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교수님이 오셨어!”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자 지연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안형준이 오는 쪽을 바라봤다.“교수님!”지연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고는 아예 지연을 지나쳐 하연 쪽으로 다가갔다.“하연 양.”“안 교수님.”놀란 듯 인사해 오는 하연을 보자 안형준은 싱긋 미소 지었다.“오늘 이 파티는 사적인 파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요.”안형준이 하연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걸 사람이라면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 뒷전에 밀려 있던 지연이 다급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교수님, 이 분이 전에 말씀하셨던 최하연 씨죠?”그러면서 먼저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저는 안 교수님의 제자 엄지연이라고 해요.”안형준은 상황을 보더니 이내 말을 보탰다.“지연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생이기도 해요. 디자인에 소질이 있으니 두 사람 앞으로 서로 배웠으면 좋겠네요.”하연은 손을 내밀며 지연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 최하연이라고 해요.”두 사람은 그것으로 인사를 끝냈다.“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은 B시에 있을 큰 행사 때문입니다.”안형준이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누군가가 불쑥 질문했다.“혹시 다음 달에 있을 패션쇼 때문인가요?”“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B시 패션업계의 유명한 디자이너분들이니 이번 패션쇼에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이게 B시에서 처음 열리는 패션쇼라 해외에서도 엄청 기대하고 있대. 만약 여기서 좋은 디자인을 선보이면 단번에 유명세를 타는 거야.”“예전에는 항상 해외에서만 진행되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B시에서 진행된대. 이건 참 자랑할 만한 일이지, 우리에게 영광이자 기회인 셈이니.”“우리나라 원소를 넣어 디자인하면 세상에 우리 문화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외국 사람들한테 우리 패션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줘야지.”예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뒤늦게 반응한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저한테 쏠리자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려 하연은 곧장 대답했다.“저는 이번 패션쇼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저보다 훨씬 잘 아실 것 같은데요.”하연의 겸손한 태도에 안형준은 매우 만족했다.“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이 책임을 짊어질 수 있겠어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안형준이 하연을 이렇게까지 믿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만 보면 아예 이번 패션쇼를 하연에게 일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 하연에게 그렇다 할 대표작이 없는데, 이러면 사람들이 불복할 게 뻔했다.상황에 놀란 하연이 갑자기 짊어지게 된 책임에 어안이 벙벙해 입을 열려고 할 때,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먼저 기회를 낚아챘다.“안 교수님, 아직 자격도 안 되는데,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일을 그르치면 어떡합니까?”“맞아요. 제자들 중에 꼽자면 지연 양이 메인 디자이너에 더 잘 어울리죠. 어찌 됐든 지연 양은 크고 작은 패션쇼를 많이 맡아본 적이 있고, 매번 완벽하게 완성했잖습니까.”“지연 양 디자인은 독특하여 우리 업계에서도 실력은 인정 받잖아요.”사람들은 하연보다는 지연을 더 믿고 있었다.심지어 약속일도 한 듯 하나 둘 지연을 위해 나섰다.어찌 됐든 하연을 접한 건, 그저 인터넷 찌라시뿐이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도 했고, 하연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 그렇다 할 대표작도 없으니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더욱 중요한 건 나중에 하연이 패션쇼를 망치면 하연의 체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체면이 깎이게 되는 것이니까.“안 교수님, 재고해 주십시오.”지연은 사람들의 말에 그제야 안심했다.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안형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저를 위해 마지막 변론을 했다.“교수님, 저한테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기대 가득 찬 지연의 눈빛만으로도 이번 메인
지연은 뭐가 잘못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안형준이 저 대신 하연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스승과 제자의 감정에 금이 갔다고만 생각했다.이에 지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 섞인 태도로 밀어붙였다.“교수님이 눈여겨보시던 인재도 별거 없네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형준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그리고 그와 동시, 하연도 결정을 내렸다.“엄지연 씨, 경합 받아들이겠습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짱 하나는 칭찬할 만하네요. 하지만 제 말 고깝게 듣지는 말아줘요. 전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지연은 자기 실력에 매우 자신했다.그 말에 하연은 느긋하게 대답했다.“기대할게요. 하지만 지연 씨는 스승님에 대한 존중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네요.”지연의 낯빛은 순식간에 변했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날 가르치죠?”하연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자격까지는 아니고, 그저 좋은 마음에 경고하는 겁니다.”방금 하연의 말에 체면이 깎인 지연은 이내 안형준을 바라봤다.“교수님, 저...”하지만 안형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됐어. 이젠 우리도 늙었으니 젊은이들한테 무대를 넘겨줘야 할 때도 됐지. 그러니까 실력 제대로 보여줘. 사람들도 공정한 눈을 갖고 있으니 승부는 반드시 갈라질 테니까.’지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며 아차 싶었다.‘매번 이 승부욕이 문제네. 하지만 뭐, 이기면 되는 거니까. 내가 반드시 이길 거야.’“최하연 씨, 우리 실력으로 승부 봐요. 사흘 뒤, 어떤 작품 내놓는지 두고 볼게요. 저한테도 하연 씨 실력 한번 보여 줘봐요.”“그래요. 작품으로 승부 봐요.”하연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서로를 마주 보는 두 쌍의 눈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그리고 얼마 뒤, 지연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별의별 상황을 접한 적 있고 익숙해진 터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을 보자 오히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심
