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마커스의 시점
파리에서 돌아오는 비행은 길고 지루했다. 게다가 평소라면 오히려 나를 활기차게 만들었을 고도의 긴장감이 감도는 기업 협상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피로감뿐이었다. 원래는 곧장 새 아내의 저택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개인 격납고에서 예상치 못한 지연이 발생하면서 도착 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겨 버렸다. 아직 적응 중인 집안에 한밤중에 들이닥쳐 가족들을 깨우느니, 비서에게 도심에 있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부티크 호텔의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을 예약하라고 지시했다. 내일 본격적으로 다정하고 헌신적인 가장 역할을 시작하기 전에,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시간과 뜨거운 샤워, 그리고 독한 술 한 잔이 필요했다. 아내 바네사는 몇 주 전부터 내게 딸 엘레나를 꼭 만나 보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몇 달 전 급하게 법원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로, 그 아이는 대학 학기를 마친다는 이유로 집을 떠나 있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바네사는 절반의 시간을 사교계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는 데 썼고, 나머지 절반은 내가 얼마나 하늘이 내려 준 선물 같은 남자인지 딸에게 자랑하는 데 썼다. 나는 아직 그 아이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마침내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예정이었다. 나는 전용 스팀 샤워실에서 나왔다. 뜨거운 수증기가 짙은 대리석 바닥 위로 소용돌이치며 퍼져 나갔다. 짙은 회색 수건 하나를 허리에 단단히 둘러 낮게 걸치고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쓸어 넘겼다. 나는 묵직한 욕실 문을 밀어 열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감도는 어두운 침실로 들어섰다. 거대한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은빛 달빛이 반짝이는 바닥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놓아 둔 침대 옆 탁자로 향해 무겁고 신중하게 두 걸음을 내디뎠다. 맨발이 푹신한 러그 위에 부드럽고 규칙적인 소리를 남겼다. 툭. 툭.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값비싼 레드 와인의 묵직하고 금속성에 가까운 향이 먼저 코끝을 찔렀다. 백단향 비누의 짙은 향을 단숨에 덮어 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마침내 그 존재가 보였다. 누군가 내 침대에 있었다.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운 아드레날린이 치솟으며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매트리스 가장자리로 다가가 어두운 실크 시트 아래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자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 보이는 여자. 긴 머리카락은 베개 위로 헝클어진 채 후광처럼 퍼져 있었고, 얼굴은 짙은 장밋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진하고 달콤한 술 냄새를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철저하게 취해 있었다. 방 건너편 벨벳 안락의자 근처에는 커다란 옷 커버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새하얀 실크가 흘러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벗어 던진 웨딩드레스 같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호텔의 보안은 철통같았다. 억만장자를 위한 전용 VIP 펜트하우스에 누군가 실수로 들어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당신 누구야?” 나는 조용한 방 안을 칼처럼 가르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도대체 내 침대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작고 애처로운 신음 소리를 흘리며 시트 위에서 불안하게 몸을 뒤척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눈을 조금씩 떴다. 그녀의 눈은 크게 벌어져 있었고, 술기운에 짙게 흐려져 있었다. 눈물과 멍한 혼란이 뒤섞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잠시 내 맨가슴을 훑더니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일어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나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는 침입자를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야?”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실크 시트가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가늘고 떨리는 쇄골이 드러났다. 그 순간, 내 시선이 그녀의 왼쪽 뺨에 멈췄다. 어둡고 흉측한 보랏빛 멍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흔적이었다. 부드러운 피부 위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상처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슴속에서 낯설고 불청객 같은 분노가 타올랐다. 도대체 누가 이 여자에게 손을 댄 거지?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입술 사이로 작고 히스테릭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가늘고 섬세한 손을 떨며 내게 뻗었지만, 손가락은 술기운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꿈이라는 거 알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목소리는 뭉개져 있었고, 그 안에는 공기마저 떨리게 할 만큼 깊고 처절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꿈이어야만 해요… 당신은 현실에 존재하기엔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그리고… 현실에서는 아무도, 아무도 나를 구하러 와 주지 않거든요.”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보안팀에 연락해 당장 이 여자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굴에 멍이 든 채 바닥에 웨딩드레스를 내팽개치고 내 방에 들어오게 만든 어떤 끔찍한 일을 겪은 게 분명했다. “꿈이 아니야.” 나는 차갑게 대꾸하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방을 잘못 찾아왔어, 아가씨. 