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문을 불태운 밤

열녀문을 불태운 밤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21
By:  월야In-update ngayon la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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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죽자 시댁은 서하경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했다. 혼수는 빼앗고, 방문은 잠갔으며, 그녀의 정절을 가문의 출세에 팔아넘겼다. 열녀문이 세워지는 밤, 하경은 그 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다. 그녀를 태운 것은 팔도의 상권을 쥔 냉혹한 거상 백도겸의 마차였다. “내 곁에 있으시오. 대신 누구의 열녀도 되지 마시오.” 위험한 사내의 보호 아래 하경은 빼앗긴 재산과 삶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서명이 찍힌 장부가 나타나고, 도겸마저 그녀의 혼인에 얽힌 비밀을 숨기고 있다. 남편은 가두려 하고, 도겸은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한다. 하경은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는 순간, 하경은 다시 누군가의 소유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랑마저 제 손으로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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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1화

서하경은 제 이름이 새겨진 열녀문에 불을 질렀다.

죽은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하겠다며 세운 문이었다. 그러나 하경은 그런 맹세를 한 적이 없었다.

삼 년 전, 남편 윤시헌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하경은 관 앞에서 정신을 잃었다. 사흘 만에 겨우 눈을 떴을 때는 그녀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퍼져 있었다.

시어머니 정씨 부인이 퍼뜨린 말이었다.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지아비를 사랑했던지, 남편 없는 세상에서는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다더구나.”

정씨는 문상객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사람들은 그런 며느리를 둔 윤씨 집안의 덕을 칭송했다.

정작 하경에게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자 정씨는 하경의 혼수 장부부터 가져갔다. 안채 밖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고, 친정에서 보내온 편지는 시어머니의 손을 거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상중이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정씨는 하경이 얌전히 지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장터에 나가겠다고 하면 남편 잃은 여자가 밖을 돌아다닌다고 꾸짖었고, 친정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면 죽은 남편보다 친정이 더 중요하냐며 사흘씩 끼니를 끊었다.

하경이 직접 관리하던 혼수 창고도 어느 날부터 잠겨 있었다.

남색 비단 열두 필이 사라졌을 때 정씨는 좀이 슬어 버렸다고 했다. 은전이 없어진 까닭을 묻자 남편의 장례에 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정어머니가 마련해 준 장신구와 값비싼 약재까지 하나둘 자취를 감췄지만, 하경에게 남은 것은 확인할 권리조차 없었다.

그래도 삼년상이 끝나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참아 보려 했다.

그러나 윤씨 집안은 그녀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열녀문을 세웠다.

살아 있는 여자의 이름을 새겨 놓고, 남은 평생을 죽은 남편에게 바치라는 문이었다.

그리고 열녀문 제막식이 끝난 그날 밤, 하경은 자신이 이 집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무릎 꿇어라.”

사랑채 앞마당에 정씨 부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경은 두 하인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초겨울의 밤공기가 얇은 상복 사이로 스며들었고, 급히 끌려 나오느라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발끝은 이미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화로 앞에 앉은 정씨는 두툼한 비단 솜옷에 모피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 곁에서는 시동생 윤시율이 술잔을 기울였다. 얼마 전부터 노름판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씨는 둘째 아들의 허물을 입에 올리는 사람부터 내쫓았다.

“어머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하경이 조용히 묻자 정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오늘 낮에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었느냐? 열녀문 제막식에서 사람들 앞에 웃음을 보이지 않았더냐.”

“관아에서 나오신 분께서 말씀을 건네시기에 예를 갖춰 답했습니다. 그뿐입니다.”

“남편을 잃은 여자가 웃었다는 사실이 문제다! 사람들이 네 속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정씨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시율이 술잔을 내려놓고 능글맞게 웃었다.

“어머니, 형수님도 아직 스물넷 아닙니까. 남편 없이 삼 년이나 지냈으니 밤마다 외로우실 만도 하지요.”

