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오전부터 밀린 일정을 다시 정리할 틈이 났다.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점심도 회의실에서 샌드위치로 때웠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 시가 넘어 있었다. 서인은 다음 주로 밀린 미팅을 옮기기 위해 캘린더를 열었다. 다음 주도 일정은 빼곡했다. 월요일 오전에는 채권단 미팅이 있었고, 화요일에는 이촌동 실무회의, 수요일 오후에는 자산 매각 관련 미팅이 잡혀 있었다. 빈 시간을 찾던 시선이 목요일 오후 두 시에서 멈췄다. 이혼의사확인기일. 날짜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법원에서 연락을 받은 날부터 알고 있었고, 그 시간에 맞춰 오후 일정도 미리 비워두었다. 다만 이렇게 다음 주 일정 사이에 놓고 보니 생각보다 가까웠다. 확인기일이 지나면 법적으로는 남이 된다. 그렇다고 당장 생활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혼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동안은 지금처럼 한집에서 지내기로 이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그러니 법적으로 이혼한 뒤에도 한동안은 같은 집으로 퇴근할 예정이었다. 서인은 캘린더에 표시된 날짜를 잠시 바라봤다. 다음 주 목요일. 그전에 이번 주 일요일에는 어머니 기일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한정호와 묘소에 다녀오는 날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늘 둘이 갔고, 결혼한 뒤부터는 재하까지 셋이 가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서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뤄야 할 미팅을 금요일 오전으로 옮겼다. 목요일 오전 일정은 그대로 두었다. 평소처럼 출근해서 미팅을 마친 뒤 법원으로 가면 시간은 충분했다. 일정 조정을 끝내고 캘린더를 닫았다. 그사이 메일함에는 읽지 않은 메일이 몇 개 더 들어와 있었다. 서인은 가장 위에 있는 것부터 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 건 아홉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차에서 내릴 때부터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하루 종일 회의실과 사무실을 오간 탓인지 어깨도 뻐근하고 눈까지 피곤했다. 집에 들어서자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재하
월요일 아침부터 한성 본사는 정신없이 돌아갔다. 주말 사이 수정된 자구안이 올라왔고, 매각을 진행 중인 자산 두 곳에서도 추가 자료를 요청해왔다. 채권단에 넘길 자료까지 오전 중으로 확인하고 나니 어느새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서인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음 메일을 열었다. 주말을 통째로 비운 탓에 일이 밀려 있었다. 결혼식에 다녀온 것뿐인데 꼭 며칠이나 자리를 비운 기분이었다. 어제도 집에 돌아와서는 제대로 한 게 없었다. 한동안 방에서 쉬다가 재하가 끓인 김치찌개 냄새에 내려갔고, 저녁을 먹은 뒤 밀린 메일 몇 개를 확인한 게 전부였다. 평소라면 주말 중 한 번은 회사에 나왔을 텐데. 그때 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회장님께서 잠깐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서인은 모니터 한쪽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요?” “네.” 월요일 오전부터 부르는 걸 보니 좋은 이야기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한정호가 딸 얼굴이나 보자고 근무 시간에 부를 사람도 아니었다. “알겠어요.” 열어두었던 파일을 저장하고 회장실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한정호 앞에는 서류가 놓여 있었다. “앉아.” 서인은 맞은편에 앉으며 표지부터 확인했다. 또 이거였다. 처음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서인은 이촌동을 매각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한성에 필요한 건 몇 년 뒤에나 돌아올 개발 이익이 아니라 당장 확보할 수 있는 현금이었고, 무엇보다 우진과 새로운 사업으로 묶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이혼을 앞둔 마당에. 하지만 한정호는 끝까지 매각을 반대했다. 결국 사업을 살리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고, 벌써 두 차례나 실무 회의가 진행됐다. 한정호가 서류를 밀어왔다. “한번 봐.” 지난 회의 내용을 반영한 수정안이었다. 한성은 이촌동 부지와 사업권을 출자하고 우진은 자금과 개발 역량을 투입한다. 큰 구조 자체는 달라진 게 없었다. 몇 장을 넘기던 서인의 손이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까지 길게 번져 있었다. 협탁 위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서인은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 아래로 따라오는 묵직한 감각에 그대로 멈췄다.“미쳤네…….”결국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어젯밤 일을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잠시 후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재하가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이미 씻은 모양이었다. 셔츠와 바지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채 휴대전화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인이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일어났어요?”“네.”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속은?”“괜찮아요.”“머리는.”“멀쩡해요.”숙취부터 확인하는 걸 보니 어젯밤 서인이 마신 술의 양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몇 시예요?”“9시 10분.”“많이 잤네요.”침대에서 내려온 서인은 욕실로 향하다 의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검은 재킷이 놓여 있었다.어젯밤 재하가 아무렇게나 던져둔 그대로였다. 구겨진 옷감을 보자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장면까지 따라왔다.서인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왜 웃어요.”재하는 휴대전화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닙니다.”뻔뻔하기는.서인은 더 묻지 않고 욕실 문을 닫았다.***1층 조식 뷔페는 늦은 시간인데도 제법 붐볐다.서인은 먹을 것을 담은 접시와 커피를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재하가 커피를 한번 보더니 자연스럽게 제 쪽으로 가져갔다.대신 오렌지주스가 서인의 앞으로 밀려왔다.“이거 마셔요.”“커피 마시려고 가져온 건데.”“커피 마시면 속 쓰리잖아요.”“괜찮아요.”“술 마신 다음 날엔 이거 먹잖아.”그건 또 기억하고 있었다.서인은 잠시 재하를 보다가 별말 없이 오렌지주스를 집어 들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빈속에 커피를 마셨다가 속이 쓰렸던 적이 몇 번 있었고, 그럴 때면 대신 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하가 움직였다. 바지를 제대로 추스를 생각도 없는 듯 서인의 다리를 벌렸다. 곧바로 재하의 성기가 깊숙이 밀려들었다. 예고 없이 들어온 자극에 서인의 입에서 날카로운 숨이 터졌다. 재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거칠고 깊은 움직임이 연달아 이어졌다. 서인의 몸이 밀릴 때마다 매트리스가 크게 흔들렸다. 