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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산초강
식사는 이미 끝난 뒤였다.

수진은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서 마신 술을 억지로 토해 낸 뒤, 세수까지 마친 참이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던 순간, 어둑한 계단실 입구에서 도희와 시경이 차례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진은 얼른 뒷걸음질을 치면서 다시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직장 생활만 10년이었다.

그동안 이런 일은 숱하게 봐 왔다.

하지만 시경을 둘러싼 남녀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진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식사와 함께 보름 간의 출장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

H시에서 J시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반 거리였다.

도희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수진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두 사람이 비즈니스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뒤따라오던 지윤이 수진을 붙잡았다.

“이사님, 제가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 드렸어요.”

수진은 순간 멈칫했다.

사양하고 싶었지만, 곧 이륙할 예정이라 이제 와서 취소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다음부터는 이런 데 돈 쓰지 마.”

그러자 옆에 있던 나연이 냉큼 물었다.

“나는? 나는?”

“당연히 너도 했지. 너만 두고 가겠어?”

“야, 신난다! 사랑해, 윤지윤!”

지윤은 들뜬 나연을 보다가 조용히 서 있는 도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 도희야. 일등석이 꽉 차서. 자리만 있었으면 너도 해 줬을 텐데.”

도희는 오히려 안도했다.

괜히 원치 않는 호의를 억지로 받고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도희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난 자리 찾으러 갈게.”

수진은 혼자 자리를 찾아 떠나는 도희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쓰였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J시에 올라와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롯이 제 힘으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가 꼭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진은 유독 도희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때 지윤이 옆에서 재촉했다.

“가요, 이사님. 아까 술도 많이 드셨는데 얼른 가서 푹 주무셔야죠.”

일등석에 들어선 수진은 빈자리가 여러 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윤은 일부러 도희만 빼놓은 것이었다.

10년 넘게 회사에서 구른 수진에게는 동료들끼리 편을 가르고 누군가를 따돌리는 일쯤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지윤을 대놓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저 도희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었다.

수진 역시 인턴 시절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상사들이 왜 나서서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지 속으로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상사의 자리에 오르고 나니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해는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덕까지 본 셈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남은 미안함을 덜겠다고 도희의 좌석까지 일등석으로 올려 주려면, 적어도 40만 원쯤은 써야 할 터였다.

그 돈이라고 어디 쉽게 번 돈이던가.

잠시 후, 시경과 수행비서 민호가 차례로 일등석에 들어섰다.

수진은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몸을 살짝 웅크렸다.

그런데 지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대표님! 주 비서님!”

시경은 무심하게 시선을 한 번 주더니, 지나가면서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민호가 일행을 보고 물었다.

“좌석을 따로 업그레이드하셨습니까?”

나연이 얼른 대답했다.

“네. 지윤이 아버님이 올려 주셨어요.”

민호는 세 사람뿐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물었다.

“강도희 씨는요? 곧 이륙인데 아직 안 오셨습니까?”

이번에는 지윤이 대답했다.

“아, 저희 아빠는 도희를 모르셔서 저희 셋만 해 주셨어요. 도희도 괜찮다고 했고요.”

그 말을 들은 시경이 천천히 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배 이사님은 복도 많으시네요. 올해는 저렇게 살뜰한 인턴도 맡으시고.”

그 말을 끝으로 시경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일행과는 제법 떨어진 자리였다.

지윤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처럼 목을 길게 빼고서 시경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편 피로가 몰려온 시경은 좌석 등받이를 눕히고 잠을 청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대 상장기업을 이끄는 경영자였다.

회사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직원들끼리 무리를 짓거나 서로 대립하는 일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회사에 지장을 주지만 않는다면, 그런 경쟁도 직원들이 성장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

특히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인턴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현실의 벽에 한 번쯤 부딪혀 봐야 사람도 더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평소 같았으면 시경도 굳이 수진에게 한마디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소외된 사람이 다름 아닌 도희였다.

한편 수진은 시경의 입에서 나온 ‘복도 많으시네요’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조금 전 계단실에서 나란히 나오던 두 사람의 모습까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시경이 던진 말에는 분명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수진은 어금니를 꽉 물고서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저희 팀 직원 한 명도 일등석으로 좌석을 변경할 수 있을까요?”

그 시각, 비즈니스석에 앉아 있던 도희는 거의 잠에 빠져들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승무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좌석이 변경됐다고 알려 왔다.

도희는 멍한 얼굴로 가까스로 눈을 떴다.

지윤이 해 줬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수진뿐이었다.

일등석으로 자리를 옮긴 도희는 시경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좌석에 앉게 됐다.

고마운 마음에 도희는 이륙 전 수진에게 카톡을 보냈다.

[좌석 바꿔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님. 저 때문에 돈을 쓰시게 했네요.]

[괜찮아. 푹 자. 그동안 고생 많았어.]

도희는 핸드폰을 끄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때 두 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시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도희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기였다.

간밤에 입을 맞출 때도 유독 그 향기가 좋았다.

도희가 일등석으로 옮겨온 것을 확인하자, 시경은 그제서야 다시 눈을 감았다.

...

비행기에서 내리자 지윤을 마중 나온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연도 자연스럽게 그 차에 올라탔다.

수진은 공항 근처에 자신의 차를 세워 둔 상태였다.

결국 도희만 공항 출구에 홀로 서서 호출해 둔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경 역시 마중 나올 기사를 기다리던 중 도희를 발견하자 곧바로 다가왔다.

“어디 살아? 데려다줄게.”

도희는 단호하게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이미 택시 불렀어요.”

그러고는 캐리어를 끌고 서둘러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도희는 택시에 올라타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잠깐 뛰었을 뿐인데도 땀이 배어 나왔다.

그 바람에 목에 발라 두었던 컨실러가 땀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애써 가려 놓았던 키스마크 너덧 개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도희는 겉으로는 간밤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 본 경험도 없었고, 그렇게 대담하게 행동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마음속에 남은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어젯밤의 일을 차분히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정말 좋았다.

단순히 시경이 잘생기고 능숙한 남자여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상사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회사에서 지켜야 할 위계와 선을 넘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와 하룻밤을 즐겼다는 사실이 묘하게 짜릿했다.

언제나 정해진 규칙대로만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 도희가 처음으로 선을 넘어 본 것이었다.

문득 입사 면접을 보러 왔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시경과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도희는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남자가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은근히 궁금했었다.

‘이런 남자는 침대에서 어떨까?’

‘한 번만 같이 자 보고 싶다.’

그런데 정말로 그 남자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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