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화

작가: 운축
정채윤은 발코니에 도착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치자 그제야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채윤은 코를 훌쩍이고 몇 차례 기침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조금 정상으로 돌아오자 다시 휴대폰을 들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바쁜 모양인지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채윤아, 무슨 일이야? 아까 업무를 처리하느라 전화 온 줄도 몰랐어.”

정채윤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져서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나 아빠 모시고 동제시로 와서 치료받고 있어. 주치의 선생님이 그러는데, 가능하면 홍유건 선생님한테 진료를 한번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대. 그래서 말인데...”

남자는 단번에 정채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알겠어. 내가 이따가 한 번 연락해 볼게.”

“고마워, 선배.”

“고맙긴. 너희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으실 수 있다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남자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남진 그룹 쪽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랑 선생님이 나서줄까?”

선생님 얘기가 나오자 정채윤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채윤은 선생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남자는 정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리고 위로했다.

“괜한 걱정은 하지 마. 선생님 말이야. 그동안 겉으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널 신경 쓰고 계셔. 네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셔.”

“어제 네가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우리 몰래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선생님이 네가 맡기로 한 남진 그룹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다는 걸 아신다면 분명 너를 위해 기회를 되찾아 주려고 하실 거야.”

정채윤은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사실 그동안 건축사무소로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은 많았다. 하지만 가족이 걱정되는 바람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저 시간이 날 때마다 전문 서적을 들여다보거나 관련 자격증을 준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이혼을 앞두고 있으니 진심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채윤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대로 공부하며 실력을 쌓은 뒤 돌아가고 싶었다.

“남진 그룹 일은 이미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이틀 뒤면 해결될 거야. 그리고 일단 한동안 제대로 공부하면서 실력을 좀 더 쌓은 뒤에 복귀하고 싶어.”

남자는 깜짝 놀랐다.

“정말?”

“응.”

“와, 어떡하지? 나 좀 신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만나러 가고 싶어. 네가 진짜 복귀한다니, 믿기지 않아. 네가 2년만 일찍 복귀했다면 우리 건축사무소는 벌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을 거야.”

정채윤은 피식 웃었다.

“선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너는 네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선생님이 예전부터 너한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계셨는데...”

남자는 거기까지 말한 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듯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절대 자신감을 잃거나 좌절하지 마. 나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다 너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채윤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작게 대답했다.

“응.”

전화를 끊었다.

정채윤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생겼다. 정채윤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병실로 돌아가 부모님 곁을 지켰다.

그날 오후 내내 정채윤은 권예준과 안하린, 그리고 권나율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였다.

물론 권예준과 권나율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정채윤은 저녁을 사 먹기 위해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정채윤이 병실을 나가기 전, 서은영은 특별히 당부했다. 권나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사 오고, 권나율에게 전화해서 이곳으로 부르라고 말이다.

정채윤은 부모님이 권나율을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채윤은 결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십 분 뒤, 정채윤은 식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직원에게 주문을 하겠다고 말한 뒤 메뉴판을 넘겼다.

“갈비찜 하나, 찐만두 하나...”

그때 갑자기 뒤쪽의 유리문이 다시 열렸다.

“예준아, 우리는 병원 식당에서 간단하게 먹어도 돼. 굳이 큰돈 들여 사 먹을 필요는 없어.”

“외증조할머니, 외증조할머니는 지금 몸이 편찮으시니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드셔야 해요!”

권나율의 목소리였다.

정채윤은 멈칫하며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정채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권나율은 친근하게 한 손으로 안하린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박금옥의 손을 잡은 채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명화는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권예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귀찮은 기색은 전혀 없었고 표정도 부드러웠다.

박금옥은 권나율의 말을 듣고 병색이 짙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율이는 참 착하네.”

권나율은 생글생글 웃었다.

권예준이 말했다.

“할머니는 몸이 안 좋으시니까 앞으로는 여기 직원들에게 매일 식사를 보내 달라고 할게요.”

자신의 외할머니를 세심하게 챙기는 권예준의 모습을 본 안하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박금옥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고마워, 예준아. 신경 많이 써줘서.”

그때 매니저가 소식을 듣고 위층에서 내려와 그들을 VIP 룸으로 안내했다.

“대표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난번에 드셨던 메뉴로 준비해 드릴까요?”

