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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강노을
“넌 정말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야.”

제헌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눈은 분명히 유리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진심 어린 감탄, 그런 눈빛이었다.

‘이 반응쯤은 당연하지.’

유리는 속으로 말했다.

KU그룹은 최근 한빈 교수의 연구팀과 협업 중이다.

그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KU그룹에도 막대한 기술적 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유리는 이번 귀국을 단순한 제헌과의 재회가 아니라, 그 기술적 돌파구를 해결할 ‘핵심 인물’이 되기 위해서 준비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는 바보처럼 굴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밥 좀 잘하고, 애교 몇 마디 던져서 남자 마음을 얻는 시대는 끝났다.

능력 있는 여자가, 더 많은 기회를 갖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유리는, ‘능력으로 인정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

이람은 오전 내내 바쁜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점심 전, 잠시 커피 생각이 나 탕비실에 들렀다.

동료에게 줄 커피까지 챙기며 바삐 움직이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장수란.

KU그룹 대표이사 비서실 비서.

이람과 수란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예전에 이람이 제헌의 동선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것이 전부였다.

요즘 이람은 제헌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란은 그때도 다정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잠깐... 일단 받아보자.’

망설이다가 통화를 받았다.

[사모님... 요즘 괜찮으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

작고,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이람은 수란이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안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수란의 다음 말은 예상 밖이었다.

[강 대표님이... 방금 여자분 한 분이랑 회사에 오셨어요. 정말... 분위기 장난 아니었고요. 임원들도 전부, 그분을 미래 사모님으로 보는 분위기예요...]

[사모님은 혹시 알고 계셨을까 해서요. 그래서 조심스럽게라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 여자분, 이름이 하...]

툭-

말이 끊겼다.

그 다음 들려온 건, 놀란 듯한 수란의 숨소리.

[허... 허 비서님... 저, 저 그게 아니고요...]

수란은 사무실 복도 한쪽 모서리에 몸을 숨긴 채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기성이 그 바로 뒤에서 걸어 나오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

KU그룹.

기성은 수란의 핸드폰을 툭 하고 낚아챘다.

화면을 힐끗 내려다본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미간을 좁혔다.

“사모님 또 대표님 동선 캐내려고 연락하신 겁니까?”

수란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기성 뒤로 보이는 두 사람, 강제헌 대표와 그 옆의 여자, 하유리.

그 장면을 보는 수란의 몸이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저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볼 뿐.

기성은 수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공적인 보고 톤으로, 대표에게 곧장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입니다. 또 대표님 일정 파악하려고 연락하신 듯합니다.”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기성은 전혀 당황하지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들으라면 들으라는 거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

SY그룹.

스마트폰을 쥔 이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 사이가 천천히 좁아졌다.

‘또 이런 식으로 몰아가네.’

기성이 무슨 말을 하든, 이람은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와서 해명해봤자, 믿지 않을 사람이니까.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제헌의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신경 쓰지 마.]

익숙한 말투.

익숙한 무심함.

‘늘 그렇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어.’

이람은 그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단지... 제헌이 사실을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단정지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가슴 어딘가를 저리게 만들었다.

과거의 이람이라면, 이 상황에 당장 전화를 걸어 해명했을 것이다.

오해가 무서웠고, 무엇보다... 제헌의 분노가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혼했잖아.’

이람이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고, 제헌의 감정선에 맞춰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유리 얘기를 캐려고 연락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

더 냉정했고, 더 예리하게 가슴을 찔렀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이람은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 강제헌이... 수란 씨를 정말 해고하려는 거야?’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이람이 처음 수란에게 연락했을 때도, 제헌은 그녀를 비서실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그땐 겨우 막았는데...’

이번엔... 막을 사람도, 이해해줄 사람도 없었다.

예전에 수란이 KU그룹에 남을 수 있었던 건, 이람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제헌은 그때 분명하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

그리고 그는, 말 그대로 ‘다시 봐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람의 사람 하나쯤 남겨둘 자리는 없었다.

[비서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잖아.]

그 목소리의 주인은 유리였다.

이름처럼 말투도 부드럽고 온화하다.

이람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런 목소리,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네...’

유리는 살짝 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따 밥 내가 살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 내 부탁이야, 응?]

잠시의 침묵 후.

[그래.]

제헌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아까의 차디찬 말투와는 확실히 달랐다.

말의 온도부터 완전히 달랐다.

유리는 작게 웃었다.

[그럼, 가자.]

