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산초강
35분 뒤, 일행을 태운 차가 H시 중심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원형 식탁에 자리를 잡을 때, 도희는 시경의 정면에서 한참 비껴난 자리를 골라 앉았다.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이 직접 마주칠 일은 없는 자리였다.

도희는 간밤에 가까워졌다는 이유만으로 시경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역병이라도 피하듯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는 도희를 보자, 시경은 아직 어리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눈앞에 머물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을 텐데...

도희는 정반대였다.

간밤의 일을 빌미로 출세할 생각도, 무슨 이득을 챙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리숙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현명한 처신이었다.

이번 자리는 출장의 마지막 식사이자 발주처인 소영남 대표와의 만남이었다.

소영남이 도착하자, 시경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나눴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 본격적인 협업 이야기가 시작됐다.

프로젝트 담당자인 수진 역시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소영남의 얼굴에도 슬슬 취기가 올랐다.

소영남이 혀가 살짝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다음 주에 팀을 데리고 J시로 가서 계약하죠. 제안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업계에서 손꼽히는 하양그룹 아닙니까? 걱정할 게 없죠.”

“좋은 협업을 기대하겠습니다, 소 대표님.”

“그럼요. 잘해 봅시다, 잘해 봐요!”

...

한편, 인턴 세 사람은 술 대신 과육이 들어 있는 오렌지 주스를 여러 잔이나 마셨다.

이제는 배가 빵빵할 지경이었다.

소영남이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지윤과 나연도 화장실로 향했다.

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술 진짜 잘 마신다. 배 이사님은 소주만 두 잔에 맥주도 한 네 병은 마셨지? 난 주스만 마셨는데도 토할 것 같던데.”

지윤은 화장품을 꺼내 들고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배경도 지위도 없는 배 이사님 같은 사람은 몸이라도 갈아 넣어야 계약을 따내는 거지. 하 대표님이 술 마시는 거 봤어? 한 잔 받아 놓고 겨우 두 모금 마셨잖아.”

“배 이사님도 좀 바보 같아. 여자가 뭘 그렇게까지 해? 35살인데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

“젊을 때 돈 많은 남자라도 하나 잡았으면 지금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을 텐데.”

지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가진 거 없는 여자일수록 자존심은 또 못 버리더라. 꼭 자기 힘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잖아. 결국 그런 노력이 별것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럼 우린 왜 배 이사님 밑으로 온 거야? 그때 권 이사님을 선택할걸. 부동산 개발업체 사장 딸하고 결혼했다던데. 그럼 인맥 하나는 확실할 텐데.”

지윤이 코웃음을 쳤다.

“처가에 얹혀사는 아저씨? 됐어.”

지윤은 립스틱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 밑에서 일하느냐는 안 중요해. 하 대표님을 자주 볼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때 나연이 지윤에게 바짝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 대표님 목에 빨간 키스마크 자국 있는 거 봤어? 강도희랑 똑같던데. 대표님도 모기한테 물리신 건가?”

지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까 대표님이 강도희 이름 부를 때, 좀 묘하지 않았어?”

“뭐가?”

“이름 부르다가 잠깐 멈칫했잖아. 원래 말하다가 그렇게 뜸 들이는 사람 아니거든.”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이름이 바로 생각 안 났나 보지. 강도희는 맨날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대표님이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하지.”

“우리 이름은 바로 부르셨잖아. 특히 네 이름 부를 땐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고. 그만큼 네가 대표님 기억에 확실히 남았다는 거지.”

그 말을 듣자 지윤은 속으로 은근히 기분이 들떴다.

“정말?”

“그럼. 넌 불가리 목걸이에 디올 원피스, 입생로랑 구두까지 신고 샤넬 가방도 들었잖아.”

“그런 널 놔두고 누가 저렴한 기성복 정장이나 입고 다니는 강도희를 쳐다보겠어? 너도 그랬잖아. 대표님은 안목이 있다고. 여자 보는 눈도 당연히 높겠지.”

지윤은 작은 가방에서 향수 하나를 꺼내서 나연에게 건넸다.

“한두 번밖에 안 쓴 거야. 너 줄게. 역시 내 친구는 너밖에 없다.”

나연이 기쁜 얼굴로 향수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지윤아.”

“뭘. 이 향은 너랑 잘 어울려.”

그러다 지윤이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제 다른 여자랑 잔 건 확실하잖아. 대표님한테 여자가 생긴 거면 나도 더는 이 회사 다닐 생각 없어.”

“그러지 마. 멀쩡한 남자인데 당연히 욕구도 있겠지. 밖에서는 계속 혼자인 척한다는 건 그냥 잠자리만 갖는 사이라는 뜻이야. 감정은 없고.”

