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남편이 죽자 시댁은 서하경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했다. 혼수는 빼앗고, 방문은 잠갔으며, 그녀의 정절을 가문의 출세에 팔아넘겼다. 열녀문이 세워지는 밤, 하경은 그 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다. 그녀를 태운 것은 팔도의 상권을 쥔 냉혹한 거상 백도겸의 마차였다. “내 곁에 있으시오. 대신 누구의 열녀도 되지 마시오.” 위험한 사내의 보호 아래 하경은 빼앗긴 재산과 삶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서명이 찍힌 장부가 나타나고, 도겸마저 그녀의 혼인에 얽힌 비밀을 숨기고 있다. 남편은 가두려 하고, 도겸은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한다. 하경은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는 순간, 하경은 다시 누군가의 소유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랑마저 제 손으로 선택할 것인가.
view more서하경은 제 이름이 새겨진 열녀문에 불을 질렀다.
죽은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하겠다며 세운 문이었다. 그러나 하경은 그런 맹세를 한 적이 없었다.
삼 년 전, 남편 윤시헌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하경은 관 앞에서 정신을 잃었다. 사흘 만에 겨우 눈을 떴을 때는 그녀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퍼져 있었다.
시어머니 정씨 부인이 퍼뜨린 말이었다.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지아비를 사랑했던지, 남편 없는 세상에서는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다더구나.”
정씨는 문상객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사람들은 그런 며느리를 둔 윤씨 집안의 덕을 칭송했다.
정작 하경에게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자 정씨는 하경의 혼수 장부부터 가져갔다. 안채 밖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고, 친정에서 보내온 편지는 시어머니의 손을 거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상중이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정씨는 하경이 얌전히 지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장터에 나가겠다고 하면 남편 잃은 여자가 밖을 돌아다닌다고 꾸짖었고, 친정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면 죽은 남편보다 친정이 더 중요하냐며 사흘씩 끼니를 끊었다.
하경이 직접 관리하던 혼수 창고도 어느 날부터 잠겨 있었다.
남색 비단 열두 필이 사라졌을 때 정씨는 좀이 슬어 버렸다고 했다. 은전이 없어진 까닭을 묻자 남편의 장례에 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정어머니가 마련해 준 장신구와 값비싼 약재까지 하나둘 자취를 감췄지만, 하경에게 남은 것은 확인할 권리조차 없었다.
그래도 삼년상이 끝나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참아 보려 했다.
그러나 윤씨 집안은 그녀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열녀문을 세웠다.
살아 있는 여자의 이름을 새겨 놓고, 남은 평생을 죽은 남편에게 바치라는 문이었다.
그리고 열녀문 제막식이 끝난 그날 밤, 하경은 자신이 이 집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무릎 꿇어라.”
사랑채 앞마당에 정씨 부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경은 두 하인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초겨울의 밤공기가 얇은 상복 사이로 스며들었고, 급히 끌려 나오느라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발끝은 이미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화로 앞에 앉은 정씨는 두툼한 비단 솜옷에 모피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 곁에서는 시동생 윤시율이 술잔을 기울였다. 얼마 전부터 노름판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씨는 둘째 아들의 허물을 입에 올리는 사람부터 내쫓았다.
“어머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하경이 조용히 묻자 정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오늘 낮에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었느냐? 열녀문 제막식에서 사람들 앞에 웃음을 보이지 않았더냐.”
“관아에서 나오신 분께서 말씀을 건네시기에 예를 갖춰 답했습니다. 그뿐입니다.”
“남편을 잃은 여자가 웃었다는 사실이 문제다! 사람들이 네 속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정씨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시율이 술잔을 내려놓고 능글맞게 웃었다.
“어머니, 형수님도 아직 스물넷 아닙니까. 남편 없이 삼 년이나 지냈으니 밤마다 외로우실 만도 하지요.”