그 뒤로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전화기 너머의 고요.

이람은 말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웃기다. 내가 저 사람 비위 맞출 땐 며칠씩 마음 졸여야 겨우 한 번 웃어줬는데...’

이람은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

제헌이 마음 풀지 않으면 밥도 잘 넘기지 못하고, 밤마다 뒤척이다 결국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던 날들.

일에 집중도 못 하고, 온통 제헌의 기분에 좌우됐던 나날들.

‘근데... 사랑하는 여자 말 한 마디면 끝이네. 그렇게 쉬운 사람이었어.’

...

기성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람이 전부 들었단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기성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번 일로 수란이 해고되면, 이람은 분명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서 수란의 해고는 수란 본인에게 가해지는 처벌이자, 이람을 향한 ‘경고’였다.

기성의 생각은 단순했다.

‘이 정도 이야기 들었으면, 다음부턴 뒤에서 몰래 움직이는 일 없겠지.’

‘애초에 문제는 사모님이 자꾸 대표님 동선을 파악하려는 데 있었잖아.’

‘아무리 부부라도, 뭘 하든 옆에서 그걸 전부 감시하려 든다면...’

‘숨 쉬는 것조차 답답하지.’

기성은 손짓으로 비서실 실장 주미를 불렀다. 조용히 다가온 주미에게 그는 짧게 말했다.

“수란 씨 건, 오늘 중으로 정리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새요.”

건조하게 한 마디 던지고, 기성은 자리를 떠났다.

수요일은 하유리의 생일.

제헌의 지시에 따라, 기성은 레스토랑 전체 대관을 준비 중이었다.

레스토랑 사장과 미팅까지 잡고, 유리를 위한 깜짝 생일 이벤트까지 조율하느라 바빴다.

기성은 수란의 해고 같은 ‘작은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무심코 건넨 핸드폰을 주미가 받았다.

그녀는 수란에게 돌려주려는 순간,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눈썹이 찌푸려졌다.

‘조이람 씨?’

주미는 몇 초간 멍하니 생각하다가 금세 인상을 찌푸리며 비꼬듯 말했다.

“수란 씨, 진짜 멍청한 행동을 했어요. 조이람은 그냥 강 대표님 도시락 배달하는 가사도우미일 뿐이잖아요. 그런 사람 때문에 대표님 눈 밖에 나는 게 말이 돼요?”

수란은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아, 얼어붙은 시선으로 주미를 바라보다, 뒤에 서 있는 제헌과 유리의 그림자가 스쳐간 순간, 생각회로가 정지되었다.

그제야 겨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그분, 가사도우미 아니에요. 강 대표님의... 아내세요.”

“수란 씨, 진짜 눈이 있긴 해요? 강 대표님이랑 하유리 씨, 커플링 낀 거 못 봤어요? 하유리 씨가 진짜, 공식적인 강씨 가문의 미래 작은 사모님이에요. 그건 아무도 못 부정해요.”

“그게 아니고...”

“됐어요. 얼른 인수인계나 해요.”

수란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기계적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화면 아래, ‘통화 중’ 이라는 표시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아직 끊기지 않았다고?’

순간,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 사모님! 괘, 괜찮으세요? 방금 들은 건... 못 들으셨죠...? 제발...”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실장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사모님이 무슨 가사도우미예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족해서...”

이람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차피 숨길 수도 없지.’

제헌은 외부에 결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람에게도 회사 출입을 금지했다.

그래서 도시락을 들고 갈 때마다, 항상 비서를 통해 전달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 눈에 이람은 ‘가사도우미’로 비쳤다.

그 오해가 굳이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근데... 커플링까지 낄 줄은 몰랐네.’

제헌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하얗고 길며, 관절이 오묘하게 잘 드러난 그 손.

결혼반지를 낀 손가락은 어딘가 기품 있고, 섬세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그 손을 몰래 바라보는 게 이람의 작은 버릇이었다.

하지만 결혼한 내내 제헌이는 그 손가락에 반지를 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람은 줄곧... 그가 액세서리의 불편함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다.

이제야 알았다.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결혼반지’를 끼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미안해요, 수란 씨. 이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어요.]

수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은 이람과 통화한 건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짧은 연결 속에서도 이람이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지금 더 미안했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저 원래 부모님 가게 도와드리려고 생각 중이었어요. 사실 사표도 이미 반쯤 써놨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람을 위로하려는 의도였다.

그 진심이 느껴졌고, 그 덕에 이람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잠시 뒤, 수란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고 조심스러워졌다.