“그래? 그런데 아무 여자랑이나 잘 수 있는 사람이 왜 나는 안 고르는데?”

나연이 곧장 대답했다.

“넌 아까워서 그렇겠지. 다른 여자들은 가볍게 만나도 넌 다르게 보는 거야.”

“그래도 궁금해. 대체 어떤 여자여야 대표님 침대에 올라갈 수 있는 건지.”

“그럼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어젯밤에 누구랑 잤는지 알아보면 되지, 뭐.”

“어떻게?”

“물건 잃어버렸다고 둘러대면서, 호텔에 어젯밤 복도 CCTV 영상 좀 보내 달라고 하는 거지.”

“와, 너 진짜 똑똑하다. 잘되면 샤넬 립스틱 하나 사 줄게.”

“좋아. 좋은 소식 기다려.”

두 사람이 화장실을 나간 뒤.

화장실 칸 안에 앉아 있던 도희는 손을 들고 미간을 꾹 눌렀다.

후회가 됐다.

어젯밤 시경과 잠자리를 가진 일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당장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음 달이면 정규직 전환 평가가 있다.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문제가 생겨서는 절대 안 됐다.

‘하... 미색도 다 부질없다더니.’

‘옛말에 틀린 소리 하나 없어.’

‘어제는 왜 그 잘난 얼굴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렸을까!’

도희는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서다가 마침 복도에서 시경과 마주쳤다.

시경도 도희를 발견하고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오렌지 주스에 취했어?”

도희는 얼른 좌우를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도희는 냉큼 시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계단 쪽으로 서둘러 끌고 갔다.

인기척을 감지한 센서등이 켜졌다가 잠시 후 다시 꺼졌다.

도희는 계단실 문을 닫고, 무슨 은밀한 일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동료들이 어제 대표님이 누구랑 잤는지 궁금해해요. 호텔 CCTV까지 확인해 보겠대요. 사람을 시켜서 처리 좀 해 주세요.”

시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가 내 사생활을 그렇게 궁금해하는데?”

“제 동료들이요.”

시경은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되물었다.

“알면 아는 거지. 왜 그렇게 당황해?”

도희가 시경을 홱 노려봤다.

“당황 안 하게 생겼어요? 대표님은 오너시니까 괜찮겠지만 전 아니잖아요!”

“그 일이 알려지면 저한테 분명히 시비를 걸 거고, 정규직 전환에도 문제가 생길 거예요. 어제 약속하셨잖아요. 하룻밤 때문에 제 업무에 지장 없게 하겠다고요!”

시경은 그저 도희를 내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정말이지 저 남자를 콱 물어 버리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는 엄연히 회사 대표였다.

차마 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됐어.’

‘한 번 당했으니 다음부턴 조심하면 되지.’

도희는 체념한 채 계단실 문을 밀고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시경이 도희를 도로 잡아당겼다.

느닷없는 힘에 도희는 휘청거리다가 시경의 단단한 품에 부딪혔다.

시경의 입술이 은은한 향기를 머금은 도희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이윽고 머리 위에서 뜻밖에도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처리할게. 어젯밤 일은 다른 누구도 모르게 할 테니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제30화

    도희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두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대표님 이제 겨우 28살이시잖아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성공도 하셨고, 한창이신데 무슨 아저씨예요!”시경이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에 오히려 도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도희는 조심스럽게 거울처럼 반짝이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시경의 얼굴을 살폈다.“대표님, 진심이에요.”“그런데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그게...”도희는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밖에 햇빛이 좀 강해서요. 하하...”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도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쏜살같이 달아났다.시경은 그런 도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매번 도망가네. 내가 그렇게 무섭나?’도희는 몇 걸음이나 달려서 시경과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겨우 속도를 늦췄다.그런데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혔다.“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부딪친 충격에 도희의 몸이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머리에 쓰고 있던 야구 모자도 바닥으로 떨어졌다.팔이 몹시 아팠다.도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올려다봤다.남자도 당황한 얼굴이었다.“미안합니다. 많이 아프세요?”그 모습을 본 시경이 다가왔다.“괜찮아?”도희는 아픈 팔을 살짝 움직여 보면서 대답했다.“네, 괜찮아요.”시경은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들었다.그러고는 남자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앞 좀 보고 다니지?”남자가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인서 피하느라 그랬지. 오늘은 여기까지 쫓아왔어!”“다음엔 앞 좀 잘 봐.”그때 뒤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지헌, 거기 안 서! 잡히면 넌 죽었어!”남자의 얼굴이 순간 그대로 굳어졌다.“나 가야겠다! 친구분한테는 다음에 제대로 사과할게!”그 말을 남긴 채 남자는 바람처럼 달아났다.뒤이어 예쁘장한 여자가 뛰어나왔다.여자는 시경을 발견하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오빠! 왜 백지헌 안 잡아 줘!”그러더니 대답을 들을 새도

