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와서 말하라고?"
승아가 화면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서린은 메일을 한 번 더 읽었다. 두 줄. 차도혁다운 문장이었다. 필요한 말만 하고, 상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정해 준다.
"안 가."
"당연히 안 가지. 가면 뭐, 그 사람이 '돌아와' 한마디 하고 끝낼 텐데. 그 사람 속셈은 뻔해. 네가 직접 오면 이기는 거고, 안 오면 이혼 안 해 주는 거고."
"그럼 협의 말고 다른 길로 가."
승아가 서린을 보았다.
"소송?"
"응."
"서린아, 재판이혼은 사유가 있어야 돼. 바람, 폭력, 유기, 그런 거. 차도혁이 너 때렸어?"
"아니."
"바람은? 유세아랑 뭐 증거 있어?"
"없어. 공항 기사 하나. 그걸로는 안 되겠지."
"안 되지. 첫사랑이랑 공항에서 웃었다는 걸로 외도 인정해 주는 판사는 없어."
서린은 가방에서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검정 수첩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이건 돼?"
승아가 수첩을 받아 펼쳤다. 첫 장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3년 전 9월. 그 아래로 날짜와 시각이 한 줄씩 빼곡하게 이어졌다.
「9. 24. 01:40」
「9. 25. 귀가 안 함」
「9. 26. 02:15」
「9. 27. 23:50」
한 장, 두 장, 열 장. 승아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수첩은 거의 끝까지 차 있었다. 마지막 줄은 사흘 전이었다. 3주년 다음 날 새벽.
「9. 24. 01:17」
"……이게 뭐야."
"그 사람 귀가 시각."
서린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처음엔 그냥 기다리느라 적었어. 몇 시에 오는지 알면 덜 기다려도 될까 싶어서. 근데 알아도 덜 기다려지진 않더라. 그래도 계속 적었어. 습관이 돼서."
승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어락 앱 기록도 있어. 내 명의로 등록된 거라 내가 뽑을 수 있어. 3년치. 수첩이랑 맞춰 보면 하루도 안 틀릴 거야."
승아가 수첩 뒷장을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에 서린이 따로 정리해 둔 숫자가 있었다.
「3년. 1,095일.
자정 전 귀가 41일.
귀가 안 함 212일.
같이 저녁 먹은 날 9일.
그중 둘만 먹은 날 0일.」
승아는 한참 그 숫자를 보다가 수첩을 덮었다. 목이 잠겨 있었다.
"……너 이거 3년 내내 혼자 세고 있었어?"
"응."
"미친놈."
"나?"
"아니, 그 남자."
승아는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법 840조 6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 3년간 부부 공동생활의 실질이 없었다는 건 충분히 된다. 이거 붙여서 답장 보낼게. 협의 거부하시면 재판으로 가겠다, 증거 목록 첨부."
"응."
"진짜 보낸다?"
"보내."
승아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 * *
그 메일이 차도혁의 책상에 올라온 것은 오후 네 시였다.
변호사가 직접 들고 올라왔다. 도혁은 회의 자료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사모님 쪽 답입니다. 첨부 자료가 좀 있어서 출력해 왔습니다."
도혁은 서류를 받았다. 첫 장은 짧은 답장이었다.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재판상 이혼을 청구하겠다는 내용. 그는 코웃음을 쳤다. 두 번째 장을 넘겼다.
「증거 1. 피고 귀가 시각 기록 (혼인 다음 날부터 현재까지)」
표였다. 날짜와 시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는 첫 줄부터 읽었다. 3년 전 9월 24일, 새벽 1시 40분. 그날이 기억났다. 결혼식 다음 날이었다. 그는 신혼여행을 미루고 회사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날도 깨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날 새벽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던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그 뒤로 3년 동안 매일 그렇게 했다.
그는 다음 장을 넘겼다. 또 넘겼다. 넘길 때마다 날짜가 쌓였다. 새벽 한 시. 새벽 두 시. 귀가 안 함. 귀가 안 함. 새벽 한 시 반.
어떤 줄 옆에는 괄호로 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생). 두 번째 해에도, 세 번째 해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둘 다 「귀가 안 함」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는 그 날짜를 지금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맨 마지막 장에 요약이 있었다.
「자정 전 귀가 41일. 귀가 안 함 212일. 같이 저녁 먹은 날 9일. 그중 둘만 먹은 날 0일.」
"0일."
도혁이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변호사가 헛기침을 했다.
