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네가 충격받을까 봐 지금까지 말 안 한 거야.”영은은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힘없는 척 머리를 짚었다.“괜찮아. 알고 있는 거 다 말해.”남우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눈빛에 영은은 겁먹은 듯 목을 움츠렸지만, 곧 억울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낮게 말했다.“네가 내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 그래도 거짓말 아니야. 내가 구출됐을 때는 은희 씨가 이미 묶인 데서 풀려나 있었어. 하세준이 은희 씨한테 대하는 태도도... 다른 사람하고 완전히 달랐어.”다른 사람과 달랐다는 말에 남우의 가슴이 깊게 조여 왔다.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손가락 마디가 소리를 낼 정도였지만 남우는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어떻게 달랐는데?”영은은 망설이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남우의 눈을 보고는 결국 말을 꺼냈다.“하세준이 은희 씨한테 앞으로 자기 옆에서 그 집 안주인처럼 지내라고 했어. 은희 씨가 자기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도 했고. 나도 너무 무서워서 더 듣지는 못하고 바로 나왔어.”남우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영은은 고개를 푹 숙였다. 꼭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가엾은 표정을 지었다.“정말 잘못 들은 거 아니야?”남우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미세하게 떨렸다.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내가 너와 은희 씨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이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정말 거짓말 아니야. 난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있는 게 싫었을 뿐이야. 은희 씨는... 어쩌면 예전부터 세준이랑 연락하고 있었을지도 몰라.”그 말은 남우가 마음 한쪽에서 품고 있던 의심을 그대로 건드렸다.은희가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영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그렇다면 은희와 세준 사이에 남우가 모르는 관계가 있다는 뜻이었다.은희가 그토록 단호하게 이혼을 요구했던 일에도 세준이 적지 않게 관여했을지 몰랐다.
‘분명 남우가 선택한 건 나였는데.’‘난 정말 남우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영은은 고개를 저으며 한층 약한 목소리로 답했다. “없었어. 같이 갇혀 있는 동안 은희 씨도 아무 말 안 했어.”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당시 방 안은 어두워 서로의 상태가 잘 보이지 않았고, 은희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 뒤에 은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영은도 제대로 들을 생각이 없었다.“다시 잘 생각해 봐.” 남우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배어 나왔다.영은은 몸을 흠칫 떨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나 정말 몰라. 그냥 너무 무서웠어. 하세준이... 너무 무서워서... 기억도 잘 안 나.”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남우는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은희가 다친 건 알고 있어?”“은희 씨가 다쳤다고? 많이 다쳤어? 혹시 나 때문에... 나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영은의 반응을 보면 은희가 다쳤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 적어도 영은이 구출되기 전까지 은희에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는 뜻이었다.“다친 건 아니야. 몸이 좀 많이 쇠약해졌어.”영은이 자책하는 기색을 보이자 남우도 은희의 상황을 사실대로 말했다.영은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빠르게 받아들였다.“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어.”남우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럴 줄 알았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영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린 듯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그냥... 하세준이 은희 씨를 정말 해칠 것 같지는 않았어. 두 사람 사이가...”“두 사람 사이가 뭐?” 남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식었다. 눈빛에도 살기가 어렸다.영은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한참 버티다 낮게 말했다. “말 못 해. 정말 말하면 안 돼.”남우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영은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말해. 누가 너 협박한 거면 내가
남우는 바닥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싸늘한 비웃음이 입가에 걸렸다.이미 남우에게 붙잡힌 이상 저들이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었다.“끝까지 말 안 하겠다는 거야?” 남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혀 깨물면 끝날 것 같아? 그렇게 쉽게 끝내 줄 생각 없어.”그중 한 명이 이를 악물더니 제 혀를 깨물려 했다.하지만 남우의 손이 더 빨랐다. 턱을 거칠게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이 가해졌다.“죽고 싶어? 마음대로 안 될 거야.” 남우의 눈빛이 잔혹하게 식었다. “은희를 건드렸으면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도 알아야지.”남자는 턱이 붙잡힌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나머지 사람들의 안색은 더 하얗게 질렸다. 몸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떨렸다.남우는 손을 놓고 저들을 차례로 훑어본 뒤 부하에게 손짓했다. “가둬 둬. 천천히 캐내. 대신 죽게 두지는 마.”부하들은 곧바로 사람들을 끌고 사라졌다.세준이 이유도 없이 은희를 돌려보냈을 리 없었다. 분명 따로 꾸미고 있는 일이 있을 터였다.붙잡힌 사람들은 세준에게 목숨까지 내놓은 부하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남우는 조금이라도 단서를 얻어낼 생각이었다.저 사람들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남우는 영은에게도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영은 역시 세준에게 붙잡혀 있었던 사람이었다.세준에게 납치됐다가 구출된 뒤로 영은의 상태는 계속 불안정했다. 안색은 초췌했고 작은 인기척에도 겁먹는 기색이 역력했다.영은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있다면 남우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병실 문을 열자 영은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있다가 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급히 돌렸고, 남우를 알아본 눈가가 금세 젖었다.“남우야...” 영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직 납치됐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남우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최대한 추궁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눌렀다.“물어볼 게 몇 개 있어.”영은은
