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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편 몰래 만나는 남자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20:40:01

“개인적으로 차강현 같은 개새끼들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개새끼.

너무나도 반듯한 얼굴에서 거침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서인지, 아니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서인지 잠깐 귀를 의심했다.

백도겸은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욕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저 하던 말을 이어 갔다.

“가르쳐 줄까 싶어서요. 자기 주제라는 게 뭔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감정이 지나치게 배제되어 있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남의 등에 업혀 올라가는 법을 배웠으면.”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내려오는 법도 배워야겠죠.”

백도겸의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더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쪽으로 밀었다.

“…….”

휴대폰이었다.

차강현이 모르는 연락 수단.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아주 작은 틈.

“남편 눈에 띄지 않게 보관하세요. 괜히 들켜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물었다.

“말했잖습니까. 입조심하라고.”

백도겸은 소파 팔걸이에 느슨하게 기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다예요?”

“Verdant Capital에서 차강현이 추진 중인 건에 관여할 일이 생길 겁니다. 정확히는, 그렇게 만들 생각이고요.”

Verdant Capital.

백도겸이 대표로 있는 VERDANT GROUP의 핵심 투자회사였다. 글로벌 기업 인수와 전략적 지분 투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 그런 회사가 먼저 투자 의향을 내비친다면, 자금줄이 막힌 차강현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잠깐만요. 그러면…….”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둘 맞물렸다.

차강현은 지금 돈이 필요했다. 우림리테일의 투자를 끌어오지 못하면 사업 계획이 흔들릴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해외의 거대 투자회사가 손을 내민다면?

그는 좋다고 기회를 붙잡으려 들 것이다. 투자 조건이 까다롭든 말든, 일단 필요한 자금부터 확보하려고 하겠지.

그런데.

“……정말 투자하실 건가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럴 리가.”

그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연우연 씨는 적당히 모르는 척 해야겠죠. 연기력이 꽤나 필요할겁니다.”

“…….”

문득 그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애초에 나를 돕겠다고 나선 이유가, 그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차강현 같은 인간이 싫어서가 맞을까.

대체 어디까지 생각해 둔 걸까.

차강현에게 무엇을 얻어 내려고 하는 걸까.

돈을 미끼로 상대를 끌어들인다는 발상부터가 평범한 사람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다고 허풍을 떠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 제가 할 일이 그거면 되나요?”

우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제일 중요한 거 하나 있네요.”

“네?”

“화분에 물 잘 주세요.”

화분? 뜬금없이 무슨 화분 타령을.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이 병원에 있는 화분은 전부 저희 아버지가 기부하신 겁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식물이거든요. 병실마다 하나씩 두셨죠.”

“아……네.”

궁금한 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적당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모든 걸 굳이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

윤혜원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 돌팔이 개무당.”

“뭐라고?”

옆자리에 앉은 미숙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혜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 무당년의 멱살을 틀어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그 입만 번지르르한 소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삼 년 전이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하나뿐인 외동딸이 차강현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혜원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없는 집안에서 제 힘으로 일어서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나름 가상했지만 딸을 가진 어미의 촉이라는 게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어딘가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신점을 보러 갔다. 주변에서 용하다고 입을 모으던 곳이었다. 예약이 밀려 한참을 기다려 들어선 곳이었다.

ㅡ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야!’

혜원은 그 말을 듣고도 곧장 믿지는 않았다.

딸의 혼사였다. 아무리 용하다는 점집이라도 덜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당은 한술 더 떴다.

ㅡ ‘지금 이놈을 놓치면 안 돼. 둘이 부부 연을 맺어야 딸년한테 복이 들어와. 시집을 가야 팔자가 피는 사주야. 남자 복이 아주 크게 들어온다고.’

무당집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이에게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혜원은 그날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이었지만, 혜원은 벌써부터 손주를 안아 볼 생각에 마음이 잔뜩 부풀었었다.

그런데 식을 올리자마자 아이를 잃었다. 거기에 평생 큰 병치레 한 번 없이 자란 우연이 지금 사고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순 돌팔이 개무당…….”

“아이고, 무당 욕을 그렇게 해 대면 귀신이 듣고 쫓아오겠다.”

“내가 아주 제대로 당했어.”

점괘에 당했고, 그럴듯한 말에 당했고, 무엇보다 제 딸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기 자신에게 당했다.

그 생각을 하자 속이 뒤집혔다.

“이런 육시럴!”

“아이고. 오늘 왜 이래, 정말.”

