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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피할 수 없는 조우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09:53:54

“신받은 지 1년도 안 됐다고?”

혜원이 되물었다.

“그래. 사람 얼굴만 보면 속에 있는 생각까지 줄줄 읊는다던데?”

미숙의 말에 혜원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 얼굴만 보면 속에 있는 생각까지 안다고?

그럼 어디 한번 알아맞혀 보라지.

제 딸을 사지로 밀어 넣은 어미의 속이 어떤지.

잠시 후, 안쪽에서 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딸랑.

혜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머, 선녀님이 벌써 아셨나 봐.”

미숙이 움찔하며 혜원의 팔을 붙잡았다.

“뭘 알아. 우리가 온 줄 알고 방울 흔드나 보지.”

“아이고, 너는 입만 열면 초를 치니.”

미숙이 혀를 찼다.

그 순간, 신당의 문이 열렸다.

***

“…….”

혜원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신당 안에는 촛불과 향로, 색색의 천으로 장식한 신단이 놓여 있었다. 벽 한쪽에는 이름 모를 신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향 연기가 천장 가까이에서 가늘게 휘돌았다.

“여우가 흰 털을 뒤집어썼다고 양이 되는 건 아니지.”

그런데 혜원의 엉덩이가 방석에 닿기도 전에 선녀무당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

그 눈길이 어찌나 깊고 섬뜩한지, 혜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혀는 달고, 눈은 웃는데…… 속에는 발톱이 들었어. 제 발톱에 피 묻히기 싫으니 남의 살부터 물어뜯는 놈이지.”

선녀무당의 손끝이 무릎 위를 천천히 쓸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을 한 올씩 풀어내듯,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직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

선녀무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듯 흐릿하던 눈동자가 문득 한곳에 박혔다.

“여우가 토끼를 물고 제 굴로 달아나는 줄 알았더니…….”

입술 끝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산 밑에 용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네.”

“네?”

무슨 소리야.

미숙과 혜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걸 어쩌나. 산에 주인이 따로 있는 줄도 모르고.”

“…….”

“쯧쯧, 쯧쯧쯧…….”

손에 쥔 방울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짤랑, 짤랑. 맑아야 할 방울 소리가 어쩐지 음산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걸 어쩌나. 괜히 덤볐다가 개죽음이나 당하게 생겼네.”

“개, 개죽음이요?”

혜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부적이라도 써야 해요? 아니면 굿이라도 해야 하나요? 뭐든 당장 할게요!”

짤랑, 짤랑짤랑! 짤랑!

방울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사납게 휘저었다. 선녀무당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러다 돌연, 방울을 흔들던 손이 뚝 멈췄다.

“소용없어. 죽는대도 덤빈다네.“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허이구. 계집 하나 잘못 물었다가 여우 꼬리도, 용의 비늘도 죄다 뽑히게 생겼네.”

***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온 검은 세단이 해원국제도시로 향했다.

베르단트 그룹이 한국에 첫 번째 플래그십 호텔을 세울 부지로 낙점한 곳이었다. 바다를 끼고 뻗은 국제업무지구와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접근성, 글로벌 기업을 겨냥한 비즈니스 수요,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도시가 품은 성장 가능성까지. 검토할 조건은 충분했다.

“부회장님. 해원 진입까지 약 십오 분 남았습니다.”

운전석에서 수행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좌석에 앉은 백도겸은 대답 없이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창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보고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건 오 년 만이었다. 그사이 서울의 건물들은 더 높아졌고, 해원은 도시의 외곽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진 채 국제 비즈니스의 중심을 자처하고 있었다.

지도 위에서 몇 번이고 확인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도겸에게 감상에 잠길 여유는 없었다.

이번 사업은 단순히 객실을 늘리는 일이 아니었다. 호텔을 중심으로 레지던스와 컨벤션 시설을 연결하고, 그룹의 투자·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해 아시아 시장의 거점을 확보하는 프로젝트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수년의 시간과 막대한 자본이 함께 묶일 수 있었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비서실장이었다.

“말씀하시죠.”

ㅡ “부회장님, 현지 파트너 측에서 요청한 미팅은 내일 오전으로 확정됐습니다. 토지 매입 건은 법무팀이 계약 조항을 다시 검토 중이고, 인허가 관련 자료는 오늘 저녁까지 전달받기로 했습니다.”

“토지 매입 건.”

도겸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ㅡ “예.”

“최종 소유주가 누구죠?”

ㅡ “법인 두 곳을 거쳐 개인에게 연결됩니다. 등기상 소유주와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자가 다를 가능성이 있어 확인 중입니다.”

“해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리죠.”

도겸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차 안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엔진 소리와 노면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만이 공간을 채웠다. 도겸은 별다른 표정 없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차창 밖으로 바다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회색빛 수면 위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졌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세단이 국도로 접어들었다. 해원국제도시로 향하는 길이었다. 한쪽으로는 낮은 야산이 이어졌고, 반대편으로는 바다가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차량 통행이 뜸한 도로 위로 검은 세단이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그때였다.

“부회장님!”

고개를 들 틈도 없었다.

끼이익—!

차체가 급하게 한쪽으로 쏠렸다. 도겸의 손에서 태블릿이 미끄러져 내렸다.

쿵!

둔탁한 충격음이 차체를 타고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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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10. 남편의 친절에는 이유가 있다

    백도겸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ㅡ “VIP 병동 18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른쪽 끝에 보안 데스크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제 이름을 대세요. 안쪽 전용 복도로 안내해 줄 겁니다.” ㅡ “복도 끝에 별도 상담실이 있습니다. 문에 적힌 번호는 1807호. 거기서 뵙죠.” 그때였다. 징징징. 손에 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 깜짝 놀라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재중 전화 알림과 함께 문자가 연달아 떠 있었다. [매너콜]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신 동안 강현 씨(010-XXXX-XXXX) 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2건)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지금. 나는 서둘러 통화 기록을 열었다. 화면에는 차강현의 부재중 전화 두 건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는 곧장 차강현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엉켜 들었다. ㅡ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강현 씨. 전화했었어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ㅡ “어, 우연아.” ㅡ “너 좋아하는 멜론 사러 왔는데, 유바리 멜론이 다 팔렸다네.” 너무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래요? 아쉽네.” ㅡ “백화점도 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 다른 멜론이라도 괜찮아?”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응. 다른 것도 괜찮아요.” ㅡ “그럼 적당한 걸로 사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자마자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바리 멜론이라.” 참 다정하기도 하지.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하나를 사려고 문 닫을 시간까지 발품을 파는 남편이라니. 누가 봤다면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몇 달 전이었다면 그랬을 테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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