하인들 사이에서 억눌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경은 시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련님, 죽은 형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시율의 웃음이 비틀렸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일어나 하경에게 다가왔다. 술 냄새가 얼굴 가까이 풍겼다.

“형수님이야말로 남편의 이름을 팔아 재물을 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어머니께 장부를 내놓으라고 하셨다면서요.”

하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 친정에서 가져온 물건이니 제가 확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말에 정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도 그 장부 타령이냐?”

“남색 비단 열두 필과 은전, 약재와 장신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 혼수 장부를 돌려주십시오.”

정씨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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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서하경은 제 이름이 새겨진 열녀문에 불을 질렀다.죽은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하겠다며 세운 문이었다. 그러나 하경은 그런 맹세를 한 적이 없었다.삼 년 전, 남편 윤시헌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하경은 관 앞에서 정신을 잃었다. 사흘 만에 겨우 눈을 떴을 때는 그녀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퍼져 있었다.시어머니 정씨 부인이 퍼뜨린 말이었다.“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지아비를 사랑했던지, 남편 없는 세상에서는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다더구나.”정씨는 문상객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사람들은 그런 며느리를 둔 윤씨 집안의 덕을 칭송했다.정작 하경에게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장례가 끝나자 정씨는 하경의 혼수 장부부터 가져갔다. 안채 밖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고, 친정에서 보내온 편지는 시어머니의 손을 거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처음에는 상중이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하지만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정씨는 하경이 얌전히 지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장터에 나가겠다고 하면 남편 잃은 여자가 밖을 돌아다닌다고 꾸짖었고, 친정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면 죽은 남편보다 친정이 더 중요하냐며 사흘씩 끼니를 끊었다.하경이 직접 관리하던 혼수 창고도 어느 날부터 잠겨 있었다.남색 비단 열두 필이 사라졌을 때 정씨는 좀이 슬어 버렸다고 했다. 은전이 없어진 까닭을 묻자 남편의 장례에 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친정어머니가 마련해 준 장신구와 값비싼 약재까지 하나둘 자취를 감췄지만, 하경에게 남은 것은 확인할 권리조차 없었다.그래도 삼년상이 끝나면 달라질 줄 알았다.그때까지는 참아 보려 했다.그러나 윤씨 집안은 그녀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열녀문을 세웠다.살아 있는 여자의 이름을 새겨 놓고, 남은 평생을 죽은 남편에게 바치라는 문이었다.그리고 열녀문 제막식이 끝난 그날 밤, 하경은 자신이 이 집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무릎 꿇어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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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네가 윤씨 집안에 시집올 때 가져온 물건이다. 혼례를 치른 순간부터 이 집안의 재산이 된 것을 어찌 네 것이라 우기느냐?”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친정아버지는 혼례 전날 그녀에게 직접 장부를 건네주었다. 물건의 수량과 값뿐 아니라 거래처와 보관 장소까지 빠짐없이 적힌 장부였다.역관 집안에서 자란 하경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곁에서 물건값을 계산하고 거래 서신을 읽었다. 어떤 비단이 얼마에 팔리는지, 어느 객주가 값을 후하게 치르는지 정도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그러니 시댁의 재산이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를 리 없었다.다만 증거가 없었다.장부는 정씨의 손에 있었고, 창고 열쇠도 이미 빼앗긴 뒤였다.“제게 장부만 돌려주십시오. 물건이 남아 있다면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씨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두 사내가 어깨를 짓눌렀다.하경의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혔다. 차가운 충격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비명을 삼키며 허리를 세웠다.정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네가 아직도 네 처지를 모르는구나. 남편 없는 여자가 시댁 울타리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친정도 예전 같지 않은데 누가 너를 거두겠어?”그녀는 하경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우리 집안이 네게 열녀문까지 세워 주었다. 평생 먹여 살려 주겠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은혜를 모르고 재물부터 찾느냐?”