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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Author: 유승안
그 뒤로 며칠 동안 소은은 밖에 나가지 않았고 책방에 틀어박혀 밀린 학업을 보충하는 데 매진하였다.

학당에 돌아가기 며칠 전이 되어서야, 장명희를 따라 심원으로 가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게 되었다.

진원은 고금란의 처소로 양옆으로 계수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비록 계수꽃은 이미 시들었으나 은은한 향기는 여전히 마음을 맑게 해주어 ‘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할머니."

소은은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우리 소은이 왔구나. 어서 이리 와서 앉거라."

소은이 다가가 자리에 앉자 고금란을 시중들던 시녀가 손난로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고금란은 손녀를 찬찬히 살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얼굴에 혈색이 도는게 제법 사람 같구나."

곁에 있던 장명희가 웃으며 덧붙였다.

"며칠 뒤면 다시 학당에 들어가야 하오니 오늘은 일부러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온 것이옵니다."

이에 고금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듯 말씀하셨다.

"몸이 이제 막 좀 나아졌는데, 그리 서두를 필요 있느냐?"

그러자 장명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아뢰었다.

"석 달 뒤면 육예 시험이 있사옵니다. 소은이는 아직 사격 수준이 미흡하여 서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공부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평범한 여인이라면 ‘무재도덕’이라 하여 재능을 갖추지 않아도 흠이 아니지만, 경성의 귀한 집 딸들은 예외라 예절, 음률, 사격, 말타기, 서예, 산술 이 여섯 가지를 통과해야 했다.

어느 집 아씨가 육예에 능하지 못하다면, 그 집안은 사람들 입에 마구 오르내리기 십상이었고 반대로 육예에 뛰어나면 인재라 칭송받으며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다.

전생에서 이맘때, 소은은 병약한 탓에 사격과 말타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인재로 뽑히지 못하였다.

혼인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강준과 함께 말을 타며 활 쏘는 법을 익혔고 그 실력 또한 제법이었으니 이번 생에는 제대로 도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금란은 평소 국공부의 체통과 명예를 가장 중요히 여겼다. 게다가 육예를 통과하지 못하면 귀한 집 자제로서 혼처조차 얻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말리지 않았지만 안쓰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저는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소은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정히 위로하였다.

고금란은 그녀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괜찮다면서, 요 며칠은 어찌 내게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느냐?"

꾸짖는 듯하였으나 말투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늘 마음은 할머니 곁에 있었지요. 다만 밀린 공부가 너무 많아 책방에서 빠져나올 틈이 없었을 뿐이에요."

고금란은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당부하였다.

"이번엔 꼭 사예를 통과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고개조차 못 드는 일은 없어야 하느니라."

소은은 할머니가 국공부의 체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진지한 얼굴로 약속했다.

"꼭 좋은 성적으로 돌아올게요, 할머니."

고금란은 만족스러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 미향에게 다과가 있는 곁방으로 소은을 안내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장명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선왕부에 간다 들었는데 나도 준비한 것이 있으니 함께 가져가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장명희는 공손히 답했다.

"네 서방이 국공부의 작위를 잇지 못한 이상, 앞날을 개척하려거든 벼슬길 외엔 달리 방도가 없을 터. 지금 선왕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어 철주나 셋째가 출세하려면 선왕부를 거치지 않을 수 없으니, 예의를 게을리할 수 없지 않겠느냐? 내가 친히 챙겨야 진심이 전해질 것이다."

고금란이 말한 ‘셋째’는 바로 장명희의 아들이자, 소은의 오라버니 ‘소혁’이었다.

"마음 써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장명희는 겉으론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고금란이 이번 일로 챙기려는 것이 비단 이방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대방 또한 선왕부와 인연을 맺기를 바라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소국공부가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방은 예전부터 소윤을 선왕부에 시집보내고자 했고, 그 일로 참 많은 공을 들였으나 눈이 높은 선왕부인에게 퇴짜를 맞았다.

세자 강준 또한 소윤에게 전혀 마음이 없음을 드러낸 바 있었다.

소윤은 소국공부 정실 자제였고 용모도 수려하고 재능 또한 뛰어났다.