“근데 왜요? 사모님이 대표님의 진짜 아내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강 대표님은...”

이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란은 계속 말했다.

“대표님은 사모님이 사무실에 오는 것도 허락 안 하시면서, 하유리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고, 사람들 앞에서 반지까지 맞춰 끼고...”

“차라리 ‘집안 친척이다’라고만 설명했어도, 누가 의심했겠어요. 사모님이 매일 아침 손수 도시락 싸서 점심시간에 맞춰 와도 대표님은 늘 문 앞에서 돌려보냈잖아요. 그건 너무... 지나쳐요.”

이람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너무했던 건... 이제 와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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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준의 시선은 이미 오래전에 이람에게서 떨어져 있었다.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 푸짐하게 쌓인 음식들을 가리켰다.“식사하죠.”재원이 눈치를 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이람 씨도 같이 먹어요.”이람은 무심한 듯 앉아 있는 하준의 얼굴을 살폈다.표정도 없고, 말도 없다.‘뭘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네.’그래도 별말 없는 걸 보니, 아까 그 얘기는 일단 넘어간 것 같았다.이람은 테이블 위 음식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식사는 편히 하세요.”갑작스러운 말에 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벌써 가요? 약속 있어요?”이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재원이 하준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서 대표님? 이람 씨 가지 말고 밥 먹고 가라고 해.”그 말에 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람 씨는 하준이 말만 듣는단 말이지.’재원은 슬며시 웃었다.이람은 자리에 일어서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다들 편히 드세요. 오늘은 감사했습니다.”그에 맞춰 재원도 따라 일어났다.“아유, 뭐가 그렇게까지 감사해요. 솔직히 제가 나섰어도 강제은을 혼쭐낼 수 있었는데, 우리 하준이 더 적격이니까 양보한 거고요. 아무튼 밥은 먹고 가요.”이람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내일 뵐게요.”‘아, 내일 테니스 약속 있었지?’재원은 그제야 기억났고, 더는 붙잡지 않았다.“그러면 제가 바래다줄게요.”재원은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람 챙기는 데 익숙한 남자였다.“아니에요. 금방 택시 부르면 되니까요.”“이 밤에 택시 위험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남자들이 너무 다정한 것도 귀찮다니까...’이람이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는 순간, 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말도 없이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재원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어? 어디 가?”하준은 짧게 대답했다.“심심해서. 들어가려고.”‘뭐야, 방금 음식 시켜놓고 왜 갑자기 나가?’하준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자, 이람도 세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95화

    “이람 씨, 진짜예요. 저번에도 서 대표님이 겨우 한 판 이겼거든요? 근데 우리 셋이 그다음에 한 판씩 크게 이겨서 서 대표님이 힘들게 딴 거 전부 뺏겼어요. 결국엔 마이너스 됐죠.”재원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그 말투엔 약간의 놀림과, 은근한 통쾌함이 섞여 있었다.이람은 조용히 하준을 바라봤다.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말이 없다는 건... 진짜라는 뜻이었다.“계속하죠.”이람이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봐주는 거 없어요.”연훈이 단호하게 선언했다.세진도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우리 셋 다, 젠틀한 척 안 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재원은 옆에서 분위기를 띄웠다.하준이 드물게 이람에게 목표치를 줬다는 게 신기한 듯, 그 자체를 재미 삼아 즐기고 있었다.‘솔직히 이람 씨가 계속 지면 더 오래 놀 수 있잖아.’그게 재원의 솔직한 계산이었다.세 사람의 도발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람은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괜찮아요.”재원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어머, 어머! 서 대표님! 조 비서님이 저희한테 도전장 던졌는데요? 오늘은 우리 셋 중 누구한테 거시겠어요? 조 비서님? 아님 우리 셋?”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지 않았다.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그러자 이번엔 연훈이 살짝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이람 씨, 미안하지만... 난 안 져줄 거예요.”세진도 곧바로 분위기에 합류했다.“나도. 오늘만큼은 선 긋고 갑시다.”이람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 예전엔 오로지 익스트림 스포츠에서만 느끼던 그 짜릿한 긴장감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꼈다.‘승부욕이 생기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그게 나한테 제일 좋은 상태야.’그 순간, 이람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만 있었다.‘이겨야 해.’그 감정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좋았다.마치 현실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듯한 집중.이람은 카드를 섞는 세진의 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덤벼요.”하지만 첫판이 끝난 뒤, 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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