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장미정이 다가와 말했다.“사모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안 들어왔다고?’권나율은 잠깐 멈칫했다가 크게 안도한 듯 환하게 웃었다.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을 챙겨줄 사람이 없고, 하린 이모에게 줄 호떡도 준비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래도 괜찮아. 엄마가 아예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일이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그렇게 생각하자 권나율은 다시 웃으며 장미정에게 말했다.“그럼 난 씻고 잘래요.”“네, 알았어요.”장미정이 권나율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권예준도 돌아와 있었다.그런데 권예준이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장미정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권 대표님?”권예준이 물었다.“오늘 하루 종일 안 들어왔어요?”“네.”권예준은 잠깐 멈칫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새로운 일을 해 보겠다며 이것저것 벌이는 모양인데, 마음대로 해봐. 어차피 별 성과도 없을 테고 며칠 지나지 않아 얌전히 돌아올 테니까.’“알겠어요.”“네.”장미정은 권나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씻어주었다.권예준은 물 한 잔을 마신 뒤 위층 침실로 올라갔다.그는 휴대전화를 침대 옆 협탁에 올려 충전기에 꽂고,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후 욕실로 들어갔다.그런데 텅 빈 욕조를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정채윤이 늘 미리 목욕물을 받아 놓곤 했다.‘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곧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밖의 협탁 위에서는 휴대전화가 한 번 진동하며, 상단에 고정해 둔 연락처인 안하린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그 아래로는 모두 업무 관련 메시지였다.정채윤이 보낸 메시지는 어디에 묻혔는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다음 날 아침.권나율은 잠에서 깨자 인형을 끌어안고 안방 문을 열었다.“엄마.”드레스룸에서 나온 권예준이 말했다.“엄마 아직 안 왔어.”“네?”권나율은 실망한 얼굴로 인형에
최형섭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그 사람들 안 만날 거야. 안하린네 회사도 예전부터 같이 일할 생각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야.”그제야 정채윤은 긴장이 풀며 피식 웃었다.“고마워, 선배.”“뭘 그런 걸 가지고. 청수 건축사무소도 네가 없었으면 지금까지 못 왔어.”최형섭이 말을 이었다.“난 지금 네가 맡은 프로젝트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얼른 돌아와서 저 사람들한테 제대로 보여 줘.”정채윤이 웃었다.“알았어.”최형섭도 웃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기분이 걱정됐다.“오늘 저녁엔 몇 시에 끝나? 술이라도 한잔할래?”“아니, 됐어.”정채윤은 거절했다.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지금은 공부해서 실력을 쌓거나, 병원에 계신 부모님을 보러 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응.”전화를 끊고 나니 정채윤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 뒤 곧바로 일하러 갔다....한편.권나율과 권예준, 안하린은 바다에 나가 놀다 돌아온 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원래는 저녁에 권나율을 데리고 오기로 했었다.하지만 밤에는 볼 수 있는 풍경이 적을 것 같아 아예 학교에 결석계를 내고 점심부터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식당 안.권나율은 한 상 가득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보다가 그제야 정채윤이 떠올랐다. 얼마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던 것도 생각났다.그때는 하린 이모와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이제 조금 진정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어젯밤 정채윤에게 오늘 점심 학교에 와서 같이 밥 먹어 달라고 조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권나율은 작은 눈썹을 찌푸렸다.안하린의 눈을 피해 몰래 키즈폰을 켜고 정채윤에게 답장을 보내려 했다.그 순간 한 시간 전에 도착한 정채윤의 메시지가 보였다.권나율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메시지를 끝까지 읽자 그녀는 눈이 반짝거리며, 가슴에 남아 있던 죄책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엄마가 학교에 안
“알겠습니다.”정채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일정이 있어 먼저 학교를 나왔다.그녀는 다시 택시에 탄 뒤 미리 예약해 둔 식당을 취소하고 권나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엄마가 점심에 일이 생겨서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다음에 시간 될 때 데리러 가서 같이 밥 먹자. 오늘은 학교에서 밥 잘 챙겨 먹고 있어.]권나율이 자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라면 그냥 모르는 척해 주면 됐다.다만 권나율은 답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지금 안하린 일행과 신나게 놀고 있는 건지 좀처럼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정채윤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기사에게 남진 그룹으로 가 달라고 했다.그때 휴대전화가 갑자기 다시 울렸다.윤세형의 전화였다.정채윤이 받았다.“네, 윤 팀장님.”윤세형은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정채윤 씨,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요. 앞으로 안하린 씨도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습니다.”정채윤은 표정이 굳어지며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왜, 왜요?”윤세형이 설명했다.“권 대표님이 이 프로젝트에 투자했어요. 지금은 최대 투자자고요. 그래서...”뒷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앞으로 정채윤 씨와 안하린 씨가 함께 이번 프로젝트의 디자이너를 맡게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윗선에서 두 분의 설계안 중 더 나은 쪽을 골라 새 단지의 최종안으로 채택할 겁니다.”정채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사실 조금 전부터 권예준이 안하린을 위해 뭔가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줄은 몰랐다.안하린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녀 대신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아예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고 안하린을 합류시키다니.‘정말 안하린에게는 지극정성이네.’정채윤이 권예준과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어도, 그녀가 다른 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댁에서 서러운 일을 당해도 권예준은 한 번도 신경 써준 적이 없었다.정채윤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정채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잠시 후 프로젝트팀 회의가 곧 시작될 예정이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몇 분을 기다려도 여전히 답장이 없자 정채윤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위층으로 올라가 회의에 참석했다.