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재운의 제안 이후, 내 옥탑방은 작은 작업실이 되었다.
벽에는 악보가 빽빽하게 붙었고,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른 커피잔과 볼펜이 흩어져 있었다.
밤마다 기타를 무릎에 올리면, 손끝이 까맣게 닳아갔다.
하지만 머릿속은 더 지쳐갔다.
한 곡은 완성했지만, 나머지 두 곡은 여전히 반쯤만 열려 있었다.
가사는 자꾸 끊기고, 멜로디는 같은 곳에서 맴돌았다.
“오늘은 그만해.”
김한이 내 옆에서 말했다.
“아니에요. 이번 주 안에 세 곡을 완성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나는 기타 줄을 세게 눌렀다. 손끝이 아파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내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손목을 잡았다.
“멜로디는 숨 같아. 억지로 길게 내뱉으면 결국 끊기지.”
“…숨 같다고요?”
“숨은 들이마시고, 내쉬고, 또 들이마셔야 이어지잖아. 노래도 마찬가지야.”
그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고, 동시에 따뜻했다.
나는 결국 기타를 내려놓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음 날, 재운과의 미팅.
그는 녹음실에서 내 악보를 넘겨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너무 시적이에요. 사람들은 직설적인 가사를 원합니다.”
“직설적인…”
“예를 들어, ‘바람이 이름을 불러준다’ 대신 ‘너를 떠올린다’ 정도로. 말은 단순할수록 강하게 남아요.”
나는 펜으로 그의 말을 따라 적었지만, 마음 한쪽이 답답했다.
내가 쓰려던 말은 사라지고, 그의 말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기타를 꺼내자, 김한이 내 노트를 들여다봤다.
“‘너를 떠올린다’… 네 마음을 제대로 담은 건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더 쉽겠죠.”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허밍을 짧게 흘렸다.
은빛처럼 맑은 음이 방 안을 채웠다.
나는 저절로 손가락을 움직여, 다른 멜로디를 이어갔다.
“바람은 네 이름을 흘리고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네…”
노래가 끝나자, 나는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이게… 더 제 마음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그걸로 하면 되지.”
하지만 곧, 그의 손끝이 또다시 투명해졌다.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계속 하면… 당신 없어질 거잖아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
“괜찮아. 네가 내 목소리를 담아 불러준다면, 나는 네 노래 속에 남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방울처럼 떨어져 기타 위에 맺혔다.
며칠 뒤, 결국 세 곡은 완성됐다.
하나는 재운이 요구한 대로 직설적이고 현대적인 노래,
하나는 내가 오래 붙잡아 온 시적인 노래,
그리고 마지막 한 곡은, 김한과 함께 만든 노래였다.
세 곡을 나란히 두고 바라보자,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어느 곡이 진짜 내 노래일까?
내가 불러야 할 건 어떤 멜로디일까?
창가에 앉은 그는 조용히 허밍을 흘렸다.
“네 노래는 모두 네 노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맑았지만, 어쩐지 멀리 있는 듯했다.
세 곡을 손에 쥔 채 녹음실로 향하는 길, 심장은 마치 작은 북처럼 뛰고 있었다.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손에 든 악보는 어쩐지 뜨겁게 살아 있었다.
재운은 스튜디오 안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은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단정했고, 앞에 놓인 커피는 반쯤 식어 있었다.
“세 곡 준비됐나요?”
“네.”
나는 악보를 내밀며 숨을 고르려 했다.
그는 악보를 넘겨보다가, 하나하나 짚었다.
“이 곡은 좋습니다. 직설적이고, 리듬도 잘 맞아요.
두 번째 곡은… 너무 시적이에요. 대중성이 떨어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제 마음은 두 번째 곡에 더 가까운데요.”
재운은 잠시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수정 씨, 마음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음악은 결국 들려야 존재할 수 있어요.”
그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마지막 곡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잠시 멈췄다.
“이건… 누구랑 만든 건가요?”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혼자 한 건 아니에요. 가까운 사람이 도와줬어요.”
재운의 눈빛이 잠깐 흔들리더니,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
“묘하게 낯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끌립니다.”
