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 지금 뭐 해?” “네 아빠 구속 중.” 내 절친의 아버지를 내 손으로 잡아갔다. 문제는 그 남자가, 우리 아빠의 30년 절친이기도 하다는 것. 잘생겼고, 다정하고, 사람을 지나치게 잘 믿어서 자기 회사에서 벌어진 횡령조차 뒤늦게 알아버린 남자. 나는 검사로서 그의 무죄를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피의자가 아니라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선을 먼저 넘은 건 나였다. “어젯밤은 실수였어요.” 그러자 늘 내 선택을 존중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고집을 부렸다. “거리를 두라고 하면 두겠습니다.” “…….” “그런데 없던 일이라고는 하지 마.” 절친은 아직 모른다. 자기 아빠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 상대가, 나라는 것도.
View More1화. 친구 아빠와 잔 다음 날
내 침대 옆 협탁에 남자 시계가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은 아니었다. 은색 케이스, 검은 가죽줄. 문제는 그 시계가 지금 내 침대 옆에 있다는 거였다. 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대신 침구가 깊게 눌려 있었다. 짙은 우디 향. 그리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젯밤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덜미가 당겼고 허리께가 묘하게 무거웠다. 바닥에는 내 블라우스가 떨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검은 남자 양말 한 짝이 얌전히 뒤집혀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미쳤다. 다른 말이 없었다. 어젯밤 나는 윤태성과 잤다. 내 절친의 아버지와. 우리 아빠가 30년 가까이 친구라고 부른 남자와. 며칠 전까지 내 앞에 피의자로 앉아 있던 남자와. 그리고 내가 먼저 입을 맞춘 남자와. 부엌에서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났다. 딱, 딱. 놀랄 만큼 평온한 소리였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바닥의 셔츠를 집어 들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흰색 남자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린 채였다. 어젯밤 내가 그 단추를 어떻게 풀었는지가 떠올라 재빨리 손을 놓았다. 이 상황에 부엌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아니지. 만든 건 나였다. 내가 먼저 잡아당겼고, 내가 먼저 입을 맞췄다. 나는 침대 옆에 걸쳐 둔 로브를 대충 여미고 방문을 열었다. 내 집은 넓지 않았다. 그런데 식탁 위에 컵이 두 개였다. 윤태성이 내 주방에 서 있었다. 어젯밤보다 단정했다. 바지는 그대로였고 셔츠는 다시 입었지만 맨 위 단추 두 개는 잠그지 못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그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깼습니까?” 목소리까지 평온했다. 나는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하세요?” “아침 만들고 있습니다.” “그건 보여요.” “그럼 질문을 잘못한 것 같은데.” 태성이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이 얄미워야 하는데, 시선이 입술에 먼저 갔다. 어젯밤 내 입술에 닿았던 입술. 나는 곧장 냄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집에 먹을 게 있었어요?” “없더군요.” “그런데 뭘로 만들었는데요?” “아침 일찍 마트 다녀왔습니다.” 나는 현관 쪽을 봤다. 그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굳이요?” “지금은 굳이 챙겨 먹는 게 좋겠습니다.” 태성이 냄비를 한 번 저었다. “속 편한 걸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말 뒤에 붙을 이유를 생각한 순간 나는 목까지 뜨거워졌다. 태성은 모르는 척했다. 혹은 알고도 살려 준 것 같았다. 그게 더 문제였다. 냄비 안에는 계란을 푼 맑은 국이 있었다. “굴은 안 넣었습니다.” 나는 그를 봤다. “여기 어디에 굴이 들어갈 상황이 있었어요?” “국을 고르다가 생각나서.” “뭐가요.” “당신이 굴 못 먹잖습니까.” 당신. 그 호칭이 이상하게 들렸다. 서 검사도 아니고, 지안이도 아니었다. 나는 식탁 의자를 빼며 물었다. “그걸 아직 기억해요?” “그 정도는 기억합니다. 당신이 거의 손도 안 댔으니까.” “언제 얘기했는데요?” “서하 대학교 입학하고 다 같이 식사했을 때.” 몇 년 전이었다. 서하가 대신 먹어 주면서 웃었던 기억은 있었지만, 윤태성이 그걸 보고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태성은 국그릇을 내 앞에 놓았다. “물부터.”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식탁 위에 뒤집어 둔 내 휴대전화. 화면을 본 순간 손이 멈췄다. 윤서하. 