권나율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지난번에 아빠가 저랑 하린 이모를 데리고 여기 와서 먹었던 음식은 이제 다 질렸어요. 오늘은 다른 걸로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들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정채윤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 세 식구가 함께 식사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권예준은 늘 바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과는 함께 식사할 시간조차 없다던 사람이, 권나율을 데리고 다른 여자와 밥을 먹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동안 권예준과 권나율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계속 요리 실력을 갈고닦으며 매번 다른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성껏 도시락을 싸서 챙겨가게 했다. 물론 그들이 그걸 다 먹기는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원은 정채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더 주문하시겠어요? 아니면 아까 말씀하신 것만 준비해 드릴까요?”

정채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룸 안으로 들어간 걸 본 뒤 시선을 내려뜨려 주문서를 확인했다.

전부 권나율이 좋아하는 음식들만 적혀 있었다.

“이건 전부 빼주세요.”

정채윤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권나율이 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권나율은 두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채윤이 권나율에게 전화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나러 병원에 오라고 한다면, 권나율은 분명 온갖 핑계를 대며 싫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 음식들을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직원은 잠시 당황했다.

“아, 네.”

정채윤은 다시 담백한 음식 몇 가지와 찌개를 주문해 포장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던 순간, 마침 직원이 VIP 룸으로 음식을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트레이 위에는 해산물 요리가 몇 접시 놓여 있었다. 정채윤은 자기도 모르게 권나율을 떠올렸다. 권나율은 몸이 약하고 위장도 좋지 않아서 해산물을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자마자 정채윤은 곧바로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권예준과 안하린이 곁에 있는데 권나율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정채윤은 병원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권나율은 이미 밥을 먹었고 집에서 숙제하고 있어서 오지 못한다고 거짓말했다.

서은영과 정태환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가 더 중요하지.”

정채윤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뒤 정채윤은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때 옆에 내려놓은 휴대폰이 갑자기 몇 차례 진동했다.

권나율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엄마, 어디예요? 동제시로 돌아왔어요?]

[엄마...]

[...]

정채윤은 무심하게 문자를 힐끗 바라본 뒤 답장하지 않고 계속해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리고 정리를 모두 마친 뒤에야 휴대폰을 들어 답장하려 했다.

그래도 권나율은 정채윤의 친딸이었기에, 적어도 권나율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완전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정채윤은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를 받은 권나율은 서러운 듯 작게 칭얼거리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오랫동안 권나율을 돌봐 온 그녀였기에 아이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권나율이 운 것 같자 정채윤은 걱정이 되어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참 동안 받지 않았다.

결국 정채윤은 하는 수 없이 장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나율과 달리 장미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마침 아래층에서 권나율을 위해 물을 따라주고 있던 참이었다.

“여보세요, 사모님.”

“나율이 괜찮은 거예요?”

“아가씨는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뭔가 잘못 먹은 것 같아요. 지금 아파하면서 울고 있어요. 아까 유 선생님께 전화해서 유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약을 처방해 주고 가셨어요. 저는 지금 아래층에서 아가씨가 드실 물을 따르고 있는 중이에요.”

‘배가 아프다고?’

정채윤은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권나율을 잘 돌봐 달라고 장미정에게 부탁했다.

전화를 끊은 뒤 정채윤은 서은영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정채윤은 잠시 후 권예준이 집에 돌아온다면, 그때 이혼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이혼 후 꽃길   제100화

    그때 박여정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다이닝룸 입구에 서 있는 정채윤을 발견한 박여정은 그제야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채윤아, 일어났니?”정채윤도 옅게 미소 지었다.“네, 할머니.”권예준은 정채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그러다 정채윤이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정채윤 역시 무심코 권예준에게 눈길을 주었다.어젯밤과는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아마 안하린의 집에서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일은 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 정채윤의 눈길을 끈 건 정장의 색깔이었다.‘남색 정장을 입었네?’권예준은 평소 검은색 계열의 정장만 고집했다. 정채윤도 그의 취향에 맞춰 옷을 골라 주곤 했다.예전에 몇 번 다른 색상의 정장을 사 준 적도 있었지만, 권예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정채윤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정장 색깔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골라 준 게 싫었던 거였어.’정채윤은 씁쓸한 생각을 떨쳐 내고 시선을 거두려 했다.그런데 권예준은 그 짧은 순간의 눈길을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정채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권예준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마침 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옷을 갈아입은 권나율이 내려오고 있었다.다이닝룸에 들어선 권나율은 권예준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아빠, 오셨어요!”아이가 품에 와락 안기자, 권예준의 굳어 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응.”권예준은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권나율은 기분 좋게 웃다가 슬그머니 정채윤 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권예준의