  •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제29화

    “잠깐 쉬었다 가시겠다는 거예요, 아니면 자고 가시겠다는 거예요?”늦은 밤, 단둘이 저녁을 먹고 집 앞까지 온 남녀였다.도희도 더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시경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시경이 웃으면서 되물었다.“어느 쪽 같아?”“어느 쪽이든 곤란해요. 그런 건 다른 분이랑 푸세요.”시경의 외모가 무척 매력적인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상사와 직원 사이였다.한 번 즐겼으면 그걸로 충분했다.계속 얽혀 봤자 자신의 앞날에 지장만 생길 게 뻔했다.시경 정도의 남자라면 주변에 여자가 넘쳐날 터였다.도희는 자신만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오늘 두 번째 밤을 보내면 세 번째, 네 번째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그러다 서로에게서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 뒤에도 자신이 하양그룹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그럴 리 없었다.생각만 해도 번거로웠다.시경은 도희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꿰뚫어 본 듯했다.“문제가 생기는 게 그렇게 싫어?”“대표님은 안 싫으세요?”“생기면 해결하면 되지. 난 참는 건 싫어.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도 없고.”“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들어갈게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희는 쏜살같이 차에서 내렸다.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운전 조심하세요!”그 말을 남기고 도희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냅다 뛰어 들어갔다.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모습이 그리 우아하지는 않았다.시경은 도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봤다.조금 아쉬웠다.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아쉬움마저도 나쁘지는 않았다.함께 밤을 보내지 못한 건 분명 아쉬운 일이었다.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지켜야 할 선을 확실히 아는 도희가 기특했다.집으로 돌아온 시경은 샤워부터 했다.샤워를 마친 뒤, 거울 앞에 서서 마른 수건으로 짧은 머리를 털었다.아직 젖어 있는 머

  •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제28화

    도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잠시 후, 도희가 입을 열었다.“그럼 길거리 포장마차로 모실게요. 드실 거예요?”“싫어.”“그럼 마음만 전한 걸로 할게요.”시경이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강도희답네.’회사에서는 늘 잔뜩 긴장해 있으면서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표정도 말투도 훨씬 풍부해졌고, 마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시경은 도희의 그런 생기가 좋았다.10분쯤 뒤, 두 사람은 한 식당에 도착했다.시경이 자주 찾는 곳인 모양이었다.“하 대표님, 어서 오세요.”직원들은 시경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그런데 시경이 여자를 데리고 들어온 것을 보자, 여사장의 미소가 살짝 옅어졌다.“여자친구예요?”시경은 맞다는 말도,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조용한 룸 하나 주세요.”“북극성 룸 비어 있어요.”시경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2층에 올라갔다.식당 전체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안내를 받은 별실 역시 세련되게 잘 꾸며져 있었다.도희는 자리에 앉아서 영어가 함께 표기된 메뉴판을 펼쳤다.메뉴는 무척 다양했다.하지만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은 없었다.도희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음식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그럴 때는 뭘 먹어도 다 비슷하게 느껴졌다.괜히 비싼 음식을 주문해서 시경에게 돈을 많이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결국 도희는 비교적 저렴한 연어 샐러드를 골랐다.불을 사용할 필요도 없는 음식이라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다.시경은 도희의 앞에 놓인 접시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저녁에도 풀만 먹어?”“네. 밤에 고기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잖아요. 소화가 안 되면 지방으로 변해서 뱃살로 쌓이고요.”“운동해서 빼면 되지. 샐러드는 맛도 없는데.”시경은 접시에 담긴 연어 조각들을 내려다봤다.양도 얼마 되지도 않았다.그나마 나머지는 대부분 양상추와 적양배추였고, 반으로 자른 방울토마토 몇 개가 곁들여져 있을 뿐이었다.보기만 해도