“겉으로 드러난 외상은 없어. 맥박이랑 혈압이 조금 낮긴 한데 정상 범위 안이야.”효찬은 검사를 이어 가며 낮게 말했다.남우의 미간이 더 깊게 좁혀졌다. “그런데 왜 쓰러졌어? 아까 상태는 단순히 기운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어.”효찬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은희의 몸을 계속 살폈다.복부를 조심스럽게 눌러 보던 효찬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뭔가를 발견한 듯한 반응이었다.“몸이 많이 약해졌어. 심하게 놀란 데다 피로가 겹친 것 같아. 충분히 쉬면 차차 회복될 거야.”실제로 은희의 몸은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뚜렷한 이상은 잡히지 않았다. 효찬조차 자신의 의학적 판단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그와 별개로, 효찬은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렸다.은희의 아이가 아직 살아 있는 듯했다. 그 사실은 효찬마저 놀라게 했다.효찬은 남우와 은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만큼은 남우에게 말할 수 없었다.괜히 남우가 다시 아이를 없애려 들지도 몰랐다. 남우의 강한 집착을 생각하면, 은희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남우는 효찬의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냥 몸이 약해진 거라고? 아까 은희 상태가 그 정도로 보였어? 효찬아,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효찬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남우를 바라봤다. “난 의사야. 환자 상태를 숨길 이유 없어. 못 믿겠으면 병원으로 데려가서 정밀검사 받아.”남우도 효찬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효찬이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당장 생명에 위험이 있는 상태는 아닐 터였다.그런데 세준이 정말 은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지나치게 이상했다. 남우의 머릿속을 불길한 생각 하나가 스쳤다.‘혹시 하세준이랑 은희가 짜고 한 일인가?’ 남우는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억눌렀다.“그럼 언제쯤 깨어나?”“오래 안 걸릴 거야. 지금은 쉬는 게 먼저야.” 효찬은 왕진 가방을 정리하다 은
은희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버텨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한계를 넘어선 뒤였는지도 몰랐다.무엇이 자신을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는지, 정작 은희 자신도 알지 못했다.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은 여전히 이어졌지만, 겉으로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이 모습만 봐서는 은희가 다쳤다고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세준이 쓴 수법은 잔인할 만큼 교활했다.그곳에서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세준은 은희를 풀어주었다.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은희에게는 그 이유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세준의 부하들은 은희를 대문 앞까지 데려다 놓고 돌아서려 했다. 직접 은희를 데려왔다는 건 자신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최근 남우가 세준을 찾느라 온갖 곳을 뒤지고 있었으니, 이들도 달아날 길은 없을 것이다.은희를 본 남우는 곧장 다가와 휘청이는 몸을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은희야, 괜찮아?”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은희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남우를 밀어냈다.‘그때 소영은을 택한 건 너였잖아. 이제 와서 나를 생각하는 척은 왜 하는데...’은희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도 가늘게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지옥 밑바닥에서 겨우 살아서 나온 사람 같았다. 지금은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은희의 상태를 본 남우도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채 은희를 안으려 했지만, 은희에게는 밀어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검사부터 받자.”겉으로만 보면 몸에 큰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은희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을 겪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은희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힘이 풀리며 남우의 품으로 쓰러졌다.남우에게 기대고
은희는 주사기를 뚫어지게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약이야?”세준의 미소가 더 기괴해졌다. 손에 든 주사기를 천천히 흔들어서 은희에게 보여주었다.“아주 특이한 약물이라고 들었어. 겉으로는 뚜렷한 상처를 남기지 않고, 일반적인 검사만으로는 원인을 바로 특정하기도 어렵다더군. 다만...”세준은 일부러 말을 끌며 잔인하게 웃었다.“몸이 실제로 다친 것처럼 극심한 통증과 혼란을 느끼게 만든대. 겉으로 흔적이 거의 없어도 당사자는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겠지.”은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정체가 무엇이든 정상적인 약일 리 없었다.세준이 이런 것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은 은희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너 정말 미쳤어.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거야?”“왜냐고?”세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눈에는 뒤틀린 증오가 가득했다.“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하남우가 아무것도 못 해서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싶으니까.”“제일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기분을 하남우도 느껴 봐야 해. 네가 그렇게 남우를 사랑한다면 대신 견뎌 봐.”말을 마친 세준은 은희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부하가 들고 있던 주삿바늘이 은희의 팔로 다가왔다.은희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손발이 묶여 있어 빠져나올 수 없었다.“하세준, 너도 반드시 대가 치를 거야. 하남우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고!”은희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공포와 긴장 때문에 말끝까지 떨렸다.세준은 차갑게 웃었다. 준비해 둔 약물이 결국 은희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대가? 하남우더러 와 보라고 해. 이제 하남우가 나한테 뭘 할 수 있는지 나도 보고 싶으니까.”약물이 들어간 뒤 은희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려지고 시야가 일그러지는 듯했다. 멀리서 세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고은희, 잘 버텨 봐.”버티라는 말과 달리 은희를 기다리는 건 통증과 공포뿐이었다.은희는 이 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