  • 이혼 후 꽃길   제99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정채윤은 오히려 차분해졌다.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자,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흐트러진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잠시 후 권나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에서 나왔다.“엄마, 저 다 씻었어요.”권나율은 씻고 나왔다는 말이 무섭게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부터 집어 들었다. 화면을 확인하더니 어린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정채윤은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옷장 문을 열며 평소처럼 물었다.“오늘은 뭐 입고 싶어?”그런데 권나율은 대답은커녕 휴대전화를 내려놓더니 정채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엄마의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옷은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엄마는 얼른 내려가서 아침 드세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권나율은 조금 있다가 안하린이 어젯밤 선물해 준 원피스를 입을 생각이었다.안하린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맞췄다는 원피스였다. 어젯밤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얼른 입어 보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하지만 정채윤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엄마가 알면 또 하린 이모한테 뭐라고 할지도 몰라.’“나율아, 오늘 비 온다고 했으니까 옷은...”정채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권나율은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냈다.곧이어 방문이 닫혔다.그것도 모자라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한 번 더 거는 소리까지 들렸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굳이 문을 두 번씩이나 잠그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정채윤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문을 두드렸다.“나율아.”“왜요?”“이번 주 금요일이 외할아버지 생신이잖아. 선물은 준비했어?”그 시각 권나율은 옷장을 열어 어젯밤 몰래 숨겨 둔 원피스를 꺼내 든 참이었다.예쁜 원피스를 펼쳐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이는 정채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금세 입술을 삐죽였다.“준비했어요. 엄마,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 저 옷 갈아입고 있단 말이에요.”선물은 이미

  • 이혼 후 꽃길   제98화

    식사 생각이 나자, 정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협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었다.그리고 엄준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점심에 시간 있어? 밥 살게.]며칠 전 백화점에서 문방사우를 둘러봤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그래서 오늘은 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다시 한번 살펴볼 생각이었다.정채윤은 윤세형에게 미리 하루 휴가를 낸 상태였다.마침 외출하는 김에 엄준후에게 진 빚까지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메시지를 보낸 정채윤은 답장이 바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씻으러 가려던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엄준후였다.[그래. 어디로 가면 돼?]생각보다 빠른 답장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의 주소를 보내 주었다.그걸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너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시간이 나서 밥을 먹자고 해?]정채윤은 잠시 생각했다.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정태환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건 엄씨 가문에서도 알고 있었다.[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아빠 선물 좀 고르려고.]이번에도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알았어.]정채윤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씻고 나온 뒤 옷을 갈아입던 정채윤은 탁자 위에 놓인 블록을 발견했다.어젯밤 늦게까지 조립해 완성한 작은 캐슬이었다.정채윤은 블록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권나율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아침이니 권나율도 깨울 생각이었다.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가자 권나율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정채윤이 막 입을 열려는데 권나율이 고개를 내밀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깼다고 했잖아요. 안 들어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왜 또 들어오셨어요?”정채윤이 걸음을 멈췄다.“엄마는 못 들었어. 이불 뒤집어쓰고 말해서 그런가 봐.”그러면서 완성한 블록을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권나율은 입술을 삐죽였다.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 권예준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어젯밤 갑자