그는 악보를 다시 넘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마 이 곡이, 수정 씨의 진짜 목소리일지도 몰라요.”
순간, 가슴이 세게 뛰었다.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옥탑방으로 돌아오자, 김한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대답을 들은 건지 알아챈 듯했다.
“그 남자가 뭐라 하던가.”
“…첫 곡은 좋다고, 두 번째 곡은 너무 시적이라고 했어요.
근데 마지막 곡은… 진짜 제 목소리 같다고.”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건 네 노래야. 우리가 함께 만든.”
“근데… 당신이 계속 사라지고 있잖아요.”
나는 그의 손끝을 붙잡았다.
빛이 스며드는 듯, 이미 손가락은 반쯤 희미했다.
“제발, 이제 그만…”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튜디오 인터뷰가 방송을 타고 나가자, 온라인 반응은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는 ‘남수정 인터뷰’, ‘어둠 속의 무대’, ‘관객 불빛 응원’이 줄지어 올랐다. SNS에는 관객들이 올린 영상이 순식간에 퍼졌고, ‘진짜 음악은 빛 없이도 살아남는다’라는 해시태그가 수천, 수만 건 공유됐다.라헬은 휴대폰 화면에 쏟아지는 반응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오래 쌓여온 업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이란과 함께 더 깊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재운은 옆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관객은 이미 우리를 선택했어. 이제 남은 건 업계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거지.”수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파장이 일렁였다. 무대를 마친 직후 느낀 기묘한 기운 때문이었다. 조명과 잡음에 휘말려 혼란스러웠던 순간, 잠깐이지만 아주 익숙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은 듯했다. 김한…? 그 이름이 무심코 떠올랐다.다음 날, 밴드 합숙실 겸 연습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은지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방해 증거를 잡아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엔 이란 측에서 오히려 역공할 수 있어요. 언론도 돈으로 움직일 수 있고.”민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신음했다.“그럼 계속 맞고만 있으라는 거야? 우리도 팬들이 있는데, 저쪽은 더러운 수로 계속 흔들고 있다고.”라헬은 모두의 시선을 모으며 차분히 정리했다.“증거를 내놓는 타이밍이 중요해. 지금 공개하면 단순한 폭로전으로 비칠 거야. 관객이 우리를 믿어주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단단히 버티는 거야.”수정은 묵묵히 듣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우리가 다시 무대로 증명하면 돼요. 이번엔 더 확실하게, 누가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게.”그 말에 모두가 잠시 침묵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밤, 옥탑방에 돌아온 수정은 기타를 품에 안았다. 무대와 인터뷰의 긴장이 끝나고 난 뒤, 홀로 남겨진 공간에서 오히려
본선 당일 아침, 공연장 주변은 이미 전쟁터 같았다. 수많은 팬들이 현수막을 흔들며 모여들었고, 방송국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기자들은 카메라를 치켜들고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 무대 뒤편에 마련된 대기실 복도에는 긴장과 흥분이 섞인 공기가 차올랐다.수정은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눈가에 묻은 작은 그림자를 지우듯 화장을 정리하면서도 살짝 떨렸다.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불안이 점점 몸을 잠식하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재운이 들어왔다. 기타 케이스를 등에 멘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담담했지만, 눈빛만큼은 불타고 있었다.“괜찮아?”그의 물음에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아니, 괜찮아져야지. 오늘은 우리만의 날이니까.”재운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 한, 누구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해.”그 말이 작은 주문처럼 심장에 박혀 들어왔다. 수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흔들림 대신 단단한 결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리허설 시간이 다가왔다. 밴드 멤버들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장비부터 점검했다. 드럼 스틱을 휘두르는 민호는 미세한 소리까지 귀 기울였고, 은지는 베이스 케이블을 일일이 확인했다. 재운은 기타 줄의 장력을 손끝으로 느끼며 세세하게 조율했다. 모두의 손길이 조급하면서도 치밀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무대 감독이 다급히 달려와 외쳤다.“조명 시스템이 먹통입니다! 전원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어요.”스태프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사이, 수정의 시선은 자연스레 라헬을 향했다. 그녀는 무대 뒤편 어둠 속에 서서, 눈빛으로 무언가를 읽어내듯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그녀는 낮게 말했다.“이건 단순한 고장이 아니야. 분명 누군가 손을 댔어.”은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또 서이란 측이지? 대체 끝을 보자는 거야 뭐야.”라헬은 손에 쥔 작은 메모리를 꺼내