하경은 턱을 붙잡힌 채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제 뜻도 묻지 않고 세운 문입니다. 그것을 어찌 은혜라고 하십니까.”손바닥이 날아왔다.뺨을 맞은 하경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고, 몸이 기울어지면서 손바닥이 거친 돌바닥을 긁었다.정씨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하경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뒤로 잡아당겼다.“네가 감히 누구 앞에서 말대꾸를 해! 네 남편이 죽고 나서 이 집안을 누가 지켰느냐? 내가 지켰다. 그런데 네까짓 것이 재물 몇 푼 때문에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겠다는 것이냐!”하경은 두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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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경은 고통스러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어머님, 그건 감금입니다.”“수절하는 여자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어찌 감금이냐? 네가 바깥세상에 미련을 두지 못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이다.”정씨의 얼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경은 사당 쪽을 바라보았다.조상들의 위패가 놓인 어두운 건물이었다. 창문은 높고 작았으며, 두꺼운 문에는 바깥에서 거는 빗장이 달려 있었다.저 문이 잠기면 편지를 받을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없을 것이다.시어머니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밖으로 나올 방법도 없었다.하경은 삼 년 동안 참아 왔다.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만큼은 집안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씨가 원하는 것은 정숙한 며느리가 아니라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저는 사당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하경의 말에 정씨가 차갑게 웃었다.“네게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바로 그때 대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마님!”문지기가 마당으로 뛰어들었다.“서쪽 장터 최 객주에게서 사람이 왔습니다. 작은마님께 반드시 전해야 할 서신이 있다고 합니다.”정씨의 표정이 굳어졌다.술기운에 느슨해져 있던 시율도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하경은 두 사람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서신을 주십시오.”정씨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밤중에 외간 사내가 보낸 편지를 받겠다니, 정녕 추문을 만들 작정이냐? 당장 돌려보내라.”하경은 문지기에게 다가갔다.“제 앞으로 온 서신입니까?”문지기가 정씨의 눈치를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 작은마님.”하경은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 들었다.붉은 실로 묶인 봉투였다.친정에서 거래 서신을 보낼 때 사용하던 매듭을 보는 순간, 하경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 편지를 내놓아라!”정씨가 소리쳤지만 하경은 이미 실을 풀고 있었다.종이 첫 줄을 읽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남색 비단 열두 필과 백은 스무 냥이 오늘 해 질 무렵 북문 밖 창고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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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기와 끝이 손바닥을 찢었다. 따뜻한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지만,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형수님! 거기서 내려오십시오!”시율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하경은 담장 너머의 어둠을 내려다보았다.높이를 가늠할 겨를도 없이 몸을 던졌다.발이 땅에 닿는 순간 발목이 꺾였다.날카로운 통증에 숨이 막혔다.하경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담장 안쪽에서 하인들이 장작더미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담장 위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그제야 하경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맨발로 흙길을 달렸다.차가운 돌과 자갈이 발바닥을 찔렀고, 다친 발목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욱신거렸다.골목 끝에서 잠시 멈춘 하경은 북문 쪽을 바라보았다.그곳에 혼수가 있었다.지금 달려가면 물건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뒤편에서 횃불이 흔들렸다.시율이 하인들을 이끌고 담장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서하경을 잡아라!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하경은 북문으로 향하려던 발을 돌렸다.살아남아야 했다.오늘 밤 붙잡히면 다시는 이 집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어둠 속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마을 어귀에 세워진 열녀문은 밤에도 붉게 빛나고 있었다.낮에 벌어진 제막식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붉은 비단이 기둥마다 감겨 있었고, 현판 아래에는 꽃장식이 매달려 있었다.