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준이 꽃을 받으려 손을 내밀자, 연미혜는 마지못해 안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정범규나 하승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가 노현숙에게 물었다.“할머니, 지금은 좀 어떠세요?”“아직 조금 아프긴 한데... 견딜 만해.”막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해 보였지만, 노현숙은 기어코 손을 내밀어 연미혜의 손을 어루만졌다.“하루 종일 일하고 왔을 텐데, 피곤하지? 밥은 먹었니? 이따 민준이랑 같이 밥 먹고 가.”연미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괜찮아요, 할머니. 회사에서 먹고 오는 길이에요.”연미
경다솜이 냉큼 달려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와, 먹을 게 엄청 많아요! 밀크티도 있어요!”“다솜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경민준이 담담히 말했다.“다솜이가 온다기에 좀 준비해 뒀어.”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연미혜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제야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연유라와 연이찬 쪽으로 옮겨졌다. 그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여기 앉아.”경민준 특유의 센 기운에 연유라와 연이찬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두 아이는 노현숙에게 인
연미혜는 경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외삼촌 말로는 경문그룹에서 누가 연락해 왔다고 해. 프로젝트 제안 받았대.”경민준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우리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할머니 병문안한 게 고마워서 보답하려는 그 마음도 이해해. 그런데 우린 민준 씨 때문에 간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 프로젝트는 사양할게.”만약 연씨 가문이 경문그룹 쪽 사업을 맡게 된다면, 임씨 가문이나 손씨 가문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또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를 일이었다.
한효진은 다급하게 말했다.“노현숙 어르신이 다친 이틀, 사흘 사이에 민준이가 연미혜는 물론이고, 연씨 가문에도 꽤 자주 연락했다더라? 어제는 민준이가 연씨 가문 어르신이랑 같이 식사까지 하는 걸 본 사람도 있었대. 미혜랑 혹시 다시 잘 돼가는 거 아니겠지?”임지유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처음부터 잘 된 적이 없는데, ‘다시’라니요...”겉으로는 차분했지만, ‘다시 잘 된다’는 표현 자체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한효진이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임지유는 어쩔 수 없이 덧붙였다.“민준 씨 할머니가 연씨 가문 어르
연미혜는 아이들과 점심을 먹은 뒤, 연미혜가 미리 예매해 둔 영화표로 영화를 봤다.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근처 백화점으로 발길을 옮겼다.연유라가 옷을 보러 들어가고, 연이찬이 혼자 피규어 판매장을 구경하러 갔을 때 연미혜는 벤치에 앉아 있는 경다솜에게 조용히 말했다.“이따가 엄마가 집으로 데려다줄게.”“데려다줘요? 집으로요?”경다솜은 연미혜의 옆에 붙어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저 집에 안 가요. 오늘 밤도 외증조할머니 댁에서 잘 거예요. 집엔 내일 밤에 가면 돼요.”연미혜는 물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유
경다솜이 떠난 후, 연미혜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노트북을 켜고 자기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약 한 시간쯤 지나, 배지호 변호사에게서 새로 작성된 이혼 협의서와 관련된 문서들이 도착했다.연미혜는 곧장 파일을 열어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추가로 명시된 세 채의 부동산이었고, 위치까지 상세히 기재돼 있었다.그 위치를 확인한 순간, 연미혜의 손길이 멈췄다. 그 부동산들 모두 연씨 가문 근처 단지 내의 공실들인 데다가 거리도 가깝고, 연씨 가문과도 인접해 있었다.사실, 경민준이 예전에 연씨 가문 앞집을 사줬을 때도
연미혜와 허미숙이 노현숙 곁에 머무른 지 대략 삼십 분쯤 되었을 무렵, 경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나갔다 올게.”그동안 경민준은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편이었다.그가 일어나자, 노현숙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갈 거면 얼른 가. 괜히 여기서 앉아 있어도 쓸모도 없으면서.”경민준은 대꾸 없이 병실을 나섰고, 그 뒤로도 삼십 분이 훌쩍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아까까진 정옥순이 과일이며 다과, 차까지 빠짐없이 챙기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허미숙이 들고 있던 찻잔 속 차가 다
연미혜와 허미숙은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막 차량에 타려는 순간, 임지유가 조수석 쪽 문을 열고 내려왔다.“아직 안 갔나 보네.”허미숙은 그녀를 흘긋 보고 시선을 다시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못 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계셨네...’연미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미숙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있었다.그 사이, 경민준은 자연스럽게 임지유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을 본 허미숙은 경민준이 30분 동안 병실을 비웠던 것을 떠올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아주 죽고 못 사는 견우직녀 납셨다!”연미혜는 대꾸하지 않고 조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