베로나 공연이 끝나고도 환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SNS는 '역대급 순간', '관객이 만든 은하수 무대'라며 클립 영상을 퍼 나르기 바빴다. 그러나 무대 뒤편에서 그 빛과 열기는 닿지 않는 어둠 속, 수정은 검은 모자 여인의 시선을 느낀 채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봤어?”재운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분명 우리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어. 그냥 우연히 온 게 아니야.”수정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 직전 여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진실을 지켜내려면, 더 큰 거짓을 직시해야 해.”다음 날, 음악제 조직위원회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우리의 무대를 공식적으로 극찬했다.“기술적 문제와 전파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무대는 이번 음악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언론은 대서특필했고, 국제적 음악 평론가들조차 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하지만 그 기사의 말미에는 늘 빠지지 않는 문장이 붙었다. “그러나, 배후 세력의 방해 정황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재운은 신문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림자가 사라지질 않아. 아무리 무대를 성공시켜도, 보이지 않는 손이 계속 우리를 흔드는 거잖아.”수정은 대답 대신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베로나 거리에 울려 퍼지는 카니발 음악이 한때의 축제를 알리듯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묶여 있었다.밤이 깊자, 수정은 홀로 원형극장 주변을 거닐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관객이 떠난 극장은 고요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만이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그때, 그림자 속에서 여인이 걸어나왔다. 검은 모자 아래의 얼굴은 처음보다 뚜렷했지만, 여전히 낯설고 차가웠다.“왜 자꾸 우리 앞에 나타나는 거예요?”수정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물었다.여인은 대답 대신 작은 휴대용 장치를 꺼내 보여주었다. 스크린에는 공연 당시 교란 신호가 발신된 좌표와 시간이 찍혀 있었다. 수정의 눈이 커졌다
국제 음악제가 열리는 이탈리아 베로나. 고대 원형극장이 개막 공연의 무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한때 검투사들이 싸웠던 자리에, 이제는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펼칠 차례였다. 수정과 밴드가 도착했을 때, 벌써 수많은 기자와 팬들이 몰려들어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매니저가 입구를 통과하며 낮게 말했다.“조심해야 해. 이미 도착 전부터 언론이 우리 동선을 실시간으로 따라붙고 있어.”재운은 드럼 케이스를 힘겹게 메고 있으면서도 주변을 매서운 눈빛으로 훑었다.“카메라보다 무서운 건, 그들 틈에 섞여 있는 낯선 얼굴들이야.”실제로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객석 준비 구역에서 검은 모자를 눌러쓴 여인의 모습이 다시 포착된 것이다. 리스본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그 시선. 이번에도 마치 모든 걸 관망하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의 옆에 낯선 남성이 동석해 있었고, 뭔가를 속삭이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리허설이 시작되자 긴장이 더해졌다. 고대 극장의 음향은 웅장했지만, 동시에 작은 울림도 증폭시켰다. 처음 마이크를 잡은 수정의 목소리가 관중석 끝까지 닿자, 순간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러나 이어진 현악 파트가 예상보다 한 박자 늦게 들어오면서 전체 리듬이 삐걱거렸다.지휘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연주를 멈췄다.“이대로라면 개막 무대에서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고 있어요.”재운이 드럼 스틱을 내려놓으며 불만을 드러냈다.“우린 늘 박자 안에 있어요. 그런데 클래식식의 계산된 리듬만 요구하면… 우리 색깔이 다 죽습니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수정은 갈등을 더 이상 키우지 않으려 기타를 메고 무대 중앙으로 나섰다.“한번만 제 방식으로 맞춰볼게요.”그녀는 베이스와 드럼이 단단히 박자를 고정한 위에 기타로 단순한 코드를 깔았다. 그 위로 오케스트라가 점차 합류하면서 서서히 하나의 곡이 완성되었다. 첼로가 깊은 울림으로 드럼과 호흡을 맞췄고, 바이올린은