감당하기 벅찬 자극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서인은 재하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손톱이 피부를 긁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하아…… 더.” 끊어진 숨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더 세게…….” 재하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졌다. 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 안쪽으로 감각이 빠르게 몰렸다. 숨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떴다. 재하가 보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시선만은 서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서인은 피하지 않았다. 재하의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내렸다. 입술이 다시 부딪혔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흐트러진 숨이 뒤섞였다. 서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재하의 허리를 감은 다리도 더 단단히 조여졌다. 몸 안쪽에서부터 견디기 힘든 감각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서인의 몸이 크게 떨렸다. 동시에 재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억눌린 숨이 가까이서 터졌다. 첫 번째 사정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재하는 서인의 배 위로 뜨겁고 짙은 정액을 쏟아냈다. ***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객실 안에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숨소리만 남아 있었다. 재하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서인의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재하였다. 가까웠다. 재하 역시 서인을 보고 있었다. 또였다. 오늘따라 이상할 만큼 자주 눈이 마주쳤다. 서인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봤다. 몇 초가 흘렀다. 재하가 먼저 손을 들었다.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걷어냈다. 땀에 젖은
입술이 부딪혔다.먼저 입술을 포개어 온 건 서인이었다.예상하지 못한 듯 재하가 잠깐 숨을 멈췄다.그 짧은 틈에도 서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셔츠 앞자락을 움켜쥔 채 다시 입술을 겹쳤다.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 재하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그제야 재하의 손이 움직였다.허리를 감싸는 힘이 단단해졌다.작은 금속음과 함께 재하가 들고 있던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재하는 그대로 서인의 입맞춤을 받아냈다.그러다 어느 순간 입술이 맞물리는 각도가 달라졌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들어오면서 남아 있던 거리마저 사라졌다.서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검은 재킷이 흘러내려 팔꿈치에 간신히 매달렸다.어느새 뜨거워진 재하의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닿는 순간 서인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재하의 손이 잠시 멈췄다. 포개져 있던 입술도 함께 떨어졌다.불과 몇 센티미터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흐트러진 숨이 짧게 얽혔다.서인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목덜미를 끌어당겼다.이번에는 재하도 기다리지 않았다.다시 입술이 맞물렸다.서인은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릎 뒤가 침대에 닿자 그대로 걸터앉았다.재하가 바로 앞에 섰다.서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을 재하가 말없이 내려다봤다.시선이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재하의 손이 올라와 서인의 뺨을 감쌌다. 엄지가 달아오른 피부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서인이 그 손목을 잡는 순간 재하가 몸을 숙였다.이번에는 재하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서인의 몸이 그대로 뒤로 밀렸다.등이 매트리스에 닿자 재하도 뒤따라 몸을 낮췄다. 팔꿈치에 걸려 있던 검은 재킷이 벗겨져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입술은 떨어졌다가 금세 다시 맞붙었다.서인의 손이 재하의 셔츠로 내려갔다. 단추를 하나 풀고 곧바로 그 아래로 손을 옮겼다.재하의 손도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서인을 바라봤다. “서인 씨가 가신다면요.” 재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인의 허리에 얹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가죠.” 서인은 그대로 몇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벗어나기 전 한번 뒤를 돌아보자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던 도윤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도윤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 리조트 라운지로 들어서자 피로연의 음악이 한결 멀어졌다. 늦은 시간이라 소파에는 드문드문 사람만 남아 있었고, 직원들은 비어 있는 테이블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재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탔다. “몇 층?” “7층이요.” 재하가 7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서인은 정면의 거울을 바라봤다. 얇은 드레스 위로 걸친 검은 재킷은 누가 봐도 제 것이 아니었다. 어깨는 한참 남았고 소매는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다. 서인은 괜히 소매 끝을 한번 당기다가 거울 한쪽에 비친 재하를 봤다. “재하 씨.” “네.” 부르고 나서야 눈이 마주쳤다. 서인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다시 앞을 봤다. “아니에요.” 재하는 더 묻지 않았다. 객실 앞에 도착한 서인은 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냈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문득 뒤를 돌아 재하를 바라봤다. 재하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진짜 들어오게요?” “네.” 서인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객실에 불을 켜자 침대 옆 조명이 은은하게 번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인은 구두부터 벗어버렸다. 하루 종일 조여 있던 발끝이 카펫에 닿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살겠다.” 서인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 동안 재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뚜껑까지 열어 내미는 걸 보고 서인은 작게 웃으며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차가운 물을 몇 모금 넘기고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