  •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제27화

    그 뒤로 시경한테서는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도희도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그렇게 10분쯤 지난 후, 시경에게서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모래성이 그렇게 매력적일까?]도희는 잠시 생각한 뒤 답장을 보냈다.[아이들이 모래 파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얕보시면 안 돼요. 어린아이든 좀 큰 아이든 다 좋아해요. 한번 파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도 파면서 놀거든요.]이번에도 시경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도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남은 업무를 마무리했다.수정한 파일을 수진에게 메일로 보내고, 컴퓨터까지 껐다.이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그런데 책상 조명을 끄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들어와.]시경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대표실 안에서 시경은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도희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도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대표님, 부르셨어요?”“응. 앉아.”도희는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시경을 똑바로 바라봤다.시경이 입을 열었다.“왜 놀이공원보다 캠핑장에 모래성을 만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네 의견을 좀 듣고 싶어.”도희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그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캠핑장의 주요 고객층은 젊은 사람들이에요.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즐기려는 거예요.” “텐트에서 하룻밤 자고, 야외에서 바비큐도 해 먹으면서 여유롭게 주말을 보내는 거죠.”도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 이어갔다.“그런데 이 고객층은 생각보다 폭이 좁아요. 젊은 사람들의 취향은 금방 바뀌기도 하고요.”“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캠핑장 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면서 서비스의 질도 떨어졌어요. 그러니 점점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도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그렇다면 다시 인기를 얻고 싶은 캠핑장은 우선 새로운 고객층부터 찾아야 해요.”그러고는 시경에게 되물었다.“대표님은 어떤 사람들이 새로운 고객이 될 수 있을 것 같으세요?”시

  •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제26화

    화장실에서 나온 지윤과 나연은 문 앞에 서 있던 도희와 마주쳤다.나연이 도희를 흘겨봤다.“너 우리 얘기 엿들었어?”“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데 굳이 엿들을 필요가 있겠어? 비켜. 길 막지 말고.”도희는 두 사람을 지나쳐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마음은 영 편치 않았다.성과급을 배분하는 사람이 수진이라는 사실은 도희도 알고 있었다.20억 원대 프로젝트를 계약하면 지급되는 성과급은 총 1천만 원이었다.이후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잔금까지 모두 받으면, 팀에 1억 원의 성과급이 추가로 지급된다.우선 계약 성과급 1천만 원에서 데이터팀과 디자인팀, 지원 부서 등에 돌아갈 몫을 먼저 떼어 줘야 했다.그렇게 하고 나면 대략 800만 원이 남는다.지윤이 그중 400만 원을 받았다면, 수진에게 돌아간 돈은 200만 원이었다.담당 이사인 수진이 지윤보다도 적게 받은 셈이었다.PPT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결국 수진이 처음부터 전부 갈아엎어 다시 만들게 했는데.‘그런 PPT 하나에 성과급이 무려 400만 원이라니...’‘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장지윤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가?’‘설마 장지윤도 회사에 투자금을 가져온 건가?’도희가 아는 수진은 올곧은 사람이었다.눈앞의 자원이나 이익 때문에 원칙을 저버릴 사람은 아니었다.‘그렇다면 이번 성과급 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일개 인턴이 프로젝트를 책임진 이사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다니.’도희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단순히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자신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생각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이사님도 결국 장지윤을 추천하시겠구나.’도희는 자리로 돌아와서 퇴근할 채비를 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수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네, 이사님.”[도희 씨, 아직 회사야?]“네, 아직 회사예요.”[수정할 파일이 하나 있어. 메일로 보내 놨으니까 오늘 안으로 고쳐서 보내 줘.]“아, 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도희는 다시 컴

  •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제25화

    게다가 권태석의 기획안은 단순히 참신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기획안마다 뚜렷한 강점이 있었다. 시의성 있는 화제를 발 빠르게 반영하면서, 마케팅 방식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갔다.A팀의 결과물은 결코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었다.전문성과 신뢰도 면에서 다른 팀들을 압도할 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었다.게다가 올해 권태석이 맡은 인턴 세 명은 모두 자금력과 인맥을 갖춘 채 입사한 사람들이었다.입사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그 세 사람이 A팀에 가져온 계약 규모만 해도 200억 원에 육박했다.바로 이런 것이 회사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힘이었다.도희는 문득 소영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J시에서 자리를 잡는 건 쉽지 않다고.특히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정말 그랬다.누군가 평생을 바쳐 쫓아가는 결승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출발선일 뿐이었다.J시는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열어 주는 도시처럼 보였다.하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서면, 수없이 많은 문이 또다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외곽 순환도로 너머로 도심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였다.하지만 돌아보면 그저 멀리서 바라봤을 뿐이었다.정작 그곳에 발을 디뎌 본 적은 없었다.그런 생각이 들자, 도희는 문득 맥이 탁 풀렸다.그때 찾아온 허탈함은 며칠이 지나도록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그러던 금요일.마침 9월 1일이었다.하양그룹은 매달 1일 오후 2시 정각에 급여를 지급했다.이렇게 급여 지급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회사도 흔치 않았다.도희는 급여명세서를 확인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평소보다 100만 원이 더 들어와 있었다.소영남 프로젝트에 대한 성과급이었다.인턴 월급이 240만 원인 도희에게 10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덕분에 이번 달 수입은 300만 원을 훌쩍 넘겼다.며칠 동안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단번에 풀렸다.도희는 곧장 수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성과급 나왔어! 오늘 저녁 내가 살게!]답장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