하경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높은 현판에 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열녀 서하경.**그 아래에는 죽은 남편을 향한 절개를 평생 지키겠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하경은 한동안 현판을 올려다보았다.열녀문을 세우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의견을 묻는 말을 듣지 못했다.관아에서 사람이 왔을 때도, 장인들이 기둥을 세울 때도, 현판에 이름을 새길 때도 마찬가지였다.그녀에게 허락된 일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것뿐이었다.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새긴 문이었지만, 정작 그 안에는 그녀의 뜻이 한 글자도 없었다.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형수님!”시율이 하인들을 이끌고 나타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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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정씨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그녀를 고발할 것이고, 시율은 제 죄를 덮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그러나 돌아가면 무엇이 달라질까.사당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혼수는 모두 사라질 것이고, 결국 열녀문에 새겨진 이름만 남을 터였다.하경은 천천히 붉은 비단 앞으로 다가갔다.시율이 소리쳤다.“서하경! 감히 그 문에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하경은 그를 돌아보았다.“도련님은 제가 이 문을 세워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하경은 더 묻지 않았다.횃불을 붉은 비단에 가져갔다.불꽃이 옮겨붙었다.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불길이었다. 그러나 기름을 먹은 장식 천이 타들어 가자 불길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불이야!”하인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시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형수님!”그가 달려들었다.“미쳤습니까! 저게 어떤 문인데!”하경은 타오르는 비단을 바라보았다.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스쳤다.“압니다.”그녀는 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제 이름을 새겨 놓고 제 인생을 가두려던 문이지요.”붉은 비단이 검게 오그라들었다.불길이 현판 아래 장식으로 번져 가자 마른 나무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시율은 하인들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고함쳤다.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누군가 물동이를 들고 뛰어오다가 넘어졌고, 깨진 그릇에서 쏟아진 물이 흙바닥을 적셨다.하경은 그 혼란 속에서 뒤로 물러났다.시율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불길을 피해 달려드는 사람들과 부딪혀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서하경!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의 열녀문을 태워!”하경은 몸을 돌렸다.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저 여자가 불을 질렀다!”“윤씨 집안 며느리라더라!”“열녀가 미쳤어!”하경은 달렸다.다친 발목이 욱신거리고 찢어진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뒤에서 열녀문의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삼 년 동안 자신을 짓눌러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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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도겸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정도는 알고 있소.”“그런데도 저를 태우시겠습니까?”“그렇소.”하경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도겸은 마차 문을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스스로 오르기를 바라는 것인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무엇을 원하십니까?”도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이런 상황에서도 값을 먼저 묻는군.”“값을 모르는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마차 안쪽의 작은 서류함을 열었다.종이 한 장과 붓을 꺼내 내밀었다.“그렇다면 조건을 쓰시오.”하경은 뜻밖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직접 써도 됩니까?”“내가 쓰면 믿지 않을 테니.”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 저편에서 시율의 고함이 들렸다.“저기 있다!”하경은 서둘러 붓을 받아 들었다.마차 문턱에 종이를 대고 짧게 적었다.*서하경은 백운상단의 보호를 받는 동안 자신의 재산과 문서에 관한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다.*잠시 붓끝을 멈춘 그녀는 한 줄을 더했다.*보호를 이유로 거처와 행동을 영구히 제한할 수 없다.*하경은 종이를 도겸에게 내밀었다.“이 두 가지를 지켜 주신다면 타겠습니다.”도겸은 종이를 읽었다.그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머물렀다.“보호를 받으면서도 행동을 제한할 수 없다니, 꽤 까다로운 조건이군.”“위험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는 상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가둬 놓고 보호라고 부르지는 마십시오.”