태성의 딸. 내 절친. 태성도 화면을 봤다. 우리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두 번째 진동이 울렸다. 나는 휴대전화를 집었다. “받아야죠.” 태성이 낮게 말했다. “알아요. 그냥 잠깐만 조용히 있어요.” “필요하면 내가 나가겠습니다.” “어디로요.” 내가 기가 막혀 되묻자 태성은 현관 쪽을 흘끗 봤다. 그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남자가 지금 딸의 전화를 피해서 양말 한 짝만 신은 채 현관 밖으로 나가려는 건가. 웃을 일이 아니었다. 전화를 받았다. “어.” -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서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태성을 봤다.20화. 당신한테는 아빠 친구로 있고 싶지 않다다음 날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윤태성 사건에서 빠졌다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기존에 들고 있던 다른 사건들이 그대로 있었고, 오히려 인계와 보고 때문에 더 늦게까지 남았다.저녁 여덟 시.아홉 시 반.열한 시.커피 세 잔째를 마시다 속이 쓰렸다.후임 담당 검사들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몇 번 봤다.그 안에 내가 있지 않다는 게 아직 어색했다.백준서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렇다고 물을 수도 없었다.나는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싶었다.***집에 도착한 건 자정을 조금 넘긴 뒤였다.현관 앞에 보냉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택배 기사 문자는 없었다.가방 위에 작은 종이가 접혀 있었다.나는 한참 서서 그걸 봤다.설마.종이를 펼쳤다.〈냄비로 옮겨서 끓으면 4분 - 윤태성〉웃음이 터졌다.생각보다 귀여워서 정말 어이가 없었다.나는 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안에는 반찬통 두 개와 국통 하나가 있었다.맑은 무국.계란말이.멸치볶음.그리고 마트 영수증.비싼 음식도 아니었다.누가 봐도 집에서 먹으라고 산 평범한 재료.영수증 뒷면에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안 먹으면 버리지 말고 냉동실에 넣어 두세요.〉“진짜 잔소리.”말은 그렇게 했는데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나는 국통을 꺼냈다.차가웠다.태성이 언제 두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놨다.오늘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다.어제도 그랬다.그런데 음식은 연락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 사람이 자꾸 옆으로 들어왔다.문자를 보냈다.〈이런 건 연락 아닌가요.〉보내자마자 답이 왔다.〈문자는 연락입니다. 음식은 아니고.〉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왜 이런 걸 해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안 먹으니까.〉너무 간단했다.나는 냄비에 국을 옮겼다.불을 켰다.〈내가 굶든 말든 회장님이 왜 신경 써요.〉메시지를 보내고 냄
19화. 연락하지 말랬더니 하루를 참았다화면을 보고도 바로 받지 않았다.세 번 울리고 나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퇴근했습니까?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연락하지 말라니까요.”- 그래서 하루 종일 안 했습니다.“지금은 하루 안 지났는데.”- 업무가 끝났을 시간이라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자의적 해석이네요.”- 싫으면 끊겠습니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태성이 짧게 웃었다.- 안 끊어도 되겠군요.“이럴 때만 눈치 빨라요.”잠깐 침묵이 생겼다.차창 밖으로 신호등이 흘렀다.태성이 먼저 말했다.- 오늘 회사 쪽에서 백준서 이름이 나왔습니다.심장이 내려앉았다.“사건 얘기하려고 전화했어요?”- 아니요.대답이 빨랐다.- 그 얘기는 당신한테 물을 생각 없습니다.물어서도 안 되고.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태성이 계속 말했다.- 언론 문의가 들어왔고 회사 법무팀에서도 이름을 확인했습니다.그 정도는 내가 당사자로서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그럼 왜 나한테 말해요.”- 하나 확인하고 싶어서.“뭘.”잠깐 침묵.- 그 사람이 그 백준서입니까?나는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았다.그 백준서.내가 예전에 태성에게 소개했던 남자.서하 생일에 같이 앉아 밥을 먹었던 남자.태성은 사건을 묻는 게 아니었다.나와의 관계를 묻고 있었다.“맞아요.”내가 대답했다.“내가 만났던 백준서.”전화기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왜 말이 없어요.”- 생각 중입니다.“또요?”- 네.“사건 생각?”태성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태성 씨.”- 듣고 있습니다.“뭘 생각하는데요.”이번에는 그가 숨을 한번 내쉬었다.- 이 질문은 사건이랑 상관없습니다.“알아요.”- 그러니까 대답 안 해도 됩니다.“뭔데요.”태성은 한동안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사람이 결국 꺼낸 질문은 뜻밖에 단순했다.- 얼마나 오래 만났습니까?나는 창밖