자존심이 강한 소윤조차 강준에게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여달라며 편지를 써 보낼 만큼 자신을 낮추었지만, 강준은 단 한 줄의 회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소윤은 한동안 상심이 깊었고 결국 위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대방은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지만 장명희는 이미 그 내막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소은이도 내년이면 계례를 올리게 될 텐데, 상대를 생각해 보았느냐?"

고금란이 문득 장명희에게 묻자, 장명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슬쩍 말을 돌렸다.

"학업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아픕니다. 어찌 그 와중에 혼사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겠사옵니까? 계례 마치고 나서 천천히 고민해도 늦지 않사옵니다."

그러자 고금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소은이의 혼사는 소국공부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일이니 네가 깊이 고민해야 하느니라."

장명희는 미소 띠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속으로 단호히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소은을 소국공부의 발판으로 삼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소은은 마차에 올라서야 움츠러들었던 몸이 조금 펴졌다.

진영주 부인이 친정을 방문한 탓에 오늘은 선왕부만 방문하면 되는 날이었다.

"오늘은 옷차림이 단정하구나."

장명희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화려한 장신구는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어머니께서 하시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소은은 두 사람 관계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다른 이가 틈을 노릴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장명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네 아비 마음이 어디 나한테 있더냐?"

"아버지는 풍채도 좋고 기품도 있으신 분이신데 정말로 그 여인을 마음에 두셨다면 어찌 그 여인에게 다른 사내가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아버지께서 그 여인을 들인 것도, 할머니의 강요가 있었기에 억지로 받아들인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지금처럼 데면데면하신다면 할머니께서 또다시 아버지께 첩을 들이라고 하실 겁니다."

소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나 늘 차가운 얼굴로 마주하는 어머니를 보면 그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은은 아버지가 한 번도 그 여인의 방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말해버리면 어머니가 충격받을 것이 뻔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눈길 한 번 주시면 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말거라."

장명희는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속으론 이미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지아비가 자기편에 서야 자식들의 앞날 또한 자신이 주도할 수 있을 터였다.

반 시진 후, 마차는 선왕부 앞에 멈춰 섰다.

선왕부는 황제가 친히 하사한 저택으로,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장안가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처마와 기둥 곳곳엔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붉은 담장과 빛나는 유리기와가 햇살 아래 찬란히 반짝이고 있어 웅장하면서도 우아함도 잃지 않았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소은과 장명희는 왕부에 들어섰다. 작은 화원을 지나니 양옆 가득 피어 있는 꽃들 덕분에 은은한 꽃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더 깊숙이 들어가니, 그곳엔 의란정이 있었고 그곳에서 선왕부인을 마주하게 되었다.

곁에는 선왕의 친동생의 부인 즉 둘째 강민의 생모, 이순미가 함께 있었다.

선왕부인은 마흔 즈음의 나이였다.

그녀의 옷차림은 매우 평범했지만, 이목구비는 유난히 화려하였다.

강준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왕부인은 소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년 만에 마주한 이 아이는 어느새 모란처럼 봉오리를 틔웠고, 몸매는 버들가지가 바람에 스치듯 가녀렸다.

두어 해만 더 지나면, 그야말로 절세 미녀가 될 터였다.

하지만 너무 돋보이는 여인은 오히려 화가 되기도 한다.

남자란 본디 미색에 약한 법. 그 때문에 선왕도 젊은 시절 많은 기회를 놓쳤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이가 바로 선왕부인이었다.

그 시절은 그녀에게 달콤한 기억일지 몰라도 자기 자식이 아비와 같이 늪에 빠지는 건 원치 않았다.

"갈수록 고와지는구나."

선왕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인이 아무리 곱다 한들, 결국 중요한 것은 학문과 덕성이지요."

장명희는 겉으론 담담히 말했으나, 속으론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전생에 소은의 시어머니였던 선왕부인은 강준의 냉대로 인해 소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그녀에게 은근히 마음을 써주었고 그로 인해 소은도 진심으로 따르게 되었다.

"부인께서 얼마 전 발진이 나셨다하던데 지금은 괜찮으신지요?"

하지만 선왕부인은 그다지 감흥 없는 눈빛으로 받아쳤다.