리스본 공연 후 일주일, 우리의 이름은 단순한 음악팀이 아니라 ‘논란의 중심’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전 세계 음악 기사 헤드라인에 걸렸다. 유명 음악 잡지는 “폭발을 이겨낸 무대”라는 제목으로 우리를 다루었고, 동시에 타블로이드지는 “위험을 연출한 스타”라는 선정적인 문구를 달았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우리를 입에 올리고 있었고, 그 말들이 꼬리를 물며 커져갔다.새벽 호텔 로비, 매니저가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나타나며 중얼거렸다.“전화만 백 통 넘게 받았어. 국제 방송 출연 요청,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 심지어 다국적 음반사까지…”그는 종이컵을 수정 앞으로 밀며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문제는, 그 안건 대부분이 진실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자극을 소비하려는 거야.”재운이 그 말을 듣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니까 우릴 다시 이용하겠다는 거잖아. 공연에서 목숨 걸어가며 버틴 건 결국 또 다른 쇼로 소비될 뿐이고.”그의 어조에는 분노와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수정은 커피를 입에 대지 않고 두 손으로만 감싸며 말했다.“우리가 뭘 보여줄지 선택하면 돼. 주어진 무대를 다 거절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누군가의 입맛대로 편집된 ‘스토리’ 속에 갇히진 않겠어.”며칠 뒤, 런던의 한 대형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었고, 이 자리를 통해 우리는 ‘논란의 중심’에서 ‘실력 있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송국의 프로듀서는 선정적인 질문으로 게스트를 몰아세우는 것으로 유명했다.회의 자리에서 매니저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이 무대를 거절하면 ‘도망쳤다’는 낙인이 찍힐 수 있어요. 하지만 수락한다면, 공격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이에요.”재운은 곧장 반대했다.“가면 또 그들의 프레임에 말려들 거야. 기자들이 원하는 건 네가 흔들리는 모습, 네가 눈물 흘리는 순간이지. 음악은 뒷전일 거야.”수정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차분하
스페인의 무대가 끝난 직후, 우리는 곧바로 리스본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여정 동안 이미 지쳐 있었지만, 이번 도시에서의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유럽 투어의 전반부를 마무리 짓는 상징적인 자리였고, 언론은 이 무대를 통해 나의 진짜 실력을 검증하겠다는 듯 몰려들었다.포르투갈 특유의 바닷바람이 공항을 스칠 때부터,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도시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압박이 온몸을 짓눌렀다. 호텔 체크인을 마친 뒤, 현지 팬들이 몰려와 응원을 외쳤지만 그 뒤편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 하나가 귓가에 박혔다.“진짜일까? 아니면 다 연출된 쇼일까?”돌아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군중 속으로 사라져 있었다.리허설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사운드 엔지니어는 몇 번이고 장비를 다시 점검해야 했다.“신호가 간섭을 받아요. 마드리드 때처럼 누군가 고의로 주파수를 교란시키는 것 같습니다.”그 말에 재운은 드럼 스틱을 손에 꽉 쥐고 말했다.“이젠 분명해. 이란 쪽이 전문 기술자를 붙인 거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의도적인 공격.”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우리가 흔들리면 그들의 의도가 성공하는 거야. 무대에서 보여줄 수밖에 없어.”재운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는 끝까지 노래로만 싸우려고 하지. 그런데 가끔은… 네가 무모해 보여서 겁난다.”그 말이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무모하다는 지적은 처음 받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내 목소리 대신 내 안전을 먼저 걱정한다는 사실에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표현할 겨를도 없이 리허설이 다시 시작되었다.공연 당일, 객석은 이미 만원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공연장 특성상 바람이 무대 안으로 밀려 들어와 마이크에 작은 소음을 남겼다. 나는 그조차도 음악의 일부처럼 삼아버리기로 했다.첫 곡은 의도적으로 담담한 발라드로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관객은 낯선 언어에도 불구하고 집중해주었고, 고요한 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