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서율은 알지 못했다. 하도원이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게 단지 지금부터가 아니라는 걸. 아주 어린 시절, 첫 만남부터 그는 늘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하도원은 턱을 괴고 있었는데 임서율의 말에도 전혀 기분 상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길고 깊은 눈매에 다정한 빛을 담았다.“좋지. 네가 원한다면 나 나가서 관상이라도 봐줄까? 상이라도 차려줘. 상처만 다 났으면 당장이라도 나가겠어.”임서율은 괜히 던진 농담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남자의 얼굴은 굳이 따질 데가 없었다. 유창한 윤곽, 높이 솟은 콧대, 옅은 붉은 빛이 도는 입술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었다. 정말 그가 길거리에서 관상을 본다면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 점괘가 아니라 그의 얼굴 때문일 게 뻔했다.임서율은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진짜 파산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하도원의 표정이 한순간 애처롭게 바뀌었다. 맑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평소의 차갑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그럼 내가 정말 망하면 서율이 네가 나 먹여 살릴 거야?”임서율은 그가 장난을 치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손을 꼭 잡아주며 진지하게 말했다.“걱정 마요. 그땐 우리 같이 배달이라도 하면 되죠. 당신을 굶게 하진 않을 거예요.”하도원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빼냈다.“웃기고 있네, 저리가.”임서율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먼저 시작한 건 당신이잖아요. 난 그냥 맞장구친 것뿐인데요?”그제야 하도원은 진지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 거친 손끝으로 손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임서율, 네 무용담 좀 말해봐. 도대체 한 회장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그 양반이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 거야?”임서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별말 안 했어요. 어차피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냥 있는 대로 다 쏟아낸 거죠 뭐. 한종서를 잘못 키웠다고 해서 화가 치
의사가 고개를 돌려 임서율을 보며 말했다.“심하게 무리하지 않는 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결국 피부 외상이라 내상보단 훨씬 낫죠.”임서율도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뼈와 근육을 다치지 않았으니 크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되었다.의사가 나간 뒤, 하도원이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임서율은 여전히 똑같은 대답만 내놨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도원은 태연히 소매를 걷어 탄탄한 팔뚝을 드러냈다.“임서율, 다른 방법 쓰게 하지 마.”임서율은 속으로 혀를 찼다.도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아는 걸까. 그녀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정말 티가 그렇게 많이 났단 말인가.결국 그녀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으니까.“몇 년 전, 그 화재에서 날 구한 게 당신이었죠?”하도원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지만 곧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의 입가엔 오히려 장난스러운 웃음이 번졌다.“임서율, 아까 나 훔쳐봤지?”그 강렬한 시선에 임서율은 마치 현장에서 들킨 범인처럼 숨이 턱 막혀 급히 변명했다.“그냥... 우연히 본 거예요.”하도원은 믿지 않는 눈치였고 미묘하게 치켜오른 눈썹에 의심이 가득 묻어났다.“정말 우연히 본 거야? 아니면 일부러 본 거야?”“그게...”임서율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가 그런 눈빛을 보내는 한, 버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그의 앞에서는 작은 비밀 하나조차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하도원이 그녀의 붉어진 뺨을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낮게 웃었다.“거짓말은 결국 들통나고 종이로는 불 못 가리지.”임서율은 억울해 반박했다.“당신은요? 거짓말 안 했어요? 몇 년 전 날 구한 게 당신이면서, 왜 그렇게 오래 숨겼는데요? 왜 차주헌이라고 속인 건데요?”그게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녀를 구해주고도 차주헌에게 모든 공을 넘겨주었고 오랫동안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속였다. 그
