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전하.”“말하거라.”“중전마마께서는 연화와 옥분의 일을 알고 계셨사옵니다.”도겸의 걸음이 느려졌다.서령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소인이 전하의 침전에 드는 일을 삼가면 두 사람에게 불필요한 화가 줄어들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소인도 알고 있사옵니다.”도겸의 얼굴이 굳었다.“그대에게 그런 말을 하였느냐?”“예.”서령은 눈을 내리깔았다.“전하를 은애하는 일이 두 사람을 더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저는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도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품에 안긴 서령은 왕의 팔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도겸은 그녀를 내려놓지 않았다.“서령아.”그가 낮게 불렀다.“그대가 나를 은애한다는 이유로 누구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대의 마음을 빌미로 다른 이를 해치겠다는 자가 있다면, 그 잘못은 그자에게 있다.”서령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연화와 옥분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만 구해 주시지 마시옵소서. 그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도 알아봐 주시옵소서.”왕은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그리하마.”서령은 그 대답을 듣고도 곧장 안심하지 못했다.도겸은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여러 번 기다리라 말했기 때문이다.“이번에는 그대에게 말만 남기지 않겠다. 연화의 안위와 옥분의 처지를 확인하게 하고, 확인한 사실을 그대에게도 알려 주마.”서령의 눈가가 붉어졌다.“정말이시옵니까?”“내가 그대에게 약조하였다.”도겸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안았다.“그러니 지금은 네 몸부터 돌보자꾸나.”***침전에 도착하자 도겸은 서령을 직접 자리에 눕혔다.내관들이 급히 방석과 이불을 가져왔고, 궁녀들은 따뜻한 물과 깨끗한 천을 준비했다.도겸은 서령의 발끝에 닿은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걷었다.무릎 아래가 붉게 부어 있었고, 종아리에는 형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령은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중궁전에서
“누군가 물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씀은 처음 듣사옵니다.”도겸은 상궁들을 돌아보았다.“누가 서령에게 물을 주려는 궁인을 막았느냐?”뜰에 엎드린 상궁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한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소인이옵니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일어나라 명하시지 않았기에…….”도겸은 그 상궁을 바라보았다.“내가 물을 주지 말라 하였느냐?”“아니옵니다.”“중전이 직접 그리 명하였느냐?”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도겸은 서늘하게 말했다.“궁중의 법도를 들먹이면서 제멋대로 사람을 해치는 자는 법도를 말할 자격이 없다.”왕은 호위 무관에게 고개를 돌렸다.“오늘 서령에게 매를 든 자와 형벌을 집행한 자들을 모두 조사하라. 누가 무엇을 명하였고, 누가 그 명을 어떻게 집행하였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라.”호위 무관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정난희가 한 걸음 내려왔다.“전하, 중궁전의 사람을 이리 다루시면 소첩의 체면은 어찌 되겠사옵니까?”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대의 체면이 이 아이의 피보다 중하더냐?”정난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소첩은 국모이옵니다.”“알고 있다.”도겸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대가 이 나라의 중전이라는 사실을 내가 어찌 잊겠느냐. 그러니 더욱 묻는 것이다. 중전의 권위란 힘없는 궁인을 사람들 앞에 무릎 꿇려 증명해야 하는 것이더냐?”정난희는 입술을 깨물었다.“전하께서는 고작 나인 하나 때문에 중전의 권위를 짓밟으시겠다는 것이옵니까?”도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고작?”그 한마디에 뜰의 공기가 얼어붙었다.도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내게는 고작 나인 하나가 아니다.”정난희의 눈이 흔들렸다.“전하…….”“그대가 이 아이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내 앞에서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왕은 한 걸음 다가갔다.“내가 그대를 중전으로 대우하는 것은 궁중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 법도를 이용해 내 사람을 해치는 일을 허락했다는 뜻이 아니다.”정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도겸
서령은 처음에 발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오랫동안 매를 맞고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귀 안쪽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고, 눈앞의 돌바닥도 자꾸만 흔들리는 듯했다.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궁인들이 일제히 엎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전하 납시오!”서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회랑 끝에서 도겸이 걸어오고 있었다.검은 곤룡포의 금빛 용이 햇빛 아래 선명하게 빛났으나, 왕의 얼굴에는 분노를 드러내는 기색조차 없었다.그럼에도 그를 맞이한 상궁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도겸은 서령을 보았다.뜰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인.피로 젖은 손바닥과 붉게 번진 치맛자락, 형장의 흔적이 남은 종아리.그리고 자신을 보며 겨우 고개를 드는 얼굴.도겸은 걸음을 멈췄다.서령은 입술을 달싹였다.“전하…….”도겸은 곧장 그녀 앞으로 다가와 아무 말 없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궁인들 사이에서 억눌린 숨소리가 터졌다.왕이 돌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것이었다.도겸은 서령의 손을 잡았다.손바닥에 묻은 피가 자신의 손가락에 번지자 그는 그 붉은 흔적을 한참 내려다보았다.“누가 이리 만들었느냐?”서령은 대답하지 못했다.도겸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서령아. 나를 보아라.”서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으나 그의 얼굴이 흐릿했다.“전하께서 어찌 이곳까지…….”도겸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서령의 허리와 어깨를 받쳐 일으키려 하자 그녀가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고, 왕의 손은 즉시 멈췄다.“다리가 아프냐?”서령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일어서려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도겸은 즉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전하!”서령은 놀라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도겸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일어섰다.“가만히 있거라. 네가 더는 이 돌바닥에 발을 딛지 않게 할 것이다.”서령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왕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버티고 있었는지 깨달았고,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도겸은 서령을 더욱
