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우는 직감했다.그건 책이 아니라 회사에서 변승현의 서명이 시급한 서류일 거라고.변승현은 집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아빠는 일이 끝나면 저와 영준이랑 꼭 놀아줘요. 그림도 같이 그리고, 비행기 체스도 하고. 아! 글씨도 가르쳐줘요. 엄마, 아빠가 엄마 이름 썼는데 되게 예뻤어요!”심지우는 순간 멈칫했다.“그런데...”윤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아빠가 아픈 것 같아요.”심지우는 고개를 숙여 윤영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알았어?”“자꾸 기침해요. 그리고 제가 봤는데, 아빠 손등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어요. 물어봤
윤영은 입을 삐죽 내밀고 살짝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심지우를 바라보았다.“이런 것도 고민해야 해요?”심지우는 순간 멍해졌다.“저는 당연히 아빠한테 주죠!”윤영은 당당하게 말했다.“지강 삼촌은 아무리 잘생겨도 그냥 삼촌일 뿐이에요. 제가 원하면 앞으로 멋진 삼촌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빠는 세상에 딱 한 명뿐이잖아요!”심지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윤영은 반짝이는 눈으로 심지우를 바라보며 또렷하고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엄마랑 아빠가 싸워서 헤어졌다는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오늘 투표가 엄마
하지만 윤영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최근 들어 변승현은 두 아이에게 점점 더 마음을 쓰고 있었고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가까워지는 건 피할 수 없는 혈연의 본능이었다.지강 역시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며 아이들의 친부와 비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알겠어요.”지강은 심지우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럼 윤영이가 직접 결정하게 합시다. 사흘 뒤, 아침 9시에 부송 그룹 주주총회가 열려요. 지우 씨, 반드시 윤영이와 함께 와서 그 한 표를 행사해 줘야 해요.”심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강은 윤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그리고 곧 시선을 심지우에게 돌렸다.“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심지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온주원이 성큼 다가왔다.“지 선생님,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우리 다 친구 사이인데, 무슨 말을 굳이 우리 몰래 지우 씨한테만 하려는 거예요?”지강은 그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미안합니다. 사적인 일이에요.”온주원은 곧바로 심지우를 바라보았다.심지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온주원에게 말했다.“먼저 윤영이 데리고 올라가요. 곧 이연이 돌아올
진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변승현은 고은미를 담담하게 한 번 흘깃 본 뒤, 시선을 돌려 진태현에게 말했다.“간다.”진태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마치 최선을 다한 듯한 표정으로 변승현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이바흐가 운귀를 막 벗어난 지 고작 십여 초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한 대의 벤틀리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윤영을 데리고 씻기러 올라가려던 심지우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지강은 차에서 내렸다.밤하늘 아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청아한
한여름의 일요일 밤, 보름달이 밤하늘에 높이 걸려 있었고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운귀의 정원은 달빛을 즐기며 차를 마시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저녁 식사 후, 몇몇 사람은 정원 안의 정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진순영은 아기 침대에 누워 자기 손가락을 빠느라 바빴다.심지우와 고은미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은미 손에는 오늘 옛집에서 찾아낸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지우야, 이거 봐. 너 그때 도서관에서 책 보고 있었잖아. 햇빛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와서 네 얼굴에 딱 떨어졌는데, 완전 자연 반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