회사로 돌아온 하연은 최근 급하지 않은 일정을 모두 뒤로 미루거나 유미한테 맡기고는 이번 패션쇼와 관련된 자료를 열심히 공부했다.밖은 어느덧 어둠이 드리웠지만 DS그룹 맨 꼭대기 사무실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서류 한 뭉치를 안고 온 상혁은 유리 창 너머에서 저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하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이윽고 노크를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바닥에 널브러진 디자인 원고였다. 상혁이 허리를 숙여 한 장 한 장 열심히 줍는 동안, 하연은 펜 끝을 입에 물고 수심에 잠겨 있었다.그러다 상혁을 발견한 순간 모든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진 듯 투덜댔다.“상혁 오빠, 어떡해요? 저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요.”상혁은 원고를 모두 정리해 하연에게 다가갔다.“떠오르지 않으면 잠깐 휴식해. 자기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런데 벌써 하루가 지나갔어요.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그래요.”상혁은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빼앗으며 일으켜 세웠다.“잠깐만 휴식해. 나랑 어디 같이 좀 다녀오자.”“네? 어디 가는데요?”하연이 어리둥절해서 물었지만 상혁은 뭔가 숨기기라도 하는 듯 아무 말 없이 하연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에 도착하자 상혁은 말없이 하연을 조수석에 태웠다. 그러자 참지 못한 하연이 끝내 물었다.“상혁 오빠, 어디 가는데요?”“가면 알아.”상혁은 여전히 뜸을 들이더니 시동을 걸었다.창밖으로 언뜻언뜻 지나가는 건물을 보며 살살 부는 밤바람을 쐬니 복잡했던 마음은 어느새 조금씩 차분해졌다.그렇게 한참 달리니 차는 도시를 지나 웬 고풍스러운 거리에 이르렀다.상혁이 주차 구역을 찾아 차를 세우는 사이, 하연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시립문화전당? 여긴 왜 왔어요?”상혁은 시동을 끄고 차 키를 뽑았다.“가자, 영감 찾으러.”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상혁을 봤지만 끝내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상혁은 싱긋 웃었다.“응, 다른 거 더 볼래?”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이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있어요?”상혁은 또 뜸 들였다.“이따가 보면 알아.”곧이어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반대편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극 공연이 한창이었다.”하연은 상혁과 함께 자수공방에 들러 여러 가지 자수 작품을 보며 고전 문화를 느꼈다.그러다 맨 마지막에 도자기 공방에 들러 진열된 청자기를 보던 중, 하연은 눈이 번쩍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나 이제 오빠가 왜 여기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아요.”청자기를 구경하던 하연은 저녁에 봤던 각종 공연과 하루 중일 연구했던 패션쇼 자료를 떠올리며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펜, 빨리 펜 줘요!”상혁은 다급히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 하연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자 하연은 애가 탔다.“어떡해요? 나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릴 데가 없어요!”하연은 말하면서 다시 도자기 공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 있던 티슈를 꺼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공방 주인은 그 상황을 보자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지금 뭐 하는 거죠?”그때 상혁이 지갑에서 현금 한 움큼을 꺼내 건네자 주인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하연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진지하게 머릿속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려냈고, 상혁은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원고 하나가 뚝딱 완성되자 하연은 그걸 들고 자랑하듯 상혁 앞에 대고 흔들었다.“자요! 청자기를 주제로 한 옷이에요. 어때요?”워낙 그림 솜씨가 좋은 데다, 청자기라는 독특한 원소가 섞이니 유니크 하면서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탄생하여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아주 좋아!”하연은 활짝 웃었다.“이번 패션쇼는 우리나라뿐마 아니라 해외 패션계에서도 과심을 갖고 있대요. 그러니까 이건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패션에 섞으면 아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진 하연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났다.똑똑-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렸고,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그 동작 때문에 스르륵 흘러. 그제야 하연은 어젯밤 사무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발견했다.“들어와요.”하연은 옷을 정리하고 난 뒤 문을 향해 말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하연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최 대표님, 잘 주무셨어요?”“어, 그래.”하연이 짤막한 대답과 함께 의아한 눈빛을 보내오자 태훈은 얼른 설명했다.“이건 부 대표님이 저더러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부 대표님 정말 세심한 분인 것 같아요. 대표님한테도 유독 신경 쓰는 것 같고요.”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하연은 얼른 어색함을 숨기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하연아, 잘 잤어? 