정난희는 쓰러진 서령을 한참 바라보았다.최 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마마, 저 아이가 더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하옵니다.”중전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죽기라도 하였느냐?”“그것은 아니오나…….”“그렇다면 아직 배울 것이 남았겠구나.”최 상궁은 입을 다물었다.정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령에게 다가갔다.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몸을 굽혀 서령의 귀 가까이 속삭였다.“서령아. 네가 오늘 이리 된 까닭을 알겠느냐?”서령은 힘겹게 눈을 떴다.“마마…….”“네가 전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서령의 눈빛이 흔들렸다.“전하께서 너를 아끼실수록 너는 더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은 내가 네게 법도를 가르쳤지만, 내일은 누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서령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정난희는 말을 이었다.“연화도, 옥분도, 오늘 네게 물을 주려 했던 아이도 마찬가지다. 네가 그들을 아낀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이 얼마나 안전할 것 같으냐?”서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중전은 그 반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니 네가 진정 그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면, 전하의 곁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서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입술이 떨렸으나 끝내 고개를 저었다.“마마…….”“아직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소인이 전하를 은애하는 마음을 버린다고 하여, 마마께서 그 아이들을 반드시 지켜 주시겠사옵니까?”정난희의 표정이 굳었다.서령은 숨을 골랐다.“마마께서는 오늘 소인에게 벌을 내리셨사옵니다. 그러나 소인이 물러나면 연화와 옥분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조는 하지 않으셨사옵니다.”중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네가 감히 나를 의심하느냐?”서령은 고개를 숙였다.“소인은 마마께 거짓 약조를 청하고 싶지 않사옵니다.”그 말에 정난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령은 더 이상 몸을 가눌 힘이 없었지만 중전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물러나면 모든 사람이 안전해질
다시 형장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손바닥이 돌에 쓸리고 팔꿈치가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회랑 아래에서 누군가 작게 비명을 삼켰다.정난희는 그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누가 감히 소리를 내었느냐?”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중전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서령에게 눈을 돌렸다.“일으켜라.”상궁 둘이 서령의 팔을 붙잡았다.서령은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다시 기울자 상궁들이 양쪽에서 붙들었다.“마마…….”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정난희는 서령을 내려다보았다.“전하께서 너를 그리도 아끼신다지. 그런데 어찌 아직도 오시지 않는 것이냐?”중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왕의 총애라는 것이 참으로 덧없구나. 네가 이리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정사를 보고 계시니 말이다.”서령은 눈을 감았다.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도겸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는지 매 순간 알 수는 없었다.그 사실을 서령도 알고 있었으나, 알고 있는 것과 견디는 것은 달랐다.그녀는 피 묻은 손으로 돌바닥을 짚었다.“전하께서는…….”말을 잇지 못하자 정난희가 몸을 기울였다.“무엇이라 하였느냐?”서령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전하께서는 소인을 속이지 않으실 것이옵니다.”정난희의 눈빛이 번뜩였다.“아직도 그리 믿느냐?”서령은 대답하지 않았다.중전은 차갑게 웃었다.“그렇다면 끝까지 믿어 보거라.”***형벌은 그 뒤로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중전은 서령이 쓰러질 때마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게 했다. 허리를 세우지 못하면 불손하다 꾸짖었고, 고통을 참느라 고개를 숙이면 중전의 얼굴을 피한다고 나무랐다.서령은 어느 순간부터 형장이 내려오는 소리보다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두려워졌다. 상궁이 팔을 움직이는 기척만으로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손바닥에는 피가 말라붙었고, 무릎 아래로는 치맛자락이 젖어 들었다. 종아리
정난희가 가져오게 한 것은 작은 문서 한 장이었다.서령은 처음에 그 문서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중전은 상궁에게 그것을 펼치게 한 뒤 서령의 발치에 떨어뜨렸다.“읽어 보거라.”서령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먹으로 적힌 글자 사이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연화.서령의 가슴이 내려앉았다.“마마…….”“네가 그토록 걱정하는 아이의 이름이 맞느냐?”“그러하옵니다.”“독향 사건에 연루되어 격리되었다지.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처분도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다.”정난희는 서령의 얼굴을 살폈다.“조사가 길어지면 어린아이에게는 참으로 고된 일이겠구나. 누구 하나 찾아오지 못하고, 언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 채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서령은 두 손을 모았다.“부디 연화의 억울함을 살펴 주시옵소서.”“내가 어찌 그 아이의 억울함을 아느냐. 아직 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서.”중전은 웃음을 지웠다.“다만 내가 관심을 두면 조사가 더욱 엄격해질 수도 있겠지.”서령의 숨이 멎는 듯했다.정난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네가 전하의 침전에 드는 일을 스스로 삼간다면, 나 또한 그 아이의 일에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서령은 문서 위에 적힌 연화의 이름을 바라보았다.그 아이는 어둠을 무서워했다. 향방에서 함께 지내던 때에도 늦은 밤 혼자 창고에 들어가기를 꺼렸고, 겨울이면 손등이 갈라져도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서령이 따뜻한 물을 건네면 두 손으로 그릇을 감싸 쥐고 웃던 아이였다.그 아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서령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마마, 소인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소인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그렇다면 전하의 침전에 들지 않겠다고 말하거라.”서령은 입술을 깨물었다.“그것은 소인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정난희의 얼굴이 굳었다.“아직도 그 말을 하느냐?”“전하께 거짓을 아뢸 수는 없사옵니다.”중전은 한동안 서령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