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 하연! 너 기사 봤어?”전화를 받기 바쁘게 서여은의 흥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봤어. 정말 대단하던데!”하연은 서영과 완선이 찍힌 사진을 보며 기자의 촬영 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어쩜 어느 것 하나 버릴 컷이 없이 이렇게 잘 나왔는지. 사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하연의 대답에 여은은 싱긋 웃었다.“내가 이미 손써 뒀으니까 앞으로 사흘 동안 기사가 내려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다니 이 기회에 제대로 유명세를 누리게 해줘야지.”‘여은의 일 처리 능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매번 화끈하고 질질 끄는 법이 없어.’이렇게 좋은 친구를 뒀다는 것이 하연은 내심 든든했다.“고마워. B시에는 언제 돌아올 거야?”“여기 업무 끝나는 대로. 아마 이번 달 말쯤에는 들어갈 것 같아. 도착하는대로 너랑 예나한테 연락할게.”“그래. 우리가 널 위한 환영 파티 제대로 준비하게.”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서영의 성 추문으로 HT그룹 주가는 여전히 하락하여 불과 반나절 만에 몇천억이라는 금액이 사라져 버렸다.HT그룹 맨 위층 사무실 안에서 동후는 최신 소식을 보고하고 있었다.“대표님, B시 모든 언론사에 연락하여 기사 철회할 거라는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파급력이 너무 커서 인터넷에 떠도는 일부 게시물은 말끔히 지우지 못했어요. 게다가 누군가 손을 썼는지 인기 검색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현재 적지 않은 기자들이 대표님을 인터뷰하겠다며 회사 건물 아래에 모여 있어요.”동후는 말하면 말할수록 목소리를 점점 줄였다.서준의 머리에는 여전히 거즈가 감겨 있었지만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이건 HT그룹을 겨냥하는 게 틀림없다.이제껏 비즈니스 업계에서 구른 짬이 있기에 서준은 단번에 상대의 수법을 눈치채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봤어?”동후는 그 말에 서준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어물
“엄마, 나 이제 어떡해? 나 앞으로 어떡해?”서영은 울먹이며 이 한마디만 반복했다.이수애는 이런 딸이 가여웠는지 연신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바로 출국해. 해외에서 몇 년 있다가 소문이 잠잠해져 사람들이 잊을 때쯤 다시 돌아와.”“흑흑흑, 엄마, 나 해외 가기 싫어. 안 갈래.”“현재 상황으로 출국 말고 답이 없어. 그래도 대학은 이미 자퇴했으니 오빠더러 해외 학교 알아보라고 할게.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와.”이수애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붉혔다.이미 너무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었지만 서영은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울음을 멈추며 말했다.“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틀림없어! 최하연이 나 이렇게 만들었어!”“뭐? 최하연이?”이수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동안 너무 속상해 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서영은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텔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최하연에서 저와 구완선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이게 최하연 짓이 아니면 누구 짓인데?’“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날 디자인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학교도 자퇴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내 명예까지 더럽히려 한 거라고.”서영은 생각할수록 속상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하지만 이수애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최하연? 최하연이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아하, 널 망치면 우리 한씨 가문도 HT그룹도 망가지니까 그런 거네. 안 되겠어, 내 당장 그년을 찢어 죽일 거야!”이수애는 당장이라도 하연을 죽일 듯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던 강영숙이 버럭 소리쳤다.“그만해! 아직도 창피하지 않아?”그 말에 이수애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어머님, 어머님도 방금 들었잖아요. 최하연이 우리 서영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어쩜 아직도 최하연 편을 드세요? 최하연은 이제 어머
“할머니, 저도 알아요. 이 일은 제가 철저하게 조사할 거예요.”강영숙은 이 일을 서준에게 맡긴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그 제야 서준은 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눈물범벅이 된 서영의 모습에도 서준은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말해. 대체 어떻게 된 거야?”그 말에 서영은 단번에 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였다.서영은 서준한테 사실대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연을 건드리지 말라는 서준의 경고도 무시한 채 일을 벌이고 오히려 이런 꼴을 당했으니 말이다.이 순간 서영은 서준을 마주할 면목도, 한씨 집안 식구를 마주할 면목도 없었다.심지어 사실대로 말하면 집에서조차 발붙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엄마...”서영은 결국 이수애를 불렀다.하지만 이수애도 서준의 눈치를 보는 신세인지라 서영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한서영, 사실대로 말해.”서준은 이미 인내심이 사라진 지 오래다.그걸 알기에 서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오빠, 무서워. 그러지 마. 나도 피해자야. 어떻게 친오빠라는 사람이 동생 편도 들어주지 않아?”“한서영, 그만해.”서준은 여전히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주먹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등에 핏줄이 튀어 올랐고, 안색 역시 어두웠다.“네가 최하연 건드렸어? 내 경고 잊은 거야?”이토록 무서운 서준의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서영은 몸을 흠칫 떨며 끝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아니야, 오빠.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 약은 구완선이 구해온 거야. 최하연 망가뜨리자고 계획한 것도 구완선이고. 나도 일이 이렇게 됐는지 정말 모른다고.”서영은 말할수록 서럽고 억울했다.이 일에 크게 관여하지도 않았는데 가장 비참한 꼴을 당했다는 게 분했다.“한마디만 해. 너도 끼어들었어?”서영은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려 했지만 서준의 카리스마에 눌려 겁에 질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걸 본 서준은 콧방귀를 뀌었다.“들었죠? 얘가 먼저 최하연 건드렸다잖아요. 최하연을 망가뜨리려고 하다가 결국 본인이 당한 거고.”서준은 또박또박