하인들 사이에서 억눌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경은 시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련님, 죽은 형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시율의 웃음이 비틀렸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일어나 하경에게 다가왔다. 술 냄새가 얼굴 가까이 풍겼다.
“형수님이야말로 남편의 이름을 팔아 재물을 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어머니께 장부를 내놓으라고 하셨다면서요.”
하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 친정에서 가져온 물건이니 제가 확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말에 정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도 그 장부 타령이냐?”
“남색 비단 열두 필과 은전, 약재와 장신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 혼수 장부를 돌려주십시오.”
정씨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도겸은 서류함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장부를 찾으러 가는 사람에게는 장부를 읽을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소.”그는 종이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백운상단의 장부 열람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문서였다.하경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이걸 제게 주시는 겁니까?”“빌려주는 것이오.”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조건이 있소.”하경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종이를 내려놓았다.“무슨 조건입니까?”“당신이 찾아낸 장부를 나에게도 보여 주시오.”하경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다 종이를 집어 들었다.“원본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도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이미 약속했소.”하경은 문서를 접었다.“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서하경.”하경이 고개를 들었다.“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사람이군.”그녀는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저는 재미를 드리려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도겸은 낮게 웃었다.“알고 있소.”그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 더 눈을 뗄 수가 없군.”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도겸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손에 쥔 문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그날 밤, 하경은 객실로 돌아왔다.탁자 위에는 깨끗한 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짙은 남색 저고리와 치마였다.관리인이 도겸의 지시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하경은 옷을 내려다보았다.삼 년 동안 입었던 흰 상복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그녀는 손끝으로 비단을 만졌다.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친정어머니가 혼례 전날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네가 입고 싶은 색을 골라라. 네가 입을 옷이니 네 마음에 들어야지.”하경은 한동안 옷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아직 상복을 벗지 않았다.내일 아침이 되면 직접 고를 생각이었다.누군가 마련해 준 옷을 입는 것과 스스로 입을 옷을 선택하는 것은 달랐다.그녀는 옷을 가지런히 접어 두었다.그리고 등잔 아래에 앉아 오늘 확인한 문서들을 펼쳤다.가짜 손도장이 찍힌
하경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남색 비단 열두 필은 제 친정에서 가져온 혼수입니다.”상단주는 비웃었다.“윤 도련님께서는 집안 물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대금도 지급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요?”하경은 준비해 둔 종이를 펼쳤다.비단의 수량과 품질, 친정에서 가져온 날짜가 적혀 있었다.그녀는 비단 끝에 수놓인 서씨 집안의 표식까지 설명했다.상단주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그 표식은 저도 보았습니다.”하경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제 물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겠군요.”상단주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이미 돈을 지급했습니다. 거래를 취소하려면 그 돈부터 돌려받아야 합니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합니다. 대금을 지급했다는 영수증을 보여 주십시오.”상단주는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하경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거래 금액과 날짜를 확인하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영수증 아래에 찍힌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붉은 도장.그 안에 새겨진 이름은 윤시율이 아니었다.서하경.그녀의 이름이었다.하경은 종이를 가까이 가져갔다.도장의 모양이 이상했다.그녀가 사용하던 인장은 가장자리 한쪽이 조금 깨져 있었다. 어린 시절 떨어뜨린 뒤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도장에는 깨진 흔적이 없었다.완전한 모양이었다.누군가 그녀의 이름으로 새 인장을 만들었다.하경은 숨을 삼켰다.시댁은 그녀의 손도장만 위조한 것이 아니었다.인장까지 새로 만들어 거래에 사용하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 도장은 제 것이 아닙니다.”상단주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말씀입니까?”하경은 종이를 도겸에게 건넸다.도겸은 도장을 확인했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윤씨 집안이 꽤 대담한 짓을 했군.”상단주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저는 몰랐습니다! 윤 도련님께서 분명히 형수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하경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그 말을 증언해 주십시오.”상단주는 입술을 다물었다.
