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린 씨, 이거 봤어요?"
아침 여덟 시, 지현이 옥탑방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열었다. 한 손에 휴대폰, 다른 손에 반쯤 먹은 크루아상을 들고 있었다. 서린은 창가 책상에 앉아 이미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얀 손목. 와인잔.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향과 함께.」
"봤어요."
"그럼 이것도 봤어요?"
지현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향수 애호가들이 모이는 온라인 카페였다. 회원이 30만 명쯤 되는 곳이었고, N의 새 향이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시향기가 올라오는 곳이기도 했다.
게시판 맨 위에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조회수가 벌써 2만을 넘었다.
「[잡담] 유세아 향수, N 아닌가요?」
「며칠 전 청담 갤러리 행사에 지인 따라 갔다가 유세아 님 옆을 지나갔는데요. 향이 너무 좋아서 한참 따라다녔어요(변태 아님). 목련으로 시작하는데 중간에 비 온 뒤 돌바닥 같은 냄새가 확 올라와요. 이거 N 향수 잔향 구조랑 너무 똑같지 않나요? N 3번 「우중(雨中)」 쓰시는 분들 아실 텐데, 그 젖은 돌 냄새요. 근데 N 라인업에 목련은 없잖아요. 신작인가?」
댓글이 400개를 넘어 있었다.
「저도 맡았어요. 이건 N 맞음. 젖은 돌은 N만 저렇게 써요.」
「빈에서 산 거라는데? 인스타에 빈이라고 했던데.」
「N이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소문 있잖아요.」
「유세아가 N 아니야? ㅋㅋㅋ 첼리스트 겸 조향사?」
「헐 그럼 소름. 얼굴 없는 천재가 알고 보니 첼리스트」
서린은 마지막 댓글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재밌네요."
"재밌어요? 지금 재밌다고 했어요?"
지현이 크루아상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서린 씨, 이거 지금 터뜨려야 돼요. 이러다 진짜로 유세아가 N 소리 듣게 생겼어요. 사람들이 벌써 그 여자가 N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지금 N 공식 계정으로 한 줄만 올리면 돼요. 저 향은 N의 미공개작이고 도난당했다고."
"그러면요?"
"그러면, 그러면 사람들이—"
"사람들이 유세아 씨한테 물어보겠죠. 그럼 유세아 씨는 이렇게 대답할 거예요. 저는 빈의 작은 공방에서 샀을 뿐이에요. 비슷한 향이 있다니 저도 놀랐어요. 혹시 N 측에서 제 향을 보고 오해하신 게 아닐까요."
서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지현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얼굴도 안 보이는 조향사가, 유명한 첼리스트한테 시비를 건다. 증거는? 향은 눈에 안 보이는데."
"증거는 우리한테 있잖아요! 노트가 있잖아요!"
"노트를 공개하면 7번 배합이 세상에 풀려요. 그 순간 7번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향이 되고요."
지현이 입을 다물었다. 향수의 배합은 특허처럼 등록할 수 없었다. 배합 자체가 곧 비밀이었고, 비밀이 풀리면 끝이었다. 그래서 N이 10년 동안 얼굴을 숨긴 것이기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보고만 있어요?"
서린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얇은 파일을 하나 꺼냈다. 파일에는 인쇄된 종이 몇 장이 끼워져 있었다. 서린은 그중 한 장을 지현에게 내밀었다.
지현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맨 위에 기관 이름이 박혀 있었다.
「영업비밀 원본증명서」
"이게……."
"한국특허정보원에서 해 주는 거예요. 파일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그 파일이 그 날짜에 존재했다는 것만 증명해 줘요. 파일에서 전자지문을 뽑아서 등록하는 방식이라 내용은 저만 알고요."
지현의 눈이 등록일에 가서 멈췄다. 2년 전 4월.
"7번이요?"
"7번 여섯 번째 버전이요. 흰 목련에 젖은 돌이 처음 붙은 버전."
서린은 파일의 나머지 종이를 넘겨 보였다. 똑같은 증명서가 열 장 넘게 있었다. 날짜만 조금씩 달랐다.
"배합을 바꿀 때마다 등록했어요. 7번은 버전이 열한 개예요. 1번부터 6번도 다 있고요."
"……언제부터 이런 걸 했어요?"
"N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날부터요."
지현이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서린을 보았다. 그 눈에 어떤 감정이 스쳤다. 놀람이었다가, 안도였다가, 마지막에는 조금 서늘한 무언가였다.
"서린 씨, 가끔 무서워요."
"저도 가끔 제가 무서워요."
서린이 웃었다. 그러고는 파일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여섯 번째 버전을 등록하던 밤이 떠올랐다.
2년 전 4월이었다. 펜트하우스 부엌 식탁에서였다. 새벽 한 시가 넘어 있었고, 도어락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서린은 노트북으로 파일의 전자지문을 뽑아 올리고 등록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접수 번호가 떴다. 그녀는 그 번호를 옮겨 적지 않았다. 대신 옆에 펼쳐 둔 검정 수첩을 끌어당겼다. 그날 수첩에 적힌 시각은 새벽 세 시 십 분이었다.