  • 이혼 후 꽃길   제97화

    이제는 권예준이 무슨 짓을 하든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안하린의 말을 듣는 순간, 정채윤은 가슴 한구석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려 왔다.‘대체 권예준에게 난 뭐였던 거야? 밖에서 안하린이랑 바람피우는 동안 남들 눈이나 속여 주는 허울뿐인 아내였나?’정채윤은 허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자, 저도 모르게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문득 결혼 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권예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건넸던 달콤한 말들과 굳게 약속했던 미래까지...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정채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안하린 씨, 그런 말로 절 자극하려던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그런데 안하린 씨라고 저보다 나을 게 뭐가 있죠?”이내 정채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안하린 씨는 어디까지나 불륜 상대일 뿐이에요. 권예준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권씨 집안에서도 가만있을 것 같아요? 정말 안하린 씨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세요?”그러자 안하린이 코웃음을 쳤다.“정채윤 씨,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진짜 불쌍한 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당장 나율이만 봐도 그렇잖아요. 나율이가 정채윤 씨를 더 좋아할까요, 아니면 저를 더 좋아할까요?”안하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권씨 집안에서 반대하든 예준 오빠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제 걱정하지 마시고 본인 앞날이나 걱정하세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더욱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지금이야 아직 이혼 전이니까 오빠가 생활비라도 주는 거죠. 이혼하고 나면 정채윤 씨한테 돌아갈 돈은 한 푼도 없을 거예요. 남진 그룹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평가만 끝나면 짐 싸서 나가야 할 테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 두세요.”그 말을 끝으로 안하린은 일

  • 이혼 후 꽃길   제96화

    권나율은 수납장에서 삼 분의 일쯤 조립된 블록과 남은 부품, 조립 설명서를 꺼냈다.“엄마, 이거예요. 꼭 끝까지 다 만들어 주셔야 해요.”정채윤이 블록을 받아 들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권나율은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안녕히 주무세요!”정채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방을 나왔다.그때, 곧바로 등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아무래도 권나율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약도 발라 주고 며칠 동안 곁에 있어 주겠다더니,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채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하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오래갈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정채윤은 시선을 거두고 블록을 든 채 안방으로 향했다.그러다 난간 옆을 지나며 무심코 아래층을 내려다봤다.조금 전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권예준이 보이지 않았다.정채윤의 걸음이 멈췄다.‘설마 벌써 나간 건가?’오늘은 반드시 이혼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 이대로 권예준이 집을 나가 버리면 또 다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마침 권나율을 씻겨 주러 위층으로 올라오는 장미정이 보이자, 정채윤은 대뜸 물었다.“아주머니,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장미정은 순간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멈칫했다.정채윤이 평소 권예준을 ‘나율이 아빠’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잠시 뒤에야 권예준을 묻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대답했다.“아, 권 대표님이요? 전화 받으러 가셨어요.”“그래요?”아직 집을 나간 건 아니란 소리였다.“알겠어요. 나율이 좀 씻겨 주세요.”정채윤은 더 묻지 않았다.“네, 사모님.”정채윤은 블록을 들고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장미정이 자리를 떠나자, 정채윤도 안방으로 돌아왔다.권예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권나율이 맡긴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블록은 어느덧 3분의 2가량 완성됐지만, 권예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정채윤은 시계를 확인하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손에 들고

  • 이혼 후 꽃길   제95화

    ‘안 그러면 엄마도 같이 가겠다고 할지 모르니까.’“그래.”권예준은 짧게 대답했다.정채윤은 두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십중팔구 안하린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정채윤은 책장에서 전공 서적 한 권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권예준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미뤄 두었던 이혼 문제를 꺼내기 위해서였다.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온 박여정은 세 식구가 어느새 다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너희도 참...”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이제는 슬슬 잠자리에 들 때였다. 박여정도 더는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는지 손을 내저었다.“됐다. 다들 올라가서 씻고 쉬어.”정채윤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할머니도 일찍 주무세요.”“그래.”권나율도 얌전히 인사를 건넸다.“증조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얼른 방으로 올라가 안하린이 준 선물을 풀어 보고 싶었다.‘하린 이모랑 영상 통화는 오늘 안 해도 되겠지. 시간도 늦었고, 이모는 매일 바쁘니까 푹 쉬어야 해.’계단을 오르려던 권나율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채윤을 돌아봤다.“엄마, 팔 다치셨으니까, 오늘은 아주머니한테 씻겨 달라고 할게요. 엄마는 푹 쉬세요.”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엄마가 다쳐서 나 씻겨 줄 수 없으니까 내 방에도 안 들어오겠지? 그러면 하린 이모가 준 선물도 안 들킬 거야!’정채윤은 아이가 품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가방을 힐끗 바라봤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건 뻔히 보였지만, 굳이 캐묻거나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래. 씻고 일찍 자.”“네! 엄마도요!”권나율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그러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아, 맞다. 엄마!”“왜?”“지난번에 만들던 블록 있잖아요. 그거 조립하는 게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