자에. 케이 맞은편에. 오늘 두 번째였다. 로웰 어른이 케이 맞은편 손님 자리에 앉는 것이."앉아."케이가 앉았다.바르칸은 셔츠 안에서 별패를 꺼냈다. 금빛, 반쯤 깨진. 동전 옆에 나란히 놓았다. 깨진 돌의 단면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등잔불에 그 그을음이 무지갯빛으로 번들거렸다. 검은 물처럼."열한 해 전 가을이었다."바르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열한 해 동안 혼자 외운 사람처럼."우린 다섯이었다. 다 5성.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파티였지. 이름은 에이든이 지었다. 황혼의 별. 해 질 녘에 제일 먼저 뜨는 별처럼, 어두워지기 전에 먼저 가서 길을 비추자고."바르칸이 동전을 손끝으로 밀었다."그해 여름에 왕궁에서 의뢰가 왔다. 그늘숲 깊은 데서 검은 물이 솟는다고. 짐승들이 미친다고. 우리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냥 독이 솟는 샘이겠거니 했지. 막으면 될 줄 알았다.""막았어요?""막았다."바르칸이 별패를 쥐었다. 깨진 돌이 손바닥에 박혔다."샘이 아니었다. 문이었다. 땅 밑으로 난 문. 검은 물은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거였어. 우리는 그 문을 닫았다. 닫긴 닫았다."바르칸이 말을 멈췄다. 등잔불이 흔들렸다."토렌은 문 앞에서 죽었다. 문 안에서 나온 것한테. 오웬하고 미라는 살아서 나왔다가, 이듬해 겨울에 각자 다른 데서 죽었다. 검은 물을 너무 많이 뒤집어써서. 별패가 다 까매졌지.""그럼 에이든은요."바르칸이 케이를 보았다. 오래 걸려서 대답했다."돌아오지 않았다.""……어떻게요.""그건 다음에 말하마."
Last Updated: 2026-10-23
Chapter: 제37화 국자의 무게
새벽에 케이는 그늘숲 가장자리에 감자 보따리를 두고 왔다.베른이 말한 그 자리였다. 다리를 끄는 그림자가 보였다는. 낙엽 위에 맨발 자국이 있었다. 한쪽은 깊게, 한쪽은 얕게. 숲 안쪽으로 이어졌다가 바위 앞에서 끊겼다.케이는 그 바위 위에 보따리를 올려놓았다. 엄마의 찐 감자 여섯 알. 그리고 숯 조각으로 바위에 적었다. 니엘이 굴 벽에 남긴 글씨를 흉내 내서.[감자. 먹어. 특히 너.]숲은 조용했다. 케이는 한참 그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 들어가면 니엘은 더 깊이 숨을 것이다. 고양이처럼.식당 문을 열었을 때 국자는 날아오지 않았다.마르타 아줌마가 부엌에서 감자를 깎고 있었다. 케이를 보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앞치마에 손을 닦고 나와서 케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 빠진 칼, 반쪽 눈썹, 퀭한 눈."앉아."케이가 앉았다. 아줌마가 국을 한 그릇 떠 왔다. 감자가 들어간."다락의 아가씨는요.""어제부터 안 내려와. 밥은 올려 보내면 반은 먹어. 반은 남기고. 편지만 쓴대."아줌마가 맞은편에 앉았다. 손님 자리에. 아줌마가 손님 자리에 앉는 걸 케이는 처음 보았다."하르카 팔, 들었어."케이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내가 그 애 열두 살 때부터 알아. 전사 길드 문 앞에서 목검 들고 기다리던 애야. 아무도 안 받아 줘서. 계집애가 무슨 칼이냐고. 근데 사흘을 버텼어. 그래서 받아 줬지. 그때 교관이 누구였는지 알아?""……누군데요.""우리 그이."아줌마가 웃었다."토렌. 그 손잡이띠 주인."케이는 칼을 내려다보았다. 손잡이에 감긴 반질반질한 가죽 띠. 구리 고리 안쪽에 반쯤 닳은 글자. 토……"그이는 도적 출신이었어. 그런데 전사 길드 교관까지 했지. 칼은 짧은 걸 좋아했어. 단검 두 자루. 남들은 칼이 짧으면 겁쟁이라고 했는데, 그이는 짧게 쥐어야 잘 맞는다고 했어."케이의 손이 저절로 칼자루로 갔다. 짧게 쥐는 손."그 띠는 그이 단검 손잡이에 감던 거야. 그날 아침 새 띠로 갈았
Last Updated: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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