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하경은 피를 흘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더 묻지 않고 붓을 집어 들었다.종이 아래에 백도겸이라는 이름을 적고 인장을 찍었다.“이 정도면 되었소?”하경은 글씨와 인장을 확인했다.그제야 종이를 품에 넣고 마차에 올랐다.도겸은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출발해라.”마부가 고삐를 당겼다.말들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시율이 마차 앞으로 뛰어들었다.“멈춰라!”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몰려왔다.시율은 마차를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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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은은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하경은 그제야 마차 안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넓은 좌석에는 두꺼운 방석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서류함과 작은 약상자가 있었다. 상단을 오가며 일을 보는 사람의 마차답게 장식보다는 실용적인 물건들이 많았다.도겸은 약상자를 열어 깨끗한 천을 꺼냈다.“손을 보이시오.”하경은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는 대신 천을 앞에 내려놓았다.“피가 흐르고 있소.”그제야 하경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담장을 넘을 때 베인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굳어 가던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하경은 천을 집어 들어 상처를 감쌌다.도겸은 그녀가 붕대를 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부에게 마차를 천천히 몰라고 지시했다.바퀴가 돌길을 지날 때마다 하경의 발목이 흔들리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발목도 다친 것 같군.”“담장에서 뛰어내리다가 접질렸습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도겸은 그녀의 발목을 잠시 살폈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대신 마차 한쪽에 놓인 두툼한 겉옷을 꺼내 건넸다.짙은 남색의 비단 겉옷이었다.하경은 선뜻 받지 못했다.삼 년 동안 시댁에서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밥 한 끼에도 은혜를 갚으라는 말을 들었고, 겨울옷 한 벌을 받으면 죽은 남편을 위해 평생 몸을 낮추라는 훈계를 들어야 했다.도겸은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챈 듯 겉옷을 좌석 위에 내려놓았다.“빌려주는 것이오. 돌려주고 싶을 때 돌려주시오.”하경은 그제야 옷을 집어 들었다.어깨에 걸치자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았다.마른 나무와 먹, 오래된 비단 창고에서 맡았던 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그녀가 옷깃을 여미는 동안 도겸은 맞은편에 앉아 서류함을 정리했다.하경은 그를 곁눈질했다.소문으로 듣던 백도겸은 거래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다친 여자의 손을 억지로 잡지도,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감사를 요구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안심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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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가져올 것이 남아 있습니다.”도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내일은 바쁘겠군.”하경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내일이 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최 객주를 만나 장부를 확인하고, 북문 창고에 남은 물건이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윤씨 집안에서 어떤 명목으로 재산을 처분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그때 마차 바깥에서 빠른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백운상단의 호위 하나가 창가로 다가왔다.“대행수님.”도겸이 창을 열었다.“무슨 일이냐?”“뒤에서 말을 탄 자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윤씨 집안의 하인들과는 복색이 다릅니다.”도겸은 뒤쪽 길을 살폈다.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호위가 말을 이었다.“그자가 마차를 세우라고 합니다. 관아에서 왔다고 합니다.”하경의 손이 품속의 서신을 움켜쥐었다.열녀문에 불을 지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관아에서 사람을 보낸 것일까.도겸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품속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조금 전 도겸이 서명한 약조였다.그녀는 종이를 등잔 아래에 펼쳐 놓았다.“백 대행수, 이 약조는 아직 유효합니까?”도겸은 종이 아래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먹이 채 마르지 않은 인장이 선명했다.그는 종이를 접어 하경에게 돌려주었다.“내가 서명한 문서요. 마차에 오른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무효가 되겠소.”그때 바깥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마차를 세워라! 관아의 명이다!”도겸은 창밖을 향해 손을 들었다.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하경의 얼굴이 굳어졌다.