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루시앙이 남긴 잔은 그대로였다. 은서는 그 잔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윤 실장이 부하들에게 방문 기록과 객실 출입 내역을 확보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티아라는요?”
“별도 보관 중입니다. 행사장 측에도 안전하게 회수했다고 통보했습니다.”
은서는 작품의 인계 절차부터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허락 없이 가져간 것으로 보이면 안 됐다. 감정위원으로 온 사람이었고, 그 작품의 상속을 주장할 사람도 자신이었다. 실물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보관하는지 기록이 남아야 했다.
“제 감정 자료도 같이 보내 주세요. 제 이름으로요.”
윤 실장이 수신처를 읽어줬다. 은서는 마지막 주소까지 듣고 맞다고 했다. 사건을 맡긴다고 자기 이름까지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된 자료가 나가면 자신이 설명해야 했다.
윤 실장이 확인을 마치고 물러났다. 은서는 젖은 드레스
그로부터 보름 뒤 오후 2시, 펜트하우스 45층 프라이빗 스튜디오.처음 만든 틀은 너무 두꺼웠다. 보석보다 장치가 먼저 보였다. 두 번째는 잠금 부분을 다듬다가 금이 갔다. 은서는 실패한 조각들을 다른 세공 부산물과 함께 정리해 두고 모양부터 다시 그렸다.낮에는 취임 축하 컬렉션을 손봤다. 그 일도 거짓은 아니었다. 시후가 들어올 때 내밀 수 있는 도면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완성도를 낮추고 싶지는 않았다.밤에는 손안에 감출 수 있는 브로치의 틀을 줄였다. 회로가 하는 일까지 자신이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업무용 단말기의 보조 장치와 조립 설명을 대조하면서도 모르는 부분은 남았다. 그래서 작동한다고 믿기 전에 작은 시험을 반복했다.시후가 같은 방에 있을 때는 손대지 않았다. 그가 잠깐 화상 회의에 들어간 시간, 식사를 준비하러 나간 시간만 골랐다. 의자 끄는 소리가 조금만 달라져도 작업을 멈췄다.손바닥에 닿는 금속 모서리가 닳을 만큼 만져 본 뒤에야 최종 틀이 나왔다. 화려한 보석을 얹으면 시선을 끌 것이고, 평범하게 만들면 옷의 장식으로 지나갈 수 있었다. 은서는 일부러 돌의 크기를 줄였다. 이 물건만큼은 사람들이 오래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다.시후가 서경그룹 본사 긴급 이사회 주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45층은 삼중 방탄문으로 철저히 락다운되어 있었다. 은서는 작업대 조명을 켜고,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백금 앵클릿을 40배율 보석 현미경 아래에 올려두었다. 렌즈 안에서 앵클릿 중앙의 블랙 다이아몬드 거들 안쪽을 살폈다. 맨눈으로 놓쳤던 틈이 배율을 높이자 드러났다.‘역시…… 블랙 다이아몬드 아래에 마이크로 RF 발신 칩을 숨겨놨어.’시후의 손목시계와 메인 서버로 은서의 위치와 심박수를 1초 단위로 전송하는 감시의 족쇄. 그 신호를 속일 수 있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은
철컥-!스튜디오의 문이 활짝 열리는 0.1초의 찰나. 은서는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위성 단말기 전원 버튼을 누르고, 작업대 모니터 화면을 마터호른 에메랄드 티아라의 3D 정밀 도면으로 전환했다.지직-스위스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푸른 에메랄드 그래픽만이 작업실 안을 비추었다.벅, 벅.샤워 가운을 걸친 시후가 서늘한 물기를 머금은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자의 그림자가 은서의 전신을 짓누르듯 드리워졌다. 시후의 단단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은서의 가녀린 턱끝을 단숨에 쥐어 올렸다.“새벽에 내 침대를 빠져나와, 혼자서 누구와 통신하고 있었지?”남자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의심과 분노가 한꺼번에 눈빛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고 시후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오빠를 위해 만들고 있었어요.”은서의 차분하고도 처연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친어머니가 오해했던 마터호른 광산의 에메랄드로, 오빠의 회장 취임을 축하할 세상에 단 하나뿐인 티아라를 깎고 있었을 뿐이에요.”시후의 눈이 모니터 아래 작은 단말기로 내려갔다. 은서는 손을 뒤로 숨기지 않았다. 숨기는 동작 하나가 지금의 거짓말보다 더 큰 의심을 만들 것 같았다.“그만하고 자.”“잠이 안 와요.”그가 도면을 닫으려 손을 뻗자 은서는 저장부터 눌렀다. 시후의 손이 허공에 남았다. 그녀는 그 짧은 틈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머니가 남긴 게 더 있으면 확인하고 싶지 않아요?”“무슨 말이지.”“그 유언장 말고도요. 살아 계셨을 때 하신 말씀이나 다른 기록 같은 거요.”시후가