"전무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정도 기록이면 재판으로 가도 저쪽이 불리하지 않습니다. 외도나 폭력은 없지만 법원은 이런 걸 파탄의 근거로 봅니다. 게다가 저쪽은 재산분할도 위자료도 안 받겠다고 하니 재판부 입장에서는 더더욱—"
"알았습니다."
"그럼 협의로 방향을 바꾸시는 게—"
"알았다고 했습니다. 나가 보세요."
변호사가 나갔다. 도혁은 혼자 남아 표를 내려다보았다.
사무실 안에는 공기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그는 목에 걸린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오늘 아침에도 매듭은 세 번 만에 겨우 맞았다.
둘만 먹은 날 0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결혼기념일이라든가, 생일이라든가.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그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두 번째. 할아버지 생신과 겹쳐 본가에서 가족이 다 모였다. 세 번째.
식은 스테이크. 꺼진 초. 두 개의 와인잔.
그리고 은색 리본 상자. 그 안에 있던 병은 지금도 서재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아직 그 병을 치우지 못했다.
그는 서류를 덮었다.
* * *
도혁은 일찍 퇴근했다. 여섯 시였다.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는 거실을 지나 복도 끝의 방 앞에서 멈췄다. 아내의 방이었다. 결혼 첫날부터 두 사람은 방을 따로 썼다. 그가 그렇게 정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따랐다.
3년 동안 그는 이 문을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침대는 시트까지 걷혀 매트리스만 남아 있었다. 옷장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빈 옷걸이만 나란히 걸려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립스틱 하나, 머리끈 하나 없었다.
책상 서랍 하나가 덜 닫혀 있었다. 열어 보니 비어 있었다. 바닥 판에 연필 자국 몇 줄만 가늘게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적다가 종이 밖으로 삐져나간 선이었다. 수첩만 한 크기였다.
그리고 냄새가 없었다.
도혁은 방 한가운데 서서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3년을 산 방인데. 여자가 3년을 잔 방인데. 향수도, 화장품도, 샴푸 냄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둔 채 떠났는지 가을 저녁 공기만 차갑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 방에는 아무 냄새도 없었던 걸까.
결혼 첫 주였던가. 어머니가 식탁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향수 뿌리지 마라. 도혁이가 냄새에 예민하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예민한 건 냄새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그 뒤로 3년. 아내에게서 향이 난 적이 있었던가.
결혼하고 첫 설이 떠올랐다. 본가 부엌에서 전을 부치던 아내 뒤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기름 냄새만 났다. 그는 그게 아내의 냄새인 줄 알았다. 그 뒤로 더 가까이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기억할 만큼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그는 빈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잠깐 앉았다. 스프링이 낮게 삐걱였다. 이 방에서 아내는 새벽마다 도어락 소리를 기다리며 수첩을 폈을 것이다. 그 소리가 나면 한 줄을 적고 불을 껐을 것이다. 그는 이 방의 불이 꺼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혁은 창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리고 문을 조금 열어 둔 채로 두었다.
* * *
일곱 시 반, 세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 먹자는 말에 그는 처음으로 망설이지 않고 차 열쇠를 집었다. 텅 빈 집에 더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한남동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5년 전 두 사람이 자주 가던 곳이었다. 세아는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하얀 니트에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모습이 5년 전과 거의 같았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거짓말. 오빠 거짓말할 때 턱에 힘 들어가는 거 여전하다."
세아가 웃으며 와인을 따랐다.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향이 번졌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도혁은 잔을 받다가 멈췄다.
"그 향수."
"아, 이거?"
세아가 손목을 들어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좋지? 빈에 있을 때 산 거야. 구시가지 골목에 아주 작은 조향 공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혼자 하시는 데였거든. 세상에 딱 한 병뿐이래. 이름도 없어서 내가 지어 주려고."
"한 병뿐이라고."
"응. 왜, 오빠도 마음에 들어?"
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향이 그를 이상하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좋은 향이었다. 분명히 좋은 향이었는데, 이 향을 맡으면 자꾸 사흘 전 밤이 떠올랐다. 코트를 받으려다 굳어 버린 아내의 손끝. 그리고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
"오빠?"
"……아니야. 먹자."
세아는 잠시 도혁을 보다가 웃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 와인잔과 자기 손목을 함께 찍었다. 화면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가볍고 빨랐다.
그날 밤 열한 시, 첼리스트 유세아의 SNS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와인잔 옆으로 내민 하얀 손목. 그리고 짧은 글.
「5년 만의 서울.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향과 함께. #귀국 #나만의향 #이름을지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