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설아는 노골적인 질문을 받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다.이때 옆에 있던 임유나가 입을 열었다.“사실 형부가 밖에서 어떤 여자랑 놀아났는지 다 알고 있었어요. 이제 언니도 없어진 마당에 이 일은 당연히 정리되어야죠.”“이러다가 누가 실수로 강수진 씨와 형부의 관계를 폭로하기라도 하면 간신히 잠잠해진 여론이 다시 폭발할 거예요.”이혜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지?”정설아가 갑자기 웃으며 말을 이었다.“협박이 아니라 보상을 받겠다는 거죠. 서율이가 차씨 가문에 손주를 안겨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잖아요. 이렇게 허무할 게 끝낼 순 없죠.”“만약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면 언론에서도 이 돈을 보고 차씨 가문이 서율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거죠.”이혜정은 그들의 노골적인 갈취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인 상황에서 괜히 정설아와 대립 구도를 이루면 차씨 가문이 다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그러나 10억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기에 이혜정은 다시 한번 협상을 시도했다.그녀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여유롭게 말을 꺼냈다.“일을 해결하려는 마음만은 같을 거라고 믿습니다. 10억은 저희한테도 부담이니 1억으로 하시죠.”정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이번 일로 차씨 가문이 얻은 손실은 10억이 훨씬 넘을 텐데요?”“보자 보자 하니까 점점 선을 넘네요. 약 올리려고 찾아왔어요? 전부터 얘기했잖아요. 댁 집 딸은 재수탱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일을 겪는 거죠.”이혜정은 정설아에게 화난 나머지 온몸이 떨렸고 당장 경비를 불러 두 사람을 쫓아내고 싶었다.때마침 강수진이 입을 열었다.“돈을 원하면 그냥 말씀하세요. 서율 씨를 구실로 삼지 말고요. 임씨 가문 같은 집안이 이런 추잡한 요구를 한하다니 실망스럽네요.”임유나는 비록 임서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강수진을 더 싫어했다.강수진이 차주헌과 임서율 사이
“정설아 씨와 임유나 씨 두 분만 오셨습니다.”차주헌은 듣자마자 두 사람을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임서율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머리 위에 칼이 겨눠진 거나 다름없기에 언젠가는 그들은 맞서야만 한다.차주헌은 짜증스럽게 손을 저었다.“일단 들어오라고 하세요.”때마침 이혜정과 강수진이 계단에서 내려왔고 강수진의 순종적인 모습은 단번에 이혜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수진아,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편하게 지내. 나랑 주헌이가 있잖니. 게다가 임서율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잖아.”강수진은 소심하게 물었다.“아주머니, 서율 씨가 돌아오면 바로 나갈게요.”이혜정은 강수진이 나가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소리니? 임서율이 돌아온들 달라지는 건 없어. 걔는 처음부터 주헌이랑 이혼할 마음이 있었던 거야. 돌아와봤자 이혼 절차 밟으면 끝나는 거야.”“하지만... 괜히 저 때문에 불편해지지 않을까요?”강수진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고는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이혜정은 다시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그런 걱정은 하지 마. 안심하라니까.”“어머니, 임씨 가문에서 찾아왔어요.”차주헌은 강수진과 이혜정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보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까지 만면에 웃음을 띠던 이혜정은 임씨 가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다들 한가한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또 찾아온 거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유나와 정설아가 안으로 들어왔고 자리에 앉자마자 정설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서율이는 아직 차 서방 아내야. 이 시점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과거에 불륜녀였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정설아는 이런 일에 눈썰미가 타고났고 강수진을 본 순간 어떤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졌다.차주헌이 해명하기도 전에 이혜정이 나서서 말했다.“말씀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수진이는 내가 초대한 손님이에요. 내 아들이 그쪽 딸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알죠?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이혼 서