프런트에 연락할 거야.” 하지만 손가락이 수화기에 닿기도 전에, 그녀가 갑자기 절박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녀는 높은 침대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맨무릎이 내 발치의 푹신한 러그에 닿았다. “제발…” 그녀가 숨이 막힌 듯 간신히 내뱉었다. 뜨겁고 무거운 눈물 한 방울이 멍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앞으로 손을 뻗어 작고 따뜻한 두 손으로 내 맨무릎을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필사적인 힘이었다. 그녀의 손길에 나는 흠칫 놀랐다.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제발… 딱 한 번만 이런 기분을 느껴 보고 싶어요. 단 한 번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내가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봐 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요. 정말로 나를 원하는 사람이 안아 주는 게 어떤 건지요. 제발 아직은 깨우지 마세요.”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내 무릎 근육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은 내 다리에 기댄 채 계속 떨리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는 너무나 작고 처참할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마치 죄인이 악마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모습 같았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자신이 평소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리는 사업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묵직하게 조여 왔다. “손 놔.” 나는 명령하듯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차갑고 위압적인 기세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녀에게서 멀어져 거리를 두고, 내일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리려 했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내 머릿속의 모든 부분이 보안팀에 연락하고, 그녀를 펜트하우스에서 내보낸 다음,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알아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명백히 술에 취해 있었고,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으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나는 그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낮은 욕설이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정말 미친 상황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이 여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신중하고 계산적인 내 이성은 이 상황을 부주의하게 처리했다가는 끔찍한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간절한 눈을 내려다보다가,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내 무릎을 붙잡은 손에 들어간 힘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내 말 잘 들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도움을 줄 사람을 부르는 동안 침대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짧은 찰나 동안 내 손목을 더욱 꽉 붙잡았다. “제발…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나는 멈춰 섰다. 그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절박함이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았다. 나는 다시 그녀의 뺨에 난 멍을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누군가 이 여자를 심하게 다치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완전히 낯선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알아낼 생각이었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바네사의 시점나는 그날 아침 딸을 지켜보았다.엘레나는 아파트의 커다란 통유리창 근처에 서서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도자기 잔에서 온기를 조금이라도 얻으려는 것처럼.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자세에는 경계심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자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본능이 되살아나며 가슴이 조여 왔다.오늘 하루를 잘 보낼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자, 엘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완벽하게 익힌, 억지스럽고 연습된 미소였다. 그리고는 모든 게 괜찮다고 말했다.엘레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일곱 살이었을 때처럼 몇 분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고, 열이 있는지 이마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는 어른이었다. 밴스 홀딩스에서 맡은 일도 있었고, 자신만의 삶과 짊어져야 할 책임도 있었다.그런데도 일주일 내내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는 것.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알렉산더의 아버지에게 짧고 단도직입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이사회 보고가 시작되기 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곧바로 동의하며 금융 중심지 근처에 있는 회원 전용 다이닝 클럽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나는 휴대전화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상황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결혼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리처드 밴가드가 더는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하고, 마커스가 구조조정 관련 서류를 파고들기 전에 말이다.마커스는 근처 복도에 서서 분기별 보고서 뭉치를 들고 있었다."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나는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코트의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마커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어둡고 예리한 눈빛에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관찰력이 담겨 있었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요."나는 애써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오후 회의 전에 잠깐 바람을 쐬고 싶을 뿐이에요."마커스가 의심을 품거나 밴가드와의 약속 장소