“약 갈 시간입니다.”의사가 병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임서율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하도원을 밀어내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허겁지겁 정리했다.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가와 말했다.“거즈 갈아야겠네요. 아까 잠깐 외출하셨죠? 지금쯤 약이 다 스며 나왔을 겁니다.”하도원은 태연히 침대에 누웠다.“수고 많으십니다, 선생님.”의사가 커튼도 치지 않은 채 바지를 내려 상처를 확인하려 하자 하도원이 허리끈을 붙잡았다.“잠깐만요. 커튼 좀 쳐주시겠어요?”의사는 실소를 흘렸다.“이런 걸 뭘 가려요. 두 분 연인 사이 아니던가요? 이 정도도 피하시게요?”임서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안 치면 좋았다. 그럼 그 틈에 하도원의 허벅지 근처에 남은 상처 자국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예전에도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확인하지 못했었다.하도원이 가볍게 기침하며 낮게 중얼거렸다.“여자 친구가 좀 부끄럼이 많아서요. 지금 제 상태, 아시잖습니까.”그 목소리는 의사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았다. 의사는 순간 멈칫하더니, 어쩐지 놀란 표정으로 임서율을 곁눈질했다.임서율은 그 시선을 받고 괜스레 당황해 물었다.“의사 선생님, 어디 문제라도 있나요?”“아, 아닙니다.”의사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기더니 이내 두 사람 사이에 커튼을 드리웠다.뜻밖의 행동에 임서율은 순간 멍해졌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말을 나눈 걸까.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별로 유쾌한 말은 아닐 게 뻔했다.하지만 그렇다고 못 보게 두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커튼 가장자리를 집어 조금 벌렸다.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건 단단히 다져진 그의 허벅지와 매끈한 근육 선이었다.임서율은 고개를 흔들었다.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그녀는 조금 더 커튼을 젖혀 시야를 넓혔다. 의사가 허리를 굽히고 상처를 소독하고 있었다. 피부 곳곳이 벌겋게 벗겨져 피멍이 들었고 살점이 드러난 자리는 처참했다. 그걸 보는 순간 임서율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하도원이 한종서의 사람들과 몸
임서율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걱정 마세요. 전 자금만 지원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거래처도 연결할 수 있어요. 새로운 협력사가 생기기만 하면 회사는 다시 굴러갈 수 있죠.”진승윤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하지만 지금은 한 회장이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와 손잡는 건 곧 한씨 집안과 맞서는 거라고요.”임서율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그게 무슨 대수예요. 그 협력사들, 겉으로는 한씨 집안 눈치를 본다 해도 결국 원하는 건 돈이에요. 이익 앞에선 의리 따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저도 똑똑히 봤어요. 그 어떤 동맹이든 돈만 충분히 되면 언제든 등을 돌리는 게 세상 사람들이잖아요.”자신만만한 눈빛에 진승윤은 그녀가 정말 방법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서율 씨, 대표님 대신 감사 인사드릴게요. 역시 대표님 안목은 틀리지 않으셨어요.”임서율은 단 하나만 당부했다.“하지만, 진 비서님. 이 일은 꼭 비밀로 해주세요. 특히 도원 씨한테는요. 그 사람 옆에서 꽤 오래 있었으니 성격 잘 아시잖아요.”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 시각, 하도원은 결국 의사를 설득해 잠시 퇴원을 허락받았다. 단, 이틀에 한 번은 꼭 병원에 와서 상처를 확인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마저도 조현우가 강하게 밀어붙인 덕분이었다. 아니었으면 하도원은 아예 병원에 발길조차 끊었을 터였다.병실로 돌아온 하도원은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수액을 맞은 채 키보드를 두드리는 임서율을 발견했다.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고 이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눌러 멈추게 했다.임서율이 올려다보자, 차갑던 눈빛이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돌아왔네요. 얘기는 잘 됐어요?”“응. 이틀마다 병원에 들르라는 조건으로 퇴원 허락받았어.”“잘됐네요.”임서율은 의사의 단호함에 은근히 안도했다. 이 완고한 환자를 다루려면 그 정도 강경함은 필요했다.“나중에 꼭 감사패라도 드려야겠네요. 정말 책임감 있는 좋은 의사예요.”하도원