하도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진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이미 평온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싸늘함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서율 씨 어머니는 저한테 은혜를 베푼 분이십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할 수 있지만 이 일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으니 그만하시죠.”순식간에 사무실은 침묵으로 뒤덮였다.한참 후, 차진만은 깊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주헌이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어쨌든 넌 이제부터 이 일에 간섭하지 마.”그 말을 끝으로 차진만은 쾅 하고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귀청을 찢을 듯한 요란한 소리에 하도원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나이 들수록 힘이 넘쳐나네.”그 시각 차진만의 전화를 받은 차주헌은 재빨리 물었다.“다 정리된 거죠? 삼촌은 더 이상 이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확실하죠?”“경고는 해뒀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어. 네가 직접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임서율에 관대한 모든 기사를 내려.”“회사 일도 알아서 잘 처리하고.”차주헌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왜요? 삼촌이랑 합의 보신 거 아니에요? 설마 끝까지 이 일에 끼어든대요? 정말 서율이와 그런 관계가...”“입 다물어. 네가 사고를 치지 않았으면 오늘 같은 사태가 벌어졌겠니? 내가 이 나이를 먹고 너희들 뒤처리까지 해야 하되겠어?”차진만은 하도원에 대한 모든 분노를 차주헌에게 화풀이했다.하도원이 다루기 힘든 사람인 건 맞지만 평소에 요구를 제시하면 거의 승낙하는 편이었다.하지만 오직 이번 일만큼은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그 이유가 임서율 때문인지, 아니면 강혜수에게 받은 은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후자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전자라면 차씨 가문에 큰 후폭풍을 가져올 게 틀림없으니 그저 생각만으로도 차진만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차주헌은 결코 그 제안을 승낙할 수 없었다. 아직 회사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에 기사를 내리는 건 말도 안 된다.이번 폭로가 없었다면 차주헌은 네티즌들의 비난 속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하도원은 웃음이 터졌고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러네요. 여기저기 씨를 뿌리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많은 아들들이 생기지도 않았겠죠.”“이 망할 놈. 그게 중요해? 지금은 주헌이 일을 말하는 중이잖아. 지난 일은 묻지 않겠다. 넌 지금부터 임씨 가문의 일에 간섭하지 마.”순순히 지시를 따를 리 없었던 하도원은 그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역으로 책임을 물었다.“저를 나무라시느니 차라리 차주헌을 제대로 훈육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한 여자에게만 충실하도록 말이죠. 훨씬 더 나은 방법이라도 생각하는데요?”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진 차진만은 발을 동동 굴렀고 어찌나 화가 났는지 늘어진 피부마저 떨리고 있었다.“내가 화병으로 죽어야 말을 들을 거냐.”“그렇게 쉽게 죽을 분이 아니시잖아요. 할 일 많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세요.”하도원은 팔걸이에 손을 올리며 건방진 태도를 취했다보였다.차진만마저 하도원을 어쩔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수많은 아들 중 유독 입이 거칠고 뼛속까지 반항 기질을 타고난 하도원은 밥 먹듯이 가문의 법도를 어겨 매를 맞아도 절대 고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능력만큼은 따라오는 자가 없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차주헌을 키워볼 생각도 했지만 하도원의 반의 반도 따라오지 못했다.하도원은 길들일 수 없는 생태계 최상위 사자와도 같아서 가장 믿음직스러우면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다.차지만은 하도원의 태도를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임씨 가문의 그 애를 좋아하는 거냐?”하도원은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회장님은 젊을 때 연애를 너무 많이 하셔서 그런가 무슨 일이든 다 연애로 연결하시키네요.”“내가 널 모를 것 같아? 원래 남의 일에 관심 없는 놈이잖아.”“저를 안다고 확신하지 마세요. 얼마나 알고 계시는데요? 