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야채수프도 끓이고 계란후라이도 준비했다.그리고서 도우미 아줌마와 함께 음식을 식탁으로 옮겼다.여이현도 2층에서 내려왔다.“얼른 와서 아침 먹어요.”이때 마침 햇살이 온지유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여이현은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에 잠깐이나마 행복했다.하지만 이것도 잠시, 아침 식사 이후 예약하러 동사무소로 가야 했다.여이현은 별로 아침 생각이 없었지만 안 먹을 수가 없었다.온지유의 음식솜씨가 워낙 좋아 맛이 괜찮았다.아침 식사 후, 이 둘은 함께 밖으로 향했다.여이현은 직접 운전하기로 했다. 온지유는 처음 혼인 신고했던 그날처럼 조수석에 앉았다.그날은 오늘처럼 날씨가 좋지 않았다.동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결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혼하려면 줄 서야 했다.반 시간 뒤, 그제야 이들의 순서가 돌아왔다.직원은 날짜를 확인하고, 혼인신고서를 보더니 중재에 나섰다.“이제 결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이혼하려고 하는 거죠? 혹시 외도 사실이 있었나요?”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여이현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직원이 먼저 물었다.“아이는 있나요? 재산은요? 어떻게 합의하신 거예요?”온지유가 말했다.“외도는 없었고요. 아이도, 재산도 없어요. 그저 단순히 감정이 식어서 이혼하려고 합니다. 이혼숙려기간은 언제쯤이면 끝날까요?”“두 달 뒤요.”온지유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왜 두 달이죠? 이혼숙려기간은 한 달이 아닌가요?”두 달 뒤면 배가 많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때 가서 배불뚝이인 상태에서 여이현은 절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었다.직원이 힐끔 보더니 말했다.“지금 예약이 꽉 차있는 관계로 제일 빨라야 두 달 뒤입니다. 이혼 분쟁도 없는데 법원까지 가봤자 해결해 주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이혼 안 하는 거 어떠세요?”‘법원까지 가봤자 해결해 주지 않을 거라고?’온지유는 머리가 어지러웠다.‘이혼하기 이렇게도 어려워?’온지유는 짜증이
온지유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네. 기뻐요.”일부러 반대로 말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괜찮은 방법이라 하면 변호사를 찾는 거?”온지유는 부정하지도 않고 잠깐의 침묵 끝에 말했다.“대표님, 이제 각자 갈 길 가시죠.”온지유는 변호사 찾으러 가야 했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순순히 보낼 수는 없었다.“회사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그래요.”온지유는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회사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채현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저는 온 비서님이 안 오는 줄 알았어요.”뒤돌아보니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이채현이었다.여이현의 마음에 든 이채현을 직접 뽑은 것도 인수인계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정작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왠지 모르게 빨리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온지유가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아니에요.”이채현은 온지유한테 찰싹 붙으면서 말했다.“온 비서님, 언제 그만두는데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온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채현 씨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요?”이채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분명 여이현이 대표님 사무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물어봤는데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갈 줄 몰랐다.이채현은 여이현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하지만 또 설명을 안 할 수 없었다.“대표님, 별다른 뜻이 없었어요.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오늘부로 해고에요.”이채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저 온지유한테서 인수·인계받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여이현의 심기를 건드릴 줄 몰랐다.이채현은 온지유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온지유는 침묵을 지켰다.여이현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
여이현은 고개도 쳐들지 않았다.“호텔에 가서 금강 그룹 책임자를 픽업해. 점심 식사 장소랑 저녁 식사 장소도 알아보고.”“네.”여이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호텔 주소를 받고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문을 열려던 순간, 누군가 팔목을 덥석 잡아 깜짝 놀랐다.뒤이어 이채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 비서님은 저를 직접 뽑아주신 분이시잖아요. 제가 어떤 성격인지 모르세요?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물어본 거잖아요. 정말 진심으로 배우고 싶었다고요. 대표님한테 다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이채현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주차장에서 기다리면서 온지유든, 배진호든, 여이현이든, 아무나 지나가는 대로 비굴하게 사정해 보기로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동정심 따윈 없었다.“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대표님께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겠어요?”온지유는 이채현 하나 때문에 여이현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마음 약한 사람이라고 놀림당하고 싶지도 않았다.여이현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아, 노승아라면 다를 수도 있었다.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던 이채현은 온지유의 말을 듣고 그제야 포기하기로 했다.“제가 그런 질문하는 게 뭐가 잘못됐어요? 제가 입사한 날부터 저한테 정확히 말씀해 주셨잖아요. 인수·인계받으려면 언제 그만두시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온 비서님이 적어주신 노트로는 모르겠어서 그래요. 온 비서님, 설마 제가 자리를 뺏었다고 갑자기 그만두기 싫어진 건 아니죠?”“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온지유는 이채현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인제 와서 보니...이채현이 이렇게 본모습을 드러낼 줄 몰랐다.온지유는 더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이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대표님이에요. 대표님께서 누구를 남기고 싶으면 남기는 것이고, 누구를 쫓아내고 싶으면 쫓아내는 거예요.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욱 괜찮은 사람으로
강하임은 바로 등을 돌렸다.온지유는 이쪽 상황을 사실대로 여이현에게 알렸다.“저희 쪽에서 자꾸 책임자를 바꿔서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라는데요?”온지유는 중점만 말했다.만약 여이현이 이번 비즈니스를 잡고 싶다면 직접 와야 했고 별로 잡고 싶지 않다면 모른 척하면 되었다.온지유는 이 틈을 타 변호사를 알아보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여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할 줄 몰랐다.“그냥 돌아와.”엄숙한 말투를 봐서는 전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네.”온지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여이현은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온지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다른 거 해야 할 거 있을까요?”여이현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바람에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하지만 말은 또박또박 잘 들렸다.“왜 상대방이 보자마자 그런 요구를 한 건데?”의심하는 말투에 온지유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의심된다면 직접 상대방에게 물어보시든가요.”온지유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 속상했다.