그녀 눈에는 이것이 순수한 걱정이 아닌, 뭔가 바라는 바가 있어 건네는 아첨처럼 보였다.

"이제 거의 나았느니라. 헌데, 어찌 내가 발진이 났다는 걸 알았느냐?"

소은은 이미 대비책을 세워 두었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어의께 진맥을 받았을 때, 왕부에서 막 오시는 길이라 하시어 여쭈었고, 그때 이 일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선왕부인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장명희와 집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심심하면 우리 집 시녀들과 함께 정원을 둘러보아도 되느니라. 춘자야, 아씨를 잘 모셔라."

선왕부인이 시녀를 불렀다.

소은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리고 춘자를 따라 뒷마당으로 향하였다.

선왕은 꽃과 나무를 유난히 사랑했기에 정원에는 화초의 종류도 다양하고 관리도 잘 되어 궁궐 못지않은 풍경을 자랑하였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왕부는 여전히 생기로 가득하였다.

다만 소은에게는 삼 년을 몸담았던 곳인지라 그토록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지냈던 별당, 경화거를 지나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수많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곳은 세자의 침소입니다."

춘자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세자께서는 그다지 조용한 걸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유독 저 고요한 정원을 직접 골랐습니다. 그 때문에 부인님께서 늘 농을 건네시곤 합니다. ‘훗날 세자빈을 위해 골라둔 곳이겠지’ 하고 말입니다."

소은은 경화거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러한 정취를 좋아할 인물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 심씨 가문의 아가씨일 것이다.

선왕부인도, 강준도 왕부에 들어올 이가 그 여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여인이 아니었다.

"저기 올라 구경해보시겠습니까?"

춘자는 가산을 가리키며 소은에게 물었다.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가산에 소은은 살짝 놀랐다.

‘여기까지 걸어오게 될 줄이야!’

바로 그곳에서 그녀가 낙상 사고를 당했었으니 자연스레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아씨?"

춘자가 그녀의 눈길이 흐려진 걸 보고 조심스레 불렀다.

"아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 썩 내키지 않는구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녀는 소중히 여겨했다.

...

가산 위에서는 강준과 강민 형제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석탁 자리에서는, 막 자리를 뜨는 소은의 뒷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 방금 저 모습은 어딘가 상심한 듯한 표정인데?"

강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강준은 백 자 한 점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난 도리어, 저 아씨가 어찌 이리 왕부의 길을 훤히 아는지 그게 궁금하구나."

강민도 조금 전 정원에 들어설 때, 인도하는 시녀보다 앞서 걷고 있었던 소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길을 헤매지 않았다.

강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강준이 스무 살이 되기 전 한 번은 어느 한 여인이 하인을 매수하여 왕부의 원림 배치도를 손에 넣고는 연회가 열리던 틈을 타 강준의 침소로 숨어든 일이 있었다.

그 여인은 강준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씌워 억지로 책임을 지게 하려는 속셈이었으나 다행히 계략이 들통이 나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소국공부에서 마음을 굳힌 듯하군. 둘째도 모자라 이제는 넷째까지 들이미는 걸 보면 말이야."

강민이 코웃음을 쳤다.

강준은 그를 흘깃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왕부에 자제가 나 하나뿐이더냐?"

강민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조심할 테니 형도 경계를 늦추지 마. 괜히 저 여인에게 코 꾀어선 안 돼."

소철주는 황제의 미움을 사고 있는 데다 사황자의 책사로도 얽혀 있어 그를 처단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은 작은 빌미 하나로도 큰 화가 될 수 있었으니 절대 엮여선 안 되는 일이었다.

"허나 소국공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둘째는 국공의 적녀라 치더라도, 넷째는 이방 자제에 재주도 많이 떨어지지 않아? 둘째도 마다한 판에, 넷째를 들이밀어?"

강준은 불현듯 며칠 전 받은 그 방탕한 화첩이 떠올랐다.

소은이라는 여인은,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데 꽤나 능한 듯했다.

하지만 그런 재주는 어디까지나 정숙한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강민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 생각엔, 심씨 가문의 둘째 아씨와의 혼사를 정식으로 매듭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밤이 길어지면 괜한 꿈만 많아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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