정말로 절 이해한다면 어릴 적에 그렇게 자주 감금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비록 아무렇지 않은 척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함은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하도원은 그 말을 듣고 손가락을 멈추더니 진승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내가 평판을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보이냐?”진승윤은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하도원은 깊은 눈빛으로 컴퓨터 화면의 댓글들을 응시했다.“서율 씨 소식은 아직이지?”진승윤이 고개를 저었다.“네. 서율 씨를 죽이려는 사람도 함께 사라진 모양입니다.”하도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임서율과 체결한 계약서를 흘끗 보았다. 머릿속에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사인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현실 속의 임서율은 아예 사라졌다.그는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난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스타일이야. 특히 계약서를 작성한 일이라면 더더욱. 이 기간만큼은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임서율.”진승윤은 이 말을 듣고 바로 이해했다.“계속 찾아보겠습니다. 온라인에 퍼진 루머들은 어떻게 할까요?”하도원은 의자에 기댄 채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차주헌이 폭로하는 걸 좋아하잖아. 그럼 강수진과의 관계를 퍼뜨려야지. 누가 더 피해를 볼지 두고 보자고.”그 말에 진승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일이 커지면 차 대표님은 물론 회장님께도 설명하기 어려울 상황이 올 겁니다.”“회장님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넌 시키는 대로만 해.”단호한 하도원과 달리 진승윤은 회장님의 처벌이 두려웠다.지난번에 임서율 때문에 한종서와 경주를 벌이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뻔하지 않았는가?그때도 회장은 하도원을 사당에서 밤새도록 무릎 꿇리곤 가문의 법을 따라 매를 들었었다.등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맞았음에도 하도원은 단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모두 견뎌냈다.겨우 상처가 나은 참인데, 차주헌의 일로 다시 소동이 벌어지면 하도원에게 또 다른 상처가 생길 게 뻔했다.하지만 오랜 시간 하도원을 보필해 온 진승윤은 절대 꺾을 수 없는 그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지시를 따랐다.“알겠습니다.”문을 열고 나온 진승윤
차주헌은 싸늘한 시선으로 이혜정을 노려보았다.“제가 이런 일로 장난칠 사람으로 보여요?”이혜정은 말문이 막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서율이 미리 작성해 둔 이혼 서류가 언론에 공개되었고 이에 더불어 한종서, 하도원과 찍힌 사진들도 모두 퍼졌다.예상대로 여론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이전까지 차주헌을 비난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처음부터 편 안 들기를 잘했네. 이러니까 양측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하는 거야.][하여튼 재벌가의 이야기는 짜릿하다니까? 차 대표님은 완벽했어.][이 여자는 연애운이 좋네. 한종서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하도원까지...][잠깐만. 하도원은 임씨 가문 둘째 딸이랑 사귄다고 하지 않았나?][와. 관계가 진짜 복잡하네. 그럼 상황 회피하려고 스스로 병원에서 도망친 거야?][그럴 수도?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이 그냥 증발할 리가 없잖아.][남자랑 같이 도망친 거 아냐? 하도원이 아니라면 한종서?][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 요즘 따라 한종서가 이상할 만큼 잠잠하잖아. 같이 도망친 거 아니야?]순식간에 임서율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이 온라인을 뒤덮었다.경찰 측에서는 임서율이 미리 작성한 이혼 서류를 근거로 스스로 떠날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사건을 종결했다.게다가 사건 신고 시 계획 살인이 아니라 단순 실종으로 접수했던 탓에 경찰은 차주헌에 대한 조사마저 곧바로 중단했다.같은 시각 하도원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크롤을 내릴수록 표정이 굳어졌고 점점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이때 진승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성운 그룹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율 씨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가득합니다. 솔직히... 살아있든 죽었든 불륜녀라는 꼬리표는 평생 따라다닐 것 같습니다.”“일부 네티즌들이 서율 씨가 한종서 씨와 도망쳤다고 주장하는데, 한종서 씨의 행방을 공개해서 누명을 벗겨드릴까요?”“필요 없어.”하도원은 손을 저었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