“오늘 밤엔 재밌는 거 준비해서 나 좀 재워줘. 며칠 뒤면 아마 그런 여유도 없을 거야.”앞부분까진 임서율도 담담히 들었다. 애초에 하도원 곁에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그를 편히 잠들게 해주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뒤쪽 말을 듣자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아직 퇴원할 때가 아니잖아요.”하도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분명 회사를 챙기려는 거였다. 이번에 한태민이 가한 압박은 전례 없는 수준이었고 백년 기반의 한씨 집안과 달리 하도원은 이제 막 기반을 다진 신흥 세력이었다.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결코 쉽지 않았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가끔 움직이는 게 불편할 뿐이지, 앉아서 처리하는 건 다 할 수 있어.”그 말에 임서율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이 남자의 성격상 막는다고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지금은 말리는 게 아니라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게 맞았다.“알겠어요. 그럼 의사랑 잘 얘기해 둬요. 당장은 퇴원 못 하니까, 정식으로 상의는 하고 나가야죠. 그래야 내가 안심해요.”하도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우리 서율이, 이제 점점 사람 배려할 줄 아네.”임서율은 그의 등을 툭 쳤다.“지금 농담할 때예요? 어서 가요.”“응.”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자 진승윤이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그때 임서율이 곧장 입을 열었다.“진 비서님, 그냥 혼자 가게 해요. 어차피 곧 퇴원하는데, 회사 일 바빠지면 진 비서님이 늘 옆에 있을 수도 없잖아요. 지금부터 혼자 움직이는 게 필요해요.”진승윤은 그녀의 속뜻을 눈치챘다. 하 대표 앞에서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하도원이 손가락으로 진승윤을 가리키며 웃었다.“앞으로 네 월급은 임서율한테서 받아. 되게 잘 따르네.”“사모님 말씀이 곧 대표님 말씀이죠.”진승윤이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하도원은 입이 귀까지 걸린 듯 웃으며 병실을 나섰다.이제 병실엔 임서율과 진승윤만 남았고 그는 곧장 다가와 물었다
“가능해요. 가족은 환자가 계속 치료를 받을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제 입장에서 보자면 이 시점까지 왔는데 굳이 병원에서 고생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조현우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남은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내세요.”“...네.”조현우가 자리를 떠나자, 임서율은 병실로 돌아왔다. 그 순간 하도원은 그녀의 얼굴빛만 보고도 속마음을 읽어냈다.“무슨 일 있어?”임서율은 잠시 멍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다잡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조 선생님이 아버지 상태에 대해 얘기해 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가려고 해요.”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아버지를 어디로 모시는 게 좋을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임씨 집안으로 보내는 건 조금 꺼려졌다. 지난번 일로 임태규의 태도를 똑똑히 보았으니까. 그에게 그녀는 여전히 외부인이었고 괜히 거기로 보냈다간 갈등만 커져 아버지의 몸에 더 해가 될지도 몰랐다.그때, 하도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그럼 우리 집으로 모셔와.”“네?”임서율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지금 뭐라고 했어요?”하도원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아버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자고 했어. 좀 외진 곳이긴 해도 바깥 풍경이 좋아. 몸이 괜찮은 날이면 밖에 나가 낚시도 하고 경치도 보실 수 있을 거야.”뜻밖의 제안에 임서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레 물었다.“근데 당신한테 부담되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 상태는 도원 씨도 알잖아요.”하도원은 무심결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임서율이 곧장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그냥 머리 한번 쓰다듬으려던 건데? 싫으면 안 할게.”임서율이 겨우 안도하는 순간, 하도원은 그녀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아 마치 반죽이라도 하듯 거칠게 헝클어뜨렸다.“하도원 씨! 진짜 미쳤어요?”그녀가 버둥거리며 소리쳤지만 하도원은 태연하게 웃어넘겼다. 그러다 곧 단호히 말했다.“그냥 내 말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