자정 무렵,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베드룸.시후의 단단한 팔에 안겨 고른 숨소리를 듣던 은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짙은 암흑. 발목에 채워진 차가운 백금 앵클릿이 묵직하게 살결을 짓누르고 있었다.잠은 짧게 들었다 끊겼다. 은서는 눈을 감을 때마다 유언장에 적힌 자기 이름을 봤다. 어머니의 재혼을 따라 들어온 집에서 자신이 먼저 선택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가장 큰 잘못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에 붙었다.옆에서 시후가 몸을 뒤척였다. 깨어 있을 때 그렇게 단단하던 미간이 잠든 뒤에도 펴지지 않았다. 은서는 손을 뻗었다가 거뒀다. 쓰다듬어 준다고 그가 오래 붙잡은 문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그가 유언장을 진짜라고 믿는 한, 어머니를 거스르고 있다는 생각도 함께 남을 것이다. 은서는 자신이 사라지면 모든 일이 정리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밤이 깊어지자 자꾸 그쪽으로 기울었다.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 편지가 떠올랐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라고 했다. 지금 자신은 죽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느라 숨을 줄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억울해서 더 누워 있을 수 없었다.시후가 잠결에 팔을 조금 움직였다. 은서는 깨어났는지 보려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잠든 사람에게 질문을 쏟아낼 수는 없었다. 들으려 하지 않는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어려웠다. 그녀는 발끝을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내가 오빠 곁에 있는 한, 오빠는 평생 어머니의 저주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야 해…….’은서는 조심스럽게 시후의 긴 팔을 빠져나와, 실크 로브를 걸치고 프라이빗 스튜디오로 발걸음을 옮겼다.철컥.스튜디오 문을 닫고 들어선 순간, 세공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스위스 연방 은행 특수 위성 단말기가 푸른빛을 점멸하고 있었다.지직-비화 통신망이
시후가 문가에 멈춰 서자 은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은서는 손에 든 종이를 쥔 채 서 있었다.시후는 은서의 손에 들린 유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숨겨두었던 문서가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오빠…….”은서의 떨리는 손끝에서 시후 친모의 핏빛 유언장이 바스락거렸다.“오빠 친어머니가…… 날 저주하며 돌아가신 거예요? 날 이 방에 가두고 10년간 숨 막히게 감시한 이유가…… 이 저주 때문이었어요?”은서의 맑고 처연한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시후가 벼락처럼 성큼 다가와 은서의 손에서 유언장을 거칠게 낚아챘다. 남자는 서류를 금고 안쪽에 처박고 육중한 철문을 쾅 닫아버렸다.“어머니는 조수현과 강문혁의 추악한 이간질에 속아 정신착란 상태에서 돌아가셨다.”시후의 말끝이 떨렸다. 목소리를 낮추려 해도 숨이 고르지 못해 다음 말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네 어머니 서혜진 여사는 결백했다. 내가 누구보다 그 진실을 잘 알아.”“결백하다는 걸 알면서 왜 이걸 가지고 있어요?”은서는 닫힌 금고를 가리켰다. 시후의 얼굴에 피로가 깊게 내려앉았다. 그녀에게 들려줄 말과 들려주고 싶지 않은 말이 뒤엉킨 듯했다.“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글이다.”그 말을 듣고 은서는 금고 손잡이에서 시선을 떼었다. 남자는 없애지도 못하고 매일 눈앞에 두지도 못한 채 그 안에 넣어 둔 모양이었다.알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그 종이를 보지 못한 사람은 왜 자신이 미움을 받는지도 모른 채 같은 집에서 살아야 했다. 어머니마저 없는 집에
