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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운축
정채윤은 발코니에 도착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치자 그제야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채윤은 코를 훌쩍이고 몇 차례 기침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조금 정상으로 돌아오자 다시 휴대폰을 들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바쁜 모양인지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채윤아, 무슨 일이야? 아까 업무를 처리하느라 전화 온 줄도 몰랐어.”

정채윤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져서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나 아빠 모시고 동제시로 와서 치료받고 있어. 주치의 선생님이 그러는데, 가능하면 홍유건 선생님한테 진료를 한번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대. 그래서 말인데...”

남자는 단번에 정채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알겠어. 내가 이따가 한 번 연락해 볼게.”

“고마워, 선배.”

“고맙긴. 너희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으실 수 있다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남자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남진 그룹 쪽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랑 선생님이 나서줄까?”

선생님 얘기가 나오자 정채윤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채윤은 선생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남자는 정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리고 위로했다.

“괜한 걱정은 하지 마. 선생님 말이야. 그동안 겉으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널 신경 쓰고 계셔. 네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셔.”

“어제 네가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우리 몰래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선생님이 네가 맡기로 한 남진 그룹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다는 걸 아신다면 분명 너를 위해 기회를 되찾아 주려고 하실 거야.”

정채윤은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사실 그동안 건축사무소로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은 많았다. 하지만 가족이 걱정되는 바람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저 시간이 날 때마다 전문 서적을 들여다보거나 관련 자격증을 준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이혼을 앞두고 있으니 진심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채윤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대로 공부하며 실력을 쌓은 뒤 돌아가고 싶었다.

“남진 그룹 일은 이미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이틀 뒤면 해결될 거야. 그리고 일단 한동안 제대로 공부하면서 실력을 좀 더 쌓은 뒤에 복귀하고 싶어.”

남자는 깜짝 놀랐다.

“정말?”

“응.”

“와, 어떡하지? 나 좀 신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만나러 가고 싶어. 네가 진짜 복귀한다니, 믿기지 않아. 네가 2년만 일찍 복귀했다면 우리 건축사무소는 벌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을 거야.”

정채윤은 피식 웃었다.

“선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너는 네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선생님이 예전부터 너한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계셨는데...”

남자는 거기까지 말한 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듯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절대 자신감을 잃거나 좌절하지 마. 나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다 너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채윤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작게 대답했다.

“응.”

전화를 끊었다.

정채윤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생겼다. 정채윤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병실로 돌아가 부모님 곁을 지켰다.

그날 오후 내내 정채윤은 권예준과 안하린, 그리고 권나율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였다.

물론 권예준과 권나율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정채윤은 저녁을 사 먹기 위해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정채윤이 병실을 나가기 전, 서은영은 특별히 당부했다. 권나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사 오고, 권나율에게 전화해서 이곳으로 부르라고 말이다.

정채윤은 부모님이 권나율을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채윤은 결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십 분 뒤, 정채윤은 식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직원에게 주문을 하겠다고 말한 뒤 메뉴판을 넘겼다.

“갈비찜 하나, 찐만두 하나...”

그때 갑자기 뒤쪽의 유리문이 다시 열렸다.

“예준아, 우리는 병원 식당에서 간단하게 먹어도 돼. 굳이 큰돈 들여 사 먹을 필요는 없어.”

“외증조할머니, 외증조할머니는 지금 몸이 편찮으시니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드셔야 해요!”

권나율의 목소리였다.

정채윤은 멈칫하며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정채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권나율은 친근하게 한 손으로 안하린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박금옥의 손을 잡은 채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명화는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권예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귀찮은 기색은 전혀 없었고 표정도 부드러웠다.

박금옥은 권나율의 말을 듣고 병색이 짙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율이는 참 착하네.”

권나율은 생글생글 웃었다.

권예준이 말했다.

“할머니는 몸이 안 좋으시니까 앞으로는 여기 직원들에게 매일 식사를 보내 달라고 할게요.”

자신의 외할머니를 세심하게 챙기는 권예준의 모습을 본 안하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박금옥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고마워, 예준아. 신경 많이 써줘서.”

그때 매니저가 소식을 듣고 위층에서 내려와 그들을 VIP 룸으로 안내했다.

“대표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난번에 드셨던 메뉴로 준비해 드릴까요?”

권나율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지난번에 아빠가 저랑 하린 이모를 데리고 여기 와서 먹었던 음식은 이제 다 질렸어요. 오늘은 다른 걸로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들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정채윤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 세 식구가 함께 식사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권예준은 늘 바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과는 함께 식사할 시간조차 없다던 사람이, 권나율을 데리고 다른 여자와 밥을 먹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동안 권예준과 권나율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계속 요리 실력을 갈고닦으며 매번 다른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성껏 도시락을 싸서 챙겨가게 했다. 물론 그들이 그걸 다 먹기는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원은 정채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더 주문하시겠어요? 아니면 아까 말씀하신 것만 준비해 드릴까요?”

정채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룸 안으로 들어간 걸 본 뒤 시선을 내려뜨려 주문서를 확인했다.

전부 권나율이 좋아하는 음식들만 적혀 있었다.

“이건 전부 빼주세요.”

정채윤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권나율이 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권나율은 두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채윤이 권나율에게 전화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나러 병원에 오라고 한다면, 권나율은 분명 온갖 핑계를 대며 싫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 음식들을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직원은 잠시 당황했다.

“아, 네.”

정채윤은 다시 담백한 음식 몇 가지와 찌개를 주문해 포장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던 순간, 마침 직원이 VIP 룸으로 음식을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트레이 위에는 해산물 요리가 몇 접시 놓여 있었다. 정채윤은 자기도 모르게 권나율을 떠올렸다. 권나율은 몸이 약하고 위장도 좋지 않아서 해산물을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자마자 정채윤은 곧바로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권예준과 안하린이 곁에 있는데 권나율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정채윤은 병원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권나율은 이미 밥을 먹었고 집에서 숙제하고 있어서 오지 못한다고 거짓말했다.

서은영과 정태환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가 더 중요하지.”

정채윤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뒤 정채윤은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때 옆에 내려놓은 휴대폰이 갑자기 몇 차례 진동했다.

권나율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엄마, 어디예요? 동제시로 돌아왔어요?]

[엄마...]

[...]

정채윤은 무심하게 문자를 힐끗 바라본 뒤 답장하지 않고 계속해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리고 정리를 모두 마친 뒤에야 휴대폰을 들어 답장하려 했다.

그래도 권나율은 정채윤의 친딸이었기에, 적어도 권나율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완전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정채윤은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를 받은 권나율은 서러운 듯 작게 칭얼거리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오랫동안 권나율을 돌봐 온 그녀였기에 아이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권나율이 운 것 같자 정채윤은 걱정이 되어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참 동안 받지 않았다.

결국 정채윤은 하는 수 없이 장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나율과 달리 장미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마침 아래층에서 권나율을 위해 물을 따라주고 있던 참이었다.

“여보세요, 사모님.”

“나율이 괜찮은 거예요?”

“아가씨는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뭔가 잘못 먹은 것 같아요. 지금 아파하면서 울고 있어요. 아까 유 선생님께 전화해서 유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약을 처방해 주고 가셨어요. 저는 지금 아래층에서 아가씨가 드실 물을 따르고 있는 중이에요.”

‘배가 아프다고?’

정채윤은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권나율을 잘 돌봐 달라고 장미정에게 부탁했다.

전화를 끊은 뒤 정채윤은 서은영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정채윤은 잠시 후 권예준이 집에 돌아온다면, 그때 이혼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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