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군다나 그들 곁엔 경민준이 있다. 임지유에 대한 그의 애정과 신뢰를 생각하면, 두 사람의 결혼은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렇게만 된다면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은 또 한 단계 위로 올라갈 테고 연씨 가문은 그 뒤를 쫓기도 힘들어질 거야!’한효진은 혼자 히죽 웃더니, 연미혜 쪽을 곁눈질하며 비웃듯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가족들과 함께 임지후를 남학생 기숙사로 데려다주었다.연유라의 짐 정리를 끝내고 학교를 나선 연미혜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와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문을 열
연미혜가 시선을 멈춘 방향을 따라가던 김태훈도 곧 경민준과 임지유를 발견했다.김씨 가문과 경씨 가문은 예전부터 교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김태훈 역시 경씨 가문 본가에 가본 적이 없었고, 그 본가가 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경민준과 임지유를 본 그는 입꼬리를 비틀듯이 씰룩이며 말했다.“쟤네 둘은 왜 또 우리 눈앞에 나타난 거야? 여긴 또 왜 왔대?”연미혜는 시선을 거두며 덤덤히 말했다.“저기가 경씨 가문 본가로 들어가는 유일한 진입로예요.”연미혜가 무심히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김태훈은 순간 멈칫하더니
경민준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그래. 알겠어.]토요일 아침.연미혜는 차를 몰아 고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고씨 가문의 가족 대부분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저택에는 도우미 몇 명만 있을 뿐, 고창완 혼자 머무르고 있었다.연미혜가 도착하자, 고창완은 직접 현관까지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우리 미혜 왔구나?”“할아버지,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려요!”연미혜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그의 얼굴에 여전히 기운이 있어 보이자 마음이 놓였지만 문득 걱정이 앞섰다.“많이 야위셨어요.”고창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좀 빠지긴
고창완은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그는 경민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연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 미혜야, 할아버지가 밥 사줄게.”연미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네.”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창완은 경민준에게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미혜와 함께 자리를 떴다.경민준은 여전히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셨고, 두 사람을 따라 나가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연미혜와 고창완이 함께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임지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떡해...”경민준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괜찮아. 시
그날 오후, 연미혜가 회의 중이던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화면에는 ‘경다솜’의 이름이 떴다.연미혜는 화면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바로 끊었다.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그러자 경다솜도 더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연미혜는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몇 분 뒤, 이번엔 경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회의를 마친 그녀는 다시 전화를 켰다. 전원을 켜
연미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경민준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아마도 임지유에게서 온 전화였던 모양이었다.경민준은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마.”그가 전화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경다솜이 잠에서 깼다.경다솜은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 누운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아빠, 엄마...”그 순간 연미혜와 경민준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그래. 다솜아.”경다솜은 어지러운 듯,
도원시 과학기술협회 등 여러 기관이 공동 주최한 ‘과학기술 학술 포럼’은 이틀 전부터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번 포럼은 한 달간 이어졌다.총 200여 회에 달하는 교류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으며,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넥스 그룹 역시 이번 포럼에 초청받은 기업 중 하나였다.오늘 오후는 연미혜와 김태훈 모두 관심을 두고 있는 ‘첨단 소재’ 분야의 핵심 세션이 예정되어 있었다.연미혜는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김태훈, 그리고 넥스 그룹의 기술진 몇 명과 함께 포럼 현장으로 향했다.김태훈은 넥스 그
연미혜와 김태훈 주위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그런 가운데 하석진 자문위원과 정지원 교수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몇몇 참석자들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하석진은 손짓으로 막으며 웃었다.“쉿! 듣고 있자고요.”그들은 말없이 외곽에 서서 김태훈과 연미혜가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으로, 실력과 학식 모두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연미혜와 김태훈은 질문에 침착하게 답하면서도, 가끔은 몇몇 참석자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이들의 말에 완
‘교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애초에 김태훈과 임지유 사이엔 교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김태훈 입장에선 굳이 마우재 교수와 얼굴을 붉힐 이유도 없었다.‘어차피 서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하니...’“앞으로는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그저 적당히 웃어넘기며 대답한 김태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마우재 교수는 국내 AI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인물이었다.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역시, 임지유가 캐벳 스미스 교수의 박사과정 제자라는 이유로 김태훈이 그녀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현승이 반응할 틈도 없이 연미혜의 통신기에 알림이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짧게 ‘데이터센터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연미혜는 예정대로 기술 센터를 떠났다.다음 날 하루는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이어지는 그다음 날은 넥스 그룹으로 복귀했다.넥스 그룹과 경문 그룹의 협업은 이제 공식적으로 시작된 상태였다.마침 그녀가 복귀한 날, 김태훈은 경문 그룹과의 협의 미팅에 참석할 예정이었다.이전처럼 단순한 계약 조율이라면 김태훈이
연미혜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현승을 향해 말했다.“죄송해요. 오늘은 같이 식사 못 할 것 같네요...”지현승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괜찮아요. 다음에 함께해요.”연미혜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고, 지현승은 그녀가 유명욱과 함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홀로 식당으로 향했다.그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연미혜를 본 지 이틀 뒤부터, 마침내 정식 휴가가 시작됐다.하지만 휴가가 시작되기 전인 이틀 동안 그는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집에 돌아와 보니, 가족들도 모두 각자 바쁜 듯 아무도
일요일은 어버이날이었지만, 경다솜은 하루 먼저 토요일에 연씨 가문을 찾았다.경민준의 운전기사가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경다솜이 준비한 어버이날 선물은 손수 만든 카드 한 장이었다.카드에는 ‘어버이날 축하해요’라는 여섯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예쁘죠? 선생님이 아빠랑 같이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는데요. 아빠가 요즘 너무 바쁘셔서... 도안이나 그림을 그린 것부터, 하트 붙이는 것까지 전부 제가 혼자 했어요.”연미혜는 경다솜이 과제를 하는 모습을 본 지 꽤 되었는데, 그새 글씨가 부쩍 또렷하고 단정해졌다는 걸 느꼈다.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