탁자 위에는 은전이 담긴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너희는 며느리가 열녀문에 불을 지르는 것을 보았지?”하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마님, 저희는 불이 난 뒤에야 달려갔습니다.”정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럼 지금부터 본 것으로 해라.”그녀는 은전 주머니를 하인들 앞으로 밀었다.“서하경이 사내와 달아나려고 열녀문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하면 된다.”하인들의 얼굴이 굳었다.“하지만 마님,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정씨가 탁자를 내리쳤다.“내 집에서 삼십 년을 먹고살았으면 누구 덕에 살아왔는지 알아야지!”하인들은 고개를 숙였다.정씨는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관아에 가서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 며느리가 남편의 명예를 더럽히고 외간 사내와 도망쳤다고.”그녀는 은전 주머니를 다시 밀었다.“그렇게만 하면 너희 자식들까지 먹고살게 해 주마.”하인들은 끝내 주머니를 거절하지 못했다.정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그녀는 서랍에서 다른 문서를 꺼냈다.서하경이 남편의 빚을 갚지 않으려고 도망쳤다는 내용의 고발장이었다.정씨는 붓을 들어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죄인을 즉시 체포하여 윤씨 집안으로 인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그녀는 붓을 내려놓았다.“열녀문을 태우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정씨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윤씨 집안 며느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해가 저물 무렵, 북문 창고를 확인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하경은 관리인과 함께 그를 맞았다.“남색 비단 열두 필은 아직 창고에 있습니다. 다만 내일 새벽 동문상단으로 넘기기로 했습니다.”하경은 종이를 받아 펼쳤다.매도인 윤시율.매수인 동문상단.남색 비단 열두 필.거래 금액은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그녀는 종이를 접었다.“대금을 지급했다는 영수증도 확인했습니까?”“그것까지는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하경은 잠시 생각했다.“그렇다면 내일
“이야, 형수가 아주 좋은 곳에 들어앉았네. 형님 제사상 앞에서는 그렇게 정숙한 척하더니, 이제는 사내 집에서 밤을 보내?”하경의 얼굴이 굳어졌다.시율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어머니께서 보내셨어. 돌아와서 이것만 찍으면 열녀문 태운 일도 덮어 주신대.”하경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혼수품 일체의 처분에 동의한다는 문서였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 재산을 모두 팔겠다는 겁니까?”시율이 어깨를 으쓱했다.“형님 빚을 갚아야지. 설마 형님이 남긴 빚을 모른 척할 생각은 아니겠지?”하경은 문서를 접었다.“그 빚은 제가 진 것이 아닙니다.”시율이 코웃음을 쳤다.“형수가 돈을 빌렸든 형님이 빌렸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집안 돈인데.”“제 혼수는 집안 돈이 아닙니다.”시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는 하경에게 성큼 다가왔다.“형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형수는 열녀문을 태운 죄인이야. 어머니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당장 관아에 끌려가!”하경은 물러서지 않았다.시율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그러나 하경이 재빨리 손을 피했다.“손대지 마십시오.”시율이 비웃었다.“백 대행수 뒤에 숨으니까 이제 형수도 무서운 게 없어졌나 봐?”그가 다시 손을 뻗는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손을 어디에 대려는 거지?”백도겸이었다.시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도겸은 천천히 다가왔다.그의 시선이 시율의 손에 머물렀다.“어젯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시율은 황급히 손을 내렸다.“대행수님, 집안일입니다. 형수를 데리러 왔을 뿐입니다.”도겸은 하경을 바라보았다.“돌아가겠소?”하경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도겸은 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들었나?”시율의 얼굴이 붉어졌다.“대행수님,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안일에 이렇게 끼어드시는 건—”도겸이 그의 말을 끊었다.“남의 집안일이라.”그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남색 비단 열두 필의 거래 내역이었다.“그럼 이것도 집안일인가?”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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