작업실에 다녀온 날이면 그녀는 현관에 들어서기 전에 손을 씻었다. 지하 주차장 화장실에서, 주방 세제로 두 번. 손끝에 밴 목련과 돌 냄새를 지우려고. 그래도 손톱 밑에는 늘 조금 남았다. 3년 동안 그걸 맡은 사람은 없었다.
"지금 이걸 내밀면 유세아 씨는 또 이렇게 말해요. 우연이다. 비슷한 향은 세상에 많다. 그러니까 먼저 알아야 해요. 병이 어떤 길로 빈까지 갔는지. 아니, 애초에 빈에 간 적이 있기는 한지."
"빈에 간 적이 없다고요?"
"금고가 열린 게 7월 19일이에요. 유세아 씨가 귀국한 건 9월 23일이고요. 두 달 사이에 서울에서 사라진 병이 빈의 할아버지 공방에 가 있다가, 거기서 유세아 씨 손에 들어가 다시 서울로 왔다. 그게 말이 돼요?"
지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되죠."
"안 되죠. 그러니까 그 공방이 진짜 있는지부터 봐요. 하람 씨가 병을 누구한테 넘겼는지도요."
"경찰은요?"
"경찰은 마지막이에요. 경찰이 오면 하람 씨는 입을 닫고, 병을 받은 사람은 병을 버려요."
"하람이는요? 오늘도 모른 척해요?"
"네. 오늘도, 내일도요."
지현이 한숨을 쉬었다.
"나 그 애 얼굴 보면 자꾸 표정 관리가 안 돼요. 어제도 커피 받다가 컵 떨어뜨릴 뻔했어요. 1년 동안 내 새끼처럼 가르쳤는데."
"그러니까 더 모른 척해 주세요. 하람 씨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잖아요. 돈 때문인지, 협박을 받았는지."
"……협박이요?"
"스물넷이에요. 조향 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이고요. 누가 그 애한테 먼저 손을 뻗었는지부터 알아야 해요. 하람 씨를 자르는 건 그다음이에요. 자를지 말지도요."
지현은 서린을 오래 보았다. 도둑맞은 사람이 도둑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지현은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서린이 스무 살 때도 그랬다. 학원에서 누가 자기 과제를 베껴 내도 먼저 그 아이 사정부터 물었다. 그러고 나서 선생 앞에 원본을 조용히 내밀었다.
지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서린이 앉은 책상 위를 보았다. 크루아상 부스러기 옆에 작은 유리 비커가 세 개 놓여 있었다. 비커 바닥에 옅은 호박색 액체가 조금씩 담겨 있었다. 시향지 몇 장이 그 옆에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건 뭐예요?"
"아, 그거요."
서린이 시향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코끝에 가볍게 흔들었다.
"새벽에 잠이 깨서요. 그냥 섞어 봤어요."
지현이 시향지를 받아 코에 댔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오래된 나무 계단. 그리고 햇빛에 마른 리넨. 아무도 없는 옥탑방에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아침 같은 향이었다. 쓸쓸한데, 이상하게 숨이 쉬어지는 향.
"서린 씨."
"네."
"3년 만이죠. 새 향 만든 거."
서린은 대답 대신 창밖을 보았다. 성수동의 낮은 지붕들 위로 가을 햇살이 깔려 있었다.
"아직 안 만들었어요. 그냥 섞어 본 거예요."
"그 말, 1번 만들 때도 했어요."
지현이 코를 훌쩍이며 시향지를 서린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크루아상을 다시 집어 들었다. 뭔가 말하려다가 크루아상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서린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지현이 내려간 뒤 서린은 시향지를 다시 들었다. 그새 리넨이 조금 앞으로 나와 있었다.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늘 공조기가 정했다. 같은 온도, 같은 습도. 새 가죽 소파와 대리석, 아무도 앉지 않는 식탁의 냄새. 3년 동안 그 집에서 계절이 바뀌는 걸 코로 안 적이 없었다.
이 향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서린은 시향지를 비커 옆에 세워 두고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 * *
그날 밤 열한 시가 넘어 작업실 컴퓨터에 메일 한 통이 들어왔다.
N의 공식 연락처로 쓰는 주소였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제안 메일이 쌓이는 곳이라 평소에는 지현이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정리했다. 그런데 그 메일은 제목부터 달랐다.
「To N — 당신의 일곱 번째 향에 대하여」
서린은 제목을 보고 한동안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일곱 번째.
N이 공개한 향은 여섯 개뿐이었다. 7번이라는 번호는 세상 누구도 몰라야 했다.
메일을 열었다. 한국어였다. 조금 딱딱하지만 정확한 한국어.
「N에게.
나흘 전 밤,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당신의 향을 맡았습니다.
비에 젖은 돌. 당신만 그렇게 쓰는 그 돌 냄새. 10년 동안 당신의 향 여섯 개를 전부 맡아 온 제가 잘못 맡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향을 모릅니다. 목련으로 시작해 무화과 잎으로 끝나는 N의 향은 세상에 나온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직 내놓지 않은 향이라면, 그 향이 왜 다른 사람의 손목에 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당신 편에 서고 싶습니다.
— 윤이안
메종 리안(Maison Lian), 파리」
서린은 메일 맨 아래의 이름을 오래 보았다.
윤이안. 10년 동안 N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었다.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는데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그리고 N의 일곱 번째 향을 맡자마자, 그것이 일곱 번째라는 걸 알아챈 첫 번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