내가 정 비서더러 아침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꼭 먹어.]그 말끝에는 웃는 얼굴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그걸 본 하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가끔 보면 소녀 같다니까?’그 덕에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하연은 디테일을 손보기 시작했다.그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 하연은 디자인 원고를 들고 회사를 떠났다. 하연이 운전한 포르쉐가 회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골목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도 따라 시동을 걸었다.한창 운전하다가 주요 도로에 접어들 때, 하연은 무심코 제 뒤를 따라붙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그 차 번호가 너무나 익숙한 번호라는 걸 발견한 하연은 운전대를 꽉 쥐고는 엑셀을 밟았다.그러자 뒤따르던 서준도 엑셀을 밟으며 하연과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뒤 차가 끝까지 따라붙자 하연은 끝내 핸들을 꺾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아니나 다를까, 그 차도 얼마 떨어진 곳에 그대로 멈춰 섰다.하연은 이내 차에서 내려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걸어와 그 차의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곧이어
서준도 질투했다는 걸 인정한다.심지어 부럽기까지 했다.“혹시 그 자식 좋아해?”서준은 하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내뱉었다.“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라 한서준 씨랑 상관없잖아.”“그래?”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하연을 점점 차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하연은 이내 버둥대며 반항했다.“한서준, 이거 놔!”“말해. 부상혁 좋아하냐고.”“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내 자유야!”하연은 분노가 폭발했다.“말해! 최하연, 네 대답 듣고 싶어.”“좋아해. 아주 좋아해. 좋아서 미치겠어. 됐어?”하연은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마구 소리쳤다.그 말을 들은 순간, 시뻘겋게 충혈된 서준의 눈에 일순 절망이 스쳐 지났고, 심장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아파 났다.그 사이를 틈타, 하연은 서준한테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더니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게 한서준 씨랑 무슨 상관이지? 부상혁이 없다면 이상혁이 있을 거고, 이상혁이 없으면 장상혁이 있을 거야. 그게 누가 됐든 넌 절대 한서준 씨는 아닐 거야. 알겠어?”하연은 말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오랫동안 꾹꾹 눌러온 감정이 한순간 폭발했다.서준은 그 대답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주먹으로 차 유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유리가 깨지며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고, 서준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하지만 하연은 보는 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제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하연은 백미러로 서준을 봤지만 결국 고민도 없이 엑셀을 밟고 떠나버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지만 서준은 떠나가는 차를 바라보느라 완전히 무시했다.하지만 상대는 끈질기게 여러 번이나 전화를 걸어오자 결국 귀찮은 듯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한 대표님, 민혜경 씨가 또 자살했다고 합니다.”‘또야?’서준은 입가에 비아냥 섞인 미소를 지었다.“좀 새로운 방법은 없대?”“아니, 이번에는 엄청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투표권이 있으니, 표를 적게 받으면 바로 탈락이에요.”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 지연과 경합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런 룰은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원래부터 하연의 이런 태연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마음에 들어 하던 안형준은 만족하는 눈빛을 보냈다.지연은 하연을 오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턱을 빳빳이 쳐들더니 자신 있게 제 디자인 원고를 꺼내 들었다.“최하연 씨도 도착했으니 모두 우리의 디자인을 봐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지연은 승권을 쥐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제 원고를 꺼내 들었다.지연이 자기의 디자인 원고를 빠짐없이 사람들 앞에 보여주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찬사를 보냈다.지연의 디자인 실력은 확실히 인정할만했다.디자인을 오래 한 게 작품에 한눈에 보이고, 디테일과 라인, 색상 처리 모두 우수했다.“역시 안 교수님 제자 답네. 이런 실력은 10년 정도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나오는 건데. 지연 양, 정말 놀랍네요.”“트렌드에도 부합되고 최근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 데다 산듯하기까지 하니 지금 계절에 딱이네.”“흠잡을 데가 없는 디자인이야. 난 90점!”“...”지연은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어깨가 으쓱했다. 지연이 디자인한 옷은 모두 이번 패션쇼 주제와 부합되는 데다, 한 달 전부터 공을 들여 준비한 작품이다.때문에 사람들의 칭찬도 당연하게 느껴졌다.“교수님 생각은 어때요?”지연은 안형준한테 질문을 던졌다.지연의 디자인을 한번 훑은 안형준은 이미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긴 상태다.물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건 인정할 만했다.“아주 훌륭해. 사상도 진보적이고 스타일도 독특하고 기성복으로 만들면 시장 반응이 좋을 것 같아.”안형준의 평가를 듣자마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말했다.“그럼 저는 지연 양한테 투표하겠습니다.”“저도 지연 양한테 투표할게요.”“지연 양은 이 표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요.”“...”눈 깜짝할 사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