클로이의 시점나는 엘레나의 병실 밖에 서서 문에 달린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안의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창백한 엘레나의 얼굴 위로 차갑고 무미건조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얇은 병원 담요 아래에서 가슴을 얕고 규칙적으로 들썩이며 잠들어 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의 충격과 신체적 탈진을 견디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의사는 이미 엘레나에게 수혈이 필요하며, 가능한 한 빨리 피를 공급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아서에게서는 피를 받을 수 없었다.그는 복도 어딘가에 있는 조용한 예배실 구석에 여전히 앉아 있었다. 방금 알게 된 진실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나는 그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병실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단 한순간에 자신의 인생 전체가 지워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나는 어른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안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지는 사람, 자신의 정체성과 과거, 그리고 스물두 해 동안 소중히 키워 온 아이까지 한꺼번에 빼앗긴 사람의 모습을.그런데 이제 내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나는 차가운 공기가 스며드는 복도에 서서 병원 특유의 기계음이 낮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손바닥에 놓인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자 밝은 화면이 어두운 복도를 비추었다.엘레나의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과 자원, 그리고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바네사.나는 연락처 목록을 열고 지금껏 전화하지 않기를 바랐던 이름을 찾아 아래로 스크롤했다. 손가락은 화면 위에서 망설이며 멈춰 있었고, 심장은 갈비뼈를 세차게 두드렸다.엘레나는 바네사가 이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로 내게 애원하며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엘레나는 몇 달 동안 바네사의 끊임없는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며, 밴스 홀딩스의 그림자 밖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보려고 애써 왔다.하
엘리너의 시점“잠깐만요.”응급실의 숨 막히는 침묵을 뚫고 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늘고 공허한 목소리였다. 그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들은 말을 잘못 이해한 것처럼,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그 말은… 그 아이가 제 친딸이 아니라는 뜻입니까?”의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놓인 금속 차트를 평평하게 누르고 있었다.“그렇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혈액은 따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적혈구 표면 항원이 완전히 맞지 않기 때문에 따님에게 헌혈하실 수 없습니다. 유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아서는 의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몇 초 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병원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기계음마저 얼어붙은 듯, 차가운 병실 공기 속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그러다 갑자기 그의 무릎이 풀렸다.그는 반질반질한 타일 바닥에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아니야…”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날것 그대로의 처절한 고통이 담긴 비명이 산산이 부서져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내 가슴까지 아파 왔다.“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던 강인한 사업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킹 엔터프라이즈를 세우고 10년 동안 바네사와 맞서 싸웠던 날카롭고 자존심 강한 남자가 내 들것 바로 옆에서 무너져 내렸다.그는 완전히 부서진 사람처럼 보였다.“그 아이는 내 딸이야.”그가 벌어진 두 손바닥 사이로 속삭였다. 목소리는 무겁고 떨리는 숨소리에 막혀 있었다.“내가 키웠어. 학교 등록금도 내가 냈고, 자라는 모습도 내가 지켜봤어. 모든 생일을 함께했어… 졸업식도… 아플 때마다 곁에 있었단 말이야…”그의 넓은 어깨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그 아이는 내 딸이야.”나는 얇은 병원
담당 의사는 코트 주머니에서 동의서가 표시된 태블릿을 꺼냈다. 거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적혈구 수치가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밴스 씨.” 의사는 차트를 우리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심각한 급성 빈혈이 정맥 수액 치료에도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장기에 2차적인 손상이 발생하기 전에 산소 포화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앞으로 40분 이내에 직접 수혈을 시작해야 합니다.”“필요한 건 무엇이든 가져가세요.” 아서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서며 즉시 대답했다. 그는 낡은 재킷의 소매 단추를 풀고 팔꿈치 위까지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냈다. “두 단위든 세 단위든 가져가세요.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전부 주겠습니다.”