18화. 사건에서 빠졌는데 그가 더 신경 쓰였다서하와 헤어지고 청사로 돌아오는 길에 백준서에게 전화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습관이었다.답을 모르면 확인하고 싶었다.사람이 의심되면 불러서 묻고 싶었다.그게 내 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할 수 없었다.사건에서 빠졌으니까.백준서가 전 남자친구라서가 아니라, 윤태성과 사적 관계가 생겼기 때문에.그 사실이 더 기분 나빴다.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전화를 껐다.백준서 번호는 삭제한 지 오래였다.그래도 외우고 있었다.사람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과 전화번호가 지워지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백준서를 처음 윤태성에게 소개한 건 삼 년 전이었다.거창한 자리가 아니었다.서하 생일 저녁이었다.가족끼리 오래 알고 지낸 덕에 나도 초대받았고, 당시 만나던 백준서를 데려갔다.“처음 뵙겠습니다. 백준서입니다.”그때 준서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마르고, 조금 덜 비싼 시계를 차고 있었다.태성은 악수를 하며 웃었다.“지안이가 사람 데려온 건 처음 보는군요.”나는 바로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세요.”서하가 옆에서 더 크게 웃었다.“아빠, 얘 긴장하잖아.”준서는 긴장하지 않았다.오히려 자연스러웠다.재무 쪽 일을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태성은 몇 가지 질문을 했다.준서는 대답을 잘했다.숫자로만 설명하지 않고 사람과 조직 얘기를 섞었다.나는 그게 좋았다.그때는.나중에 태성이 준서를 회사 사람들과 몇 번 더 만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처음에는 외부 프로젝트 자문.그다음은 계열사 구조조정 TF.그리고 결국 태성그룹 재무전략실로 들어갔다.내가 추천서를 써준 것도 아니었다.채용하라고 한 적도 없었다.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문장이 하나 남았다.내가 소개했다.윤태성은 사람을 오래 믿는 사람이었다.그리고 그 시작에 내가 있었다.***오후 다섯 시가 넘어 후임 담당 검사가 내 자리로 왔다.“선배, 인계 하나만 더 확인해 주세요.”“사건 내용이면 안 돼.”“내용
17화. 절친이 아빠의 여자를 찾아달라고 했다손이 목으로 올라갈 뻔했다.오늘 나는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특별한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괜히 신경 쓰여서 평소보다 목이 높은 셔츠를 골랐다.“추워서.”“실내인데.”“아까 밖에 있었잖아.”서하가 의자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너도 이상하다.”“뭐가.”“어제 전화도 안 받고.”“잤다니까.”“아침 목소리 완전 이상했고.”“피곤했다니까.”“그리고 지금 내가 아빠 여자 얘기하는데 얼굴이 빨개져.”나는 정말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왜 그걸 나랑 엮어.”“안 엮었는데?”서하가 입꼬리를 올렸다.걸렸다.“너 남자 생겼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처럼 보였는지 서하 눈이 커졌다.“미친. 진짜네.”“아니거든.”“지금 한 박자 늦었어. 검사님, 진술 신빙성 없음.”이럴 때만 내가 가르친 말을 잘 썼다.“누군데.”“없어.”“백준서는 아니지?”그 이름이 나오자 웃음기가 사라졌다.서하도 바로 알아챘다.“아, 미안.”“괜찮아.”“그 새끼 얘기할 생각 아니었는데.”“진짜 괜찮아.”괜찮지 않았다.하지만 이유는 서하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서하는 내 손등을 툭 쳤다.“아무튼 새로 생긴 사람 있으면 말해. 내가 봐줄게.”“네가 왜 봐.”“친구 남친 검증은 절친의 권리.”“그럼 나도 네 아빠 여자 검증해야겠네.”말하고 나서 둘 다 잠깐 멈췄다.나는 속으로 욕했다.왜 그 말을 했지.그런데 서하는 너무 자연스럽게 웃었다.“좋지.”“농담이야.”“아니, 진짜 해줘.”“뭘.”“우리 아빠 여자.”나는 표정을 굳히지 않으려고 애썼다.서하는 진심이었다.“내가 직접 캐면 아빠가 눈치챌 거 아냐. 너는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잖아.”“내가 왜 자연스러워.”“우리 집이랑도 오래 알았고, 아빠도 너 좋아하잖아.”그 문장에서 마지막만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아빠도 너 좋아하잖아.서하는 다른 의미로 말했다.나는 다른 의미로 들었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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