이번 회의는 주로 건설 단지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였다.윤세형이 회의를 진행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채윤에게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전에 한 번씩 다녀왔어요. 내일 아침에는 제가 정채윤 씨를 기존 단지로 안내할게요.”정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부탁드릴게요. 윤 팀장님.”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안도했다.정채윤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는 건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비록 그들은 상급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정채윤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었다.회의는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끝났을 때는 점심시간이 되었다.사람들은 물건을 정리하며 하나둘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정채윤 옆에 앉아 있던 문도연은 그녀가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말을 걸었다.“정채윤 씨, 같이 식당 가서 밥 먹을래요?”정채윤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문도연의 요청에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으나 잠시 뒤 따로 할 일이 있었다.“고마워요. 다음에 같이 먹어요. 이따가 딸아이 데리러 가야 해서요. 아이와 함께 밥 먹기로 했거든요.”‘딸이라니?’문도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결혼하셨어요?”정채윤의 미소가 조금 굳어졌다.그녀는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 곧 이혼할 예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문도연은 짐짓 놀랐지만 그래도 웃으며 말했다.“그럼 아이 데리러 가세요. 다음에는 꼭 같이 먹어요.”“네.”문도연이 떠난 뒤, 정채윤도 가방을 들고나왔다.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휴대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권예준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못 본 건지, 아니면 그녀에게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운 건지 알 수 없었다.지금 상황을 보면 아마 후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SUV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정채윤은 무심코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흘끗 바라봤다.햇빛이 내려앉은 가운데 남자는 역광 속에 앉아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그는 위에 심플한 검은색 티셔츠 한 장만 걸쳤지만, 단단하고 남성적인 분위기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햇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그의 날카로운 얼굴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곧게 뻗은 옆모습과 깔끔한 짧은 머리만으로도 얼마나 잘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순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정채윤은 왠지 이 남자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운전기사인 줄로 착각하고는 조정섭에게 말했다.“조심해서 가세요.”“그래. 들어가 봐. 이따 회의도 있잖아.”조정섭은 손을 흔들고 조수석에 올라탔다.안전벨트를 매던 그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봤다.남자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쥐고 있었고, 팔뚝에는 힘줄까지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조정섭이 웃으며 말했다.“내려서 채윤이한테 제대로 인사를 하든가, 아니면 출발하든가 해. 여기서 남들 길 막고 있지 말고.”그제야 남자가 반응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조정섭을 흘겨본 뒤, 사람 자체처럼 차갑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누구한테 인사를 하라는 거예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조정섭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내심 한마디 묻고 싶었다.그럴 거면 오늘 나랑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냐고 말이다.그는 피식 웃었다.“그래.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그럼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엄 소령님?”엄준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조수석 쪽 사이드미러를 바라봤다.거울 속에는 여전히 건물 아래에 서 있는 여자가 비쳤다.흰색 쉬폰 블라우스에 검은색 머메이드 스커트를 입은 모습은 평소와 달리 성숙한 여성미를 풍겼다.9년 전, 풋풋했던 그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변한 게 어찌 외모뿐이겠는가. 그 마음도 변했을 텐데.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엄
“정채윤 씨의 경력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없지만, 이 자리를 맡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췄어요. 제가 보증합니다.”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졌다.모두가 문 쪽을 바라봤다.정채윤은 그가 엄석현의 오른팔인 조정섭이라는 걸 알아보고 감사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다만 지금까지 맡았던 프로젝트들이 모두 정부나 군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전부 보안이 걸려 있어 외부에 밝힐 수 없었을 뿐이었다.김현중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서둘러 앞으로 나갔다.“조 부사관님.”조정섭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눈 후 멀찍이 있는 정채윤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저분은 엄 사령관님의 부사관이잖아.”“그, 그럼 저분 말이 거짓말일 리는 없겠네. 직접 여기까지 왔는데.”“그러게. 우리가 정채윤 씨를 오해했나 봐. 정말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 수도 있겠어.”“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난 직접 실력을 보기 전까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래.”그 말을 듣던 안하린은 의심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곧 정채윤의 할아버지와 엄 사령관이 전우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긴장을 풀었다.정채윤의 실력이 어떤지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졸업하자마자 집에서 가정주부로 살던 사람이 무슨 대단한 비밀 프로젝트를 했겠는가?결국 인맥을 썼다는 걸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권예준도 정채윤을 한 번 바라봤다.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권예준이 안하린을 보며 물었다.“이 프로젝트, 계속하고 싶어?”안하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다.권예준의 능력이라면 이 프로젝트를 통째로 자신에게 가져다주고 정채윤을 내쫓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안하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인맥으로 들어온 데다 실력도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안하린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