서영의 찌라시가 온라인상에서 일파만파 퍼지는 바람에 그 소문을 잠재우느라 서준은 다음 분기에 출시하려던 신제품을 미리 선보였고, 그와 동시에 나노 로봇에 관한 연구 성과도 함께 공유했다.그 효과는 아주 대단했다.서준의 빠른 대처 덕에 HT그룹 신제품에 관한 기사가 서영의 찌라시를 바로 덮어 버렸고, 바닥을 치고 있던 HT그룹 주식 역시 점점 상승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쯧, 역시 한서준은 한서준이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니까. 어쩜 이런 방법을 생각할 수가 있지?”예나가 감탄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은이 이내 대답했다.“자본가들이 흔히 하는 수법이지 뭐. 그런데 한서영이 해외로 쫓겨났대. 아마 당분간은 이런 일 벌이지 못할걸.”“하, 정말 어쩜 그렇게 비겁한 생각을 한대? 솔직히 한서영이 지금껏 한 짓만 생각하면 한서준이 너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해.”“그래도 친동생이니 너무 모질게 굴지는 못하겠지.”두 사람은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동시에 하연을 바라봤다.이윽고 여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한서영은 이미 완전히 매장당했고. 구완선 쪽도 내가 미리 손써 뒀어. 아마 B시에서 일자리는 영원히 구하지 못할걸.”하연은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인이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러니 두 글자로 요약하자면 그냥 쌤통인 거야.”그 말에 예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주 명언이네 명언!”그때 여은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참, 패션쇼 준비는 어떻게 돼 가?”“디자인은 초보적으로 끝났어. 이제 생산 시작하면 아마 월말쯤에 완성될 거야.”이렇게 큰 패션쇼는 하연도 처음 맡아보는지라 세부 사항은 모두 태훈이 도와주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껏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다.“와, 우리 하연이 대단하네. 자, 이리 와, 이 언니가 뽀뽀해 줄게.”당장이라도 하연을 덮칠 듯 얼굴을 갖다 대던 예나는 시선 속에 나타난 실루엣을 본 순간 싱긋 눈웃음을 쳤다.“저기 봐, 누가 왔나.”이윽고 그
하연은 흥분한 듯 말했다.이것 역시 상혁이 이곳에 온 목적이기도 하다.“이 한복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오늘 저녁 자선 경매 활동에 경매품으로 나올 거래.”그 말에 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뭘 멍하니 있어? 얼마가 됐든 무조건 사야지.”여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그럼, 이 한복이 패션쇼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무조건 손에 넣어야지.”한복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던 하연은 결심이 선 듯 천천히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오빠, 이렇게 해요.”“그래, 오늘 저녁 내가 같이 가줄게.”예나와 여은은 그 말에 다급히 끼어들었다.“그럼 우리도 갈래요.”...저녁 7시가 되자, 이번 자선 경매가 열리는 B시의 제일 경매장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번 자선 경매 활동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B시에서 알아주는 유명 인사들이다.같은 계열 색상의 커플룩을 입고 나타난 예나와 여은은 경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저 사람 B시 디자이너 브랜드숍의 장 사장아니야? 장 사장이 이런 곳에 다 오다니.”“그 옆에 사람도 낯이 익은데. 아! 생각났어. 보그 패션 잡지 편집장이잖아.”“두 사람 친구 사이였구나. 진짜 부럽다.”“우리도 가서 인사나 할까?”“...”적지 않은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두 사람과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고, 말재주가 뛰어난 데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 덕에 예나와 여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명함을 받게 되었다.한편, 하연이 상혁의 팔짱을 낀 채 경매장에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그도 그럴 게, 오늘의 하연은 너무 아름다웠다.하늘거리는 드레스는 하연의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냈고, 역시 명문가 아가씨가 아니랄까 봐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우라를 내뿜었다.게다가 하연 옆에 선 상혁마저 워낙 뛰어나니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 모두 하연과 서준이 결혼했던 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순