차가 도심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비탈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자 창밖 풍경이 달라졌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 대신 키 큰 소나무들이 도로 양옆을 채웠고, 산허리를 감싼 안개가 차창 너머로 희미하게 흘렀다.

계룡산 자락, 산등성이 중턱이었다.

민가 하나 찾기 어려운 외진 곳에 낡은 기와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문 옆에는 붉고 노란 천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처마 밑에 매달린 방울이 바람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

차에서 내린 혜원이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대문 위로 큼지막한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계룡산 선녀당].

“신받은 지 1년도 안 된 선녀무당이라는데, 용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예약도 겨우 잡았어. 얼마전에 최태윤이도 왔다 갔대.”

그렇다. 무당 욕을 그렇게 해대며 도착한 곳은 바로 무당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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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실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뭐라고요?”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되묻고 말았다. “아니……그게, 무슨.” 말끝을 흐리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대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설마. 차강현.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때 되면 당신 남편이 수거해 가겠죠.” 백도겸의 확신이 내 추리에 쐐기를 박았다. 수거해 간다니. 그 말은 녹음기가 지금도 병실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차강현은 내가 퇴원할 때쯤 그걸 직접 가져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계속 작동하고 있을 테고. “…….” 내가 잠든 사이에 누가 병실에 들어왔는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심지어 혼잣말로 무슨 생각을 털어놓았는지까지 전부 기록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이유를 떠올릴수록 더 끔찍했다. 남편이 아내의 병실에 녹음기를 설치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내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동안에도, 정신을 차린 뒤에 벌어지는 일들까지 몰래 엿들으려 했다는 건가.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털어놓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의식을 되찾은 첫날, 백도겸과 나눴던 대화도. 전부.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늦게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차강현은 대체 무엇을 위해? 차강현의 머리통에 든 생각이 무엇이던간에 그가 모두 알아버린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끝장이었다. 차강현은 내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더는 방심하지 않을 테니까. 증거를 없애고, 말을 맞추고, 자신에게 불리한 흔적을 지우겠지. 천하의 교활한 인간이니까. 그는 그렇게 살아 남았으니까. “하지만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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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10. 남편의 친절에는 이유가 있다

    백도겸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ㅡ “VIP 병동 18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른쪽 끝에 보안 데스크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제 이름을 대세요. 안쪽 전용 복도로 안내해 줄 겁니다.” ㅡ “복도 끝에 별도 상담실이 있습니다. 문에 적힌 번호는 1807호. 거기서 뵙죠.” 그때였다. 징징징. 손에 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 깜짝 놀라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재중 전화 알림과 함께 문자가 연달아 떠 있었다. [매너콜]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신 동안 강현 씨(010-XXXX-XXXX) 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2건)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지금. 나는 서둘러 통화 기록을 열었다. 화면에는 차강현의 부재중 전화 두 건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는 곧장 차강현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엉켜 들었다. ㅡ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강현 씨. 전화했었어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ㅡ “어, 우연아.” ㅡ “너 좋아하는 멜론 사러 왔는데, 유바리 멜론이 다 팔렸다네.” 너무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래요? 아쉽네.” ㅡ “백화점도 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 다른 멜론이라도 괜찮아?”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응. 다른 것도 괜찮아요.” ㅡ “그럼 적당한 걸로 사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자마자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바리 멜론이라.” 참 다정하기도 하지.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하나를 사려고 문 닫을 시간까지 발품을 파는 남편이라니. 누가 봤다면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몇 달 전이었다면 그랬을 테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9. 업보 청산

    “…….”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백도겸 대표, 투자회사 대표, 국내외 부동산 투자, 호텔 및 물류 사업. 기사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규모가 컸고, 그가 투자한 회사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첫 번째 기사를 눌렀다. 〈Verdant 백도겸 대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업계 주목〉 두 번째 기사에는 그가 인수한 호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세 번째 기사에는 해외 물류 기업과의 협력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 나는 사진 속 남자를 확대했다. 병실에서 마주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꽤 정확하게 짚어 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그 사실을 들켰다는 걸 남편은 아직 모른다. “……백도겸.”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봤다. 그래서 차강현이 그토록 빌빌 기었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덧붙였다. [흥신소].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타났다. 사람 찾기, 외도 증거 수집, 개인 신원 조사, 기업 관련 조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차강현의 뒤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하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결혼 전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던 것, 투자 유치를 위해 내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였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인 일들까지 모조리 다 파헤칠 수 있을까. 다만 흥신소를 통해 얻어 낸 증거가 법정에서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나는 검색창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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