“킹 씨, 먼저 기증자 검사실에서 ABO 혈액형과 Rh 인자를 신속하게 교차 시험해 적합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간호사가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를 따라 이 복도로 쭉 가시면 됩니다.”아서는 나가기 전 다시 내 침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크고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내 손가락을 마지막으로 한 번 꼭 감싸 쥐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금방 돌아오마, 얘야. 조금만 버텨.”나는 아서가 양쪽으로 열리는 병원 문을 통과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넓은 어깨를 꼿꼿하게 편 채 걸어가는 그의 무거운 부츠 소리가 반질반질한 리놀륨 바닥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복도에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실에 홀로 누워 있자,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렸다.지난 10년 동안 바네사는 내게 단 하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입했다. 내 아버지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나약했으며, 자신의 재정 상황이 무너지자마자 우리를 버렸다고.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나는 그가 기업의 비용이나 세간의 추문에 대해 단 한마디도 묻지 않은 채 자신의 피를 내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믿어 왔던 거짓말이 산산이 부서졌다.그는 밴스 홀딩스 때문에 이곳
그의 뒤에서 무거운 양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닫혔다. 병원 복도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소독된 듯한 기계음이 차단되었다.아서가 문턱 안쪽에 멈춰 섰다. 넓은 어깨와 다부진 체격이 출입구를 가득 채웠다. 낡은 가죽 재킷은 바깥의 가을비에 젖어 있었고, 차가운 공기와 오래된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고통스러울 만큼 긴 순간 동안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의 침묵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심장 모니터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는 삐, 삐, 삐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리며 창백한 벽에 메아리쳤다. 마치 시계가 초를 세는 소리 같았다.나는 목이 꽉 막힌 채 그를 바라보았다.10년이라는 세월은 그의 이마와 눈가에 깊은 주름을 새겨 놓았다. 한때 가족사진 속에서 짙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있던 그의 머리는 이제 짧게 잘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은빛 머리카락이 짙게 섞여 있었다.그는 지난 10년 동안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아온 세월에 닳고 지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내가 어린 시절 기억하던 그때와 똑같았다. 따뜻한 헤이즐색 눈동자였다.그의 시선이 내 몸을 훑었다. 손목에 테이프로 고정된 링거 줄, 창백한 팔, 눈 밑 움푹 팬 곳에 짙게 드리운 그늘까지 하나하나 살펴보았다.고통스럽고 날카로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엘레나…….”그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숨을 내쉬듯 내 이름을 불렀다.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세 걸음 만에 작은 병실을 가로질러 들것 옆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긴 뒤 그 위에 몸을 낮췄다.그가 손을 뻗었다. 크고 거친 손이 아주 잠깐 내 손 위에서 망설이다가, 이내 차가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이게 대체 무슨 꼴이니…….”그가 중얼거렸다. 애써 억누르려는 감정이 목소리에 팽팽하게 배어 있었다.“세상에, 엘레나…… 이렇게 말랐잖니. 완전히 지쳐 버린 얼굴이구나.”눈 뒤쪽에서 뜨거운 것이 날카롭게 치밀어 올랐다. 나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의 손에 잡힌 내 손바
작고 어두운 응급실 안에는 심장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 삐, 삐 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나는 얇은 매트리스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왼팔의 정맥으로 차가운 수액이 흘러들어 오면서 손이 욱신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가슴은 지치고 얕은 호흡에 맞춰 천천히 오르내렸다.엘레나는 아서가 자신이 원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클로이에게 말했다.“그 사람뿐이야, 클로이.”나는 속삭였다. 메마르고 쉰 목소리가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방 안의 고요함을 갈랐다.“바네사는 이 일을 나에게 불리하게 이용할 거야. 마커스는 밴스 홀딩스의 사람이잖아. 하지만 아서는…… 아서는 내 아버지야. 이 도시에서 밴가드와의 합병에 이해관계가 없는 유일한 사람이야. 아버지에게 전화해 줘. 제발.”클로이는 힘겹게 침을 삼키며 내가 암호화된 메모에 숨겨 놓았던 전화번호를 적은 작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커튼이 쳐진 방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클로이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벨이 세 번 울렸다. 길고 고통스러운 신호음이 이어질 때마다 내 피는 차갑게 식어 갔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번호를 바꾸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망가진 과거를 뒤로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지도 몰랐다.그리고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거칠고, 세월과 고난에 닳아 있었다. 하지만 아서 킹 특유의 목소리만큼은 변함없이 내 오래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단숨에 불러일으켰다.“아서 킹 씨인가요?” 클로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긴장한 채 물었다. “저는 클로이라고 해요. 따님인 엘레나와 가까운 친구예요.”전화기 너머에서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스러울 만큼 긴 2초의 침묵이 흐른 뒤, 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짜증에서 날카로운 경계심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아서는 즉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