도겸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문을 연다고 해서 당신을 내어 주겠다는 뜻은 아니오.”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차가운 밤바람이 열린 문틈으로 밀려들었다.하경은 겉옷을 여미며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말에서 내린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백운상단의 마차가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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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 여자를 내놓으시오. 오늘 밤부터 우리 대부방에서 데려갈 사람이오.”마차를 가로막은 사내가 횃불을 높이 들었다.그 뒤에는 몽둥이를 든 장정 넷이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관아의 명령을 받았다던 사내는 이제 빚 문서를 흔들며 서하경을 끌어내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백도겸은 마차 앞에 서서 사내를 바라보았다.“관아에서 보냈다더니, 이제는 대부방 사람이라고 하는군.”사내가 잠시 움찔했다.그러나 곧 품속에서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를 꺼냈다.“윤시헌이 남긴 빚이오. 원금 삼백 냥에 이자까지 오백팔십 냥이지. 저 여자가 갚지 못하면 혼수와 재산을 처분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윤씨 집안에서 신병을 넘겨받기로 했소.”마차 안에서 하경의 손이 굳었다.오백팔십 냥.그녀가 평생 만져 본 적도 없는 거액이었다.“누가 그 돈을 빌렸다고요?”하경이 마차 문을 열었다.다친 발목에 체중이 실리자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문틀을 붙잡고 내려섰다.사내의 시선이 찢어진 상복과 피 묻은 치맛자락을 훑었다.“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빌린 돈이다. 남편이 죽었으니 과부가 갚아야지.”“차용증을 보여 주십시오.”사내는 종이를 내밀다가 하경이 손을 뻗자 일부러 높이 들어 올렸다.뒤에 서 있던 장정들이 웃었다.“열녀문까지 세운 과부라더니 빚 갚을 돈은 없나 보군.”“돈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라도 갚아야지.”하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시댁에서도 숱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남편 없는 여자가 무슨 권리가 있느냐, 먹여 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재산을 내놓지 않으면 갈 곳도 없을 것이라는 말.그 말들이 이제 낯선 사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하경이 다시 문서를 요구하자 사내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순순히 따라와라. 네가 도망치면 우리도 곤란하니까.”상처 난 손목이 거친 손아귀에 짓눌렸다.하경은 이를 악물었다.“놓으십시오.”사내는 오히려 힘을 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그 순간 도겸이 움직였다.퍽!사내의 몸이 마차 바퀴 옆으로 꺾였다.도겸은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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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도겸은 차용증을 가리켰다.“내일 아침까지 원장과 영수증을 가져오시오. 돈을 받은 사람의 이름도 확인하겠소.”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남의 대부방 장부를 들여다보겠다는 것이오?”도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불편한가?”사내의 얼굴이 굳었다.백도겸은 한번 의심한 거래를 끝까지 파헤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가 장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허위 거래와 빼돌린 돈은 오래 숨길 수 없었다.사내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를 갈았다.“내일 다시 오겠소.”“오시오. 그때는 사람을 끌고 갈 생각 말고 장부부터 가져오시오.”사내들이 말을 타고 사라졌다.하경은 그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았다.손에는 여전히 차용증이 들려 있었다.도겸은 그녀의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보았다.“많이 다쳤소?”하경은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렸다.“괜찮습니다.”도겸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더 묻지 않았다.대신 마차 문을 열었다.“타시오. 오늘 밤은 여기서 끝내야겠군.”하경은 차용증을 품에 넣었다.죽은 남편이 남긴 것은 추억만이 아니었다.그녀의 이름으로 된 빚이었다.***백운상단의 별채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높은 담장 안쪽에는 창고와 사랑채가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밤늦은 시각인데도 일꾼들이 비단 꾸러미를 나르고 있었고, 서기들은 등불 아래에서 수량을 확인하고 있었다.하경은 창고 앞에 쌓인 비단을 바라보았다.물건마다 표찰이 붙어 있었다.수량과 가격, 보관 장소가 적힌 표찰이었다.친정아버지가 거래하던 방식과 같았다.하경은 문득 울컥했다.친정에서는 그녀가 숫자를 잘 읽는다고 칭찬했다. 아버지는 거래처에서 보내온 장부를 맡겼고, 어머니는 혼수품을 고를 때도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그러나 윤씨 집안에 시집간 뒤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여자가 돈을 밝히면 천박하다고 했다.장부를 보겠다고 하면 시댁을 의심하는 불효한 며느리가 되었다.그렇게 삼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재산은 하나둘 사라졌다.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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