이미 많은 상황을 겪어 본 터라 제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는 상혁의 말에도 설아는 화내지 않았다.“이해해요. 사무가 다망한 분이니 잊을 수 있죠. 저는 한설아라고 해요. 전에 FL그룹 창립 파티에서 뵌 적이 있는데.”상대의 설명에도 상혁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아, 죄송해요. 기억나지 않네요.”거절 의사가 다분한 직설적인 말에 설아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어색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옆에서 지켜보던 하연이 오히려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상혁이 이런 미녀의 대시에도 꿈쩍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때, 검은색 수제 양복 차림의 서준이 경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서준은 그동안 HT그룹 평판이 바닥에 떨어진 터라 다시 명성을 되찾을 목적으로 이번 자선 경매 활동에 참석한 거다.이번 기회에 기부도 하고 HT그룹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새롭게 각인시키려고.“한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주최자는 서준에게도 공손하고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은 HT그룹 명예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서준은 여전히 B시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고, 한씨 가문 역시 B시에서는 손꼽히는 가문이기에 일개 주최자가 감히 무례를 범할 수 없었다.때문에 주최자는 서준을 맨 앞줄로 안내했다. 그것도 마침 하연과 상혁의 옆자리에.하연은 본 순간 서준의 시선은 한 시도 하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상혁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안색과 눈빛이 이내 어두워지더니 곧장 제 자리에 앉았다.“우선 오늘 저희 경매장을 찾아 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 밤 벌어들인 수입은 전액 적십자사에 기부되어 독거노인과 고아를 돕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경매사의 말이 끝나자 현장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이어서 바로 오늘 밤의 첫 번째 경매품을 소개하겠습니다. JY그룹에서 기부해 준 팔찌, 2000만 원부터 호가 진행하겠습니다.”“2200만.”“2600만.”“3000만.”“...”잇따른 호가에 팔찌의 가격은
“기껏해야 1억짜리 시계가 4억까지 불리다니, 정말 놀랍네.”“호가한 사람이 누군지 봐봐. 최하연이잖아. 돈이 넘쳐날 정도로 많은 최씨 집안 아가씨잖아.”“하긴, 4억이 뭐 돈으로 보이겠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설아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번호판을 들었다.“6억!”경매사는 흥분한 듯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자, 6억 나왔습니다!”그때 하연이 다시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10억!”“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시계 하나에 10억? 이게 말이 돼?”“아무리 돈이 넘쳐 흘러도 그렇지.”“너희가 뭘 알아? 이건 어디까지나 자선 경매이니 기부하고 싶은 만큼 가격 부르는 거겠지.”“...”그때 상혁이 이해되지 않는 듯 하연에게 속삭였다.“이제 그만해.”하연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가격은 손목시계의 원래 가격을 훨씬 초월하는 가격이었다.하지만 하연은 상혁을 위로하듯 말했다.“괜찮아요.”하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아가 다시 가격을 불렀다.“12억!”심지어 가격을 부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마치 12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16억!”하연이 곧바로 따라 가격을 덧붙이자 설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발을 굴렀다.“20억!”이 가격은 단연 최고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심지어 앞서 나온 경매품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최고가이기도 하기에 현장 분위기는 단번에 끓어올랐다.“한설아 마친 거 아니야? 20억을 주고 시계 하나를 산다고?”“뭐 돈이 넘쳐흘러 쓸 곳이 없나 보지.”“설마 눈치 못 챘어? 한설아와 최하연 경쟁하는 거 같지 않아?”“부자들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우린 그냥 구경이나 하자고.”“...”하지만 이번에 설아는 가격을 부르자마자 하연이 뒤따르기를 기다렸다.20억은 이미 설아의 예산을 초과한 금액이라 하연이 가격을 더 부르면 포기할 생각이었다.“네, 20억 나왔습니다!”경매사는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자, 다음으로 소개할 경매품은 청자를 주제로 한 조선시대 한복입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1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1억 1천만!”“1억 2천만!”“1억 4천만!”“...”얼마 지나지 않아 한복의 가격은 단번에 2억으로 치솟았다.그때 하연이 때마침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3억!”주위 사람들은 하연이 경매에 참가하자 하나 둘 번호판을 내려놓으며 자진 포기했다.하지만 그때, 서준이 갑자기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3억 6천만!”이건 오늘 밤 서준이 처음으로 호가한 가격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한복 한 벌을 두고 하연과 경쟁해야 했다.“헐, 이건 또 무슨 명장면이래? 한 대표님과 최하연이 붙었는데?”“전처와 전남편의 싸움이라, 과연 누가 이길까?”“갑자기 기대되는데?”“...”서준이 갑자기 경매에 뛰어들 줄 몰랐던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로 뒤따랐다.“4억 4천만!”그러자 서준 역시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6억!”가격을 외치는 서준의 모습은 마치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오늘 서준이 경매에 참석한 목적은 사실 이 한복 때문이다.그도 그럴 게, 이 한복은 한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것이니까.심지어 강영숙이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왔던 가보인데, HT그룹 창립 초기 회사 상황이 어려워 경매에 내놓았었다.나중에 HT그룹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 서준은 줄곧 이 한복을 다시 사들이려고 했으니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면서 비매품으로 전해진 터라 어찌할 수 없었다.그런데 오늘 그 한복이 경매로 나왔으니 서준은 반드시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8억!”물론 하연 역시 이 한복이 필요했다.이번 패션쇼에 이 한복을 선보일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거니까.“12억!”엎치락뒤치락 가격을 부르는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몇억, 몇십억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16억!”“20억!”“28억!”“...”그러다 가격이 40억까지 치솟았을 때, 서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하연을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