오전 9시,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베드룸.외부로 난 창문이 없어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방 안, 협탁의 스탠드 불빛만이 킹사이즈 침대 위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온몸에 시후가 새겨놓은 붉은 키스마크와 나른한 열병을 안은 채 눈을 뜬 은서의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남자의 긴 팔이 은서의 가느다란 허리를 빈틈없이 감싸 안고 있었다.시후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은서의 이마와 콧날, 그리고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깊고 달콤하게 훔쳤다.“잘 잤나, 내 아내.”은서는 그 호칭에 눈을 내렸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고 세상 앞에서 정리할 일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사적인 한마디는 너무 쉽게 아침을 달라 보이게 했다.“그렇게 부르면 다 끝난 것 같잖아요.”시후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싫은가.”“싫다는 말은 아니에요.”은서는 한참 머뭇거리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입에 익은 오빠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호칭 하나를 바꾸는 것도 이토록 어려운데, 남자가 부르는 아내라는 이름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건너뛰어져 있는 걸까. 그녀는 다음 말을 고르느라 컵 가장자리만 만졌다.은서는 이불 끝을 잡았다. 좋은 말에 기대었다가 또 자기 마음을 설명할 기회를 놓칠까 봐 겁이 났다. 시후는 그 망설임을 피곤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더 자도 된다고 했다.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가 물을 건넸다. 은서는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아침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시후의 낮고 다정한 중저음이 은서의 가슴을 저릿하게 울렸다. 남자는 은서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욕실의 대형 대리석 자쿠지로 데려갔다. 따스한 온수가 채워진 욕조 속에서, 시후는 스펀지로 은서의 가녀린 어
그날 낮, 은서는 스튜디오 모니터로 주총 중계를 보았다. 화면에 잡힌 시후의 얼굴은 방 안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발언을 듣고 손을 들어 순서를 정할 때조차 표정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투표가 끝나고 회장 추대가 확정되자 객석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은서는 박수를 치려다 손을 내렸다. 방 안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 났다. 그의 중요한 날을 같은 건물도 아닌 화면 속에서 보고 있었다.잠시 뒤 통신기에 연락이 왔다.— 끝났다.시후의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알려 주겠다는 말을 지켰다.“축하해요.”— 보고 있었나.“네. 넥타이 조금 돌아갔어요.”그가 화면 밖에서 넥타이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그려졌다. 짧은 침묵 뒤에 낮은 웃음이 들렸다. 은서는 그 소리가 좋아 잠시 말을 잊었다.전화를 끊고 저녁이 올 때까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반지를 만들고 남은 가루를 닦고, 흩어진 도구를 제자리에 놓았다. 시후의 반지가 그의 손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 자꾸 생각났다.그가 돌아오면 가까이 앉아 오늘 일을 듣고 싶었다. 그렇다고 방을 나가고 싶다는 말을 거둘 생각은 없었다. 시후가 그 둘을 같은 뜻으로 듣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연습하듯 문장을 고르는데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은서는 고개를 들었다.***철컥- 쿵!밤 11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창문 없는 방’.서경그룹 긴급 주주총회에서 단독 회장으로 추대되며 가문과 그룹 전체를 완벽히 손아귀에 넣은 강시후가 집무실 문을 잠갔다. 중앙 콘솔의 적색 레버가 내려가며, 45층으로 향하는 모든 비상계단과 전용 엘리베이터의 영구 락다운이 발동되었다. 외부의 그 어떤 빛도, 세상의 어떤 소음도 침범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