그래도 몇 년 동안 함께한 정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여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담배만 피울 뿐이다.온지유는 계속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담배 연기는 산모한테도, 태아한테도 해로웠다.“대표님,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온지유가 뒤돌아 나가려고 하자 여이현이 말했다.“새로 뽑는 비서 내 마음에 들어야 해.”“네.”온지유는 이 말에 동의했다.하지만 이력서를 아무리 보여줘도 여이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온지유가 질문했다.“제가 비즈니스를 망쳤다고 생각하시면 대표님은요?”전에 여이현은 그만두겠으면 괜찮은 사람을 뽑아놓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어렵게 이채현을 들였더니 꺼지라고 할 줄이야.이력서를 아무리 보여줘봤자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러 가지 못하게 핑계를 대는 줄 알았다.이력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전부 명문대 출신이어도 말이다.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전부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물었다.“여사님, 동사무소에 가서 이미 예약하셨으면 기다리시면 되잖아요. 상대 배우자가 이혼할 의향이 없으시면 절차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온지유가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은데 얼마를 드리면 가능할까요?”2개월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온지유는 마음이 급했다.변호사가 온지유의 반응을 보더니 말했다.“한쪽만 급해하시는 걸 보니 상대방은 이혼을 원하지 않는가 봐요. 아니면 외도라도 하셨나요?”온지유가 부정했다.“저는 외도한 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계약 결혼이었고 상대방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지로 결혼 사실을 숨기는 것도 힘들고 아무런 감정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도 지겹네요. 아이도 없고 재산분할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최대한 빨리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말에 변호사는 그제야 관심을 가졌다.재벌가만이 이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쩌면 큰돈을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먼저 저희 비서님이랑 이혼 소송서류를 작성하도록 할게요.”“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몇 분도 안 지나 온지유는 이혼 소송서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나 변호사님.”비서님한테서 변호사 성씨가 나 씨라는 것을 들었다.나 변호사는 이혼소송 서류에 적혀 있는 피고인 여이현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아무리 봐도 상대는 여이현이 맞았다. 온지유가 말했던 결혼 계약서도 그가 직접 여이현에게 작성해 준 것이다.그가 말이 없자 온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이혼소송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아니요. 일단 돌아가 주시면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 나 변호사님.”온지유가 떠나고, 나도현은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했다.여이현이 전화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때, 전화기 너머에서 여이현의 차
온지유는 인사팀으로 찾아가 이력서를 확인했다.괜찮은 사람들로 여이현에게 보여줬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이 많고 많은 후보 중에 여이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결국 일부러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거라고, 보내주기 싫은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온지유는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한 시간만 더 있다가 퇴근하기로 했다.만약 여이현이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무더운 날씨에 밖에 나가서 음료수를 사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어지러운 느낌에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결국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온지유.”이때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았을 때, 그레이색 정장을 입은 나민우가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나민우는 다시 허리를 세워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민우야.”나민우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나야.”“웬일이야?”요즘 따라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현지 시찰하러 왔다가 주차하면서 마침 너를 봤어.”온지유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블랙 벤틀리 차량을 발견했다.“너는 왜 여기 혼자 있어?”온지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나민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이력서를 확인하다가 음료수 사러 나왔지.”“이력서?”나민우는 이해가 안 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직접 이력서를 보고 사람을 뽑아야 해?”나민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온지유의 옆에 앉았다.온지유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인수인계할 사람을 찾아야지.”“퇴사하려고?”나민우는 굳이 묻지 않아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도 별로 숨길 생각이 없었다.“응.”분위기는 다시 고요해지기 시작했다.나민우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멈칫하더니 물었다.“안색이 안 좋네. 여 대표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갑작스러운 질문에 온지유는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비밀로 결혼한 사실을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민우한테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랑 이현 씨가 단순히 직장
온지유가 그의 말에 찬성했다.“맞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야. 믿어 의심치 않아.”나민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온지유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나민우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정말 헤어지기로 결심한 건가?’그해, 온지유가 걱정되어 찾아간 적이 있었다.그때는 온지유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나무 뒤에서 몰래 지켜보았다.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 온지유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이현을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까지만 해도 여이현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잘생기고 공부까지 잘해서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하지만 나민우는 그때 뚱뚱해서 온지유의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그렇게 그는 오랫동안 좋아한 온지유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저 그녀가 행복했으면 했다.“온지유, 날 봐봐.”나민우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온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나민우는 이런 반응에 그만 뻘쭘해졌다.“왜, 안 웃겨?”온지유는 평소에 진지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 몰랐다.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것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표정이 더욱 웃겼다.온지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나민우가 말했다.“난 네가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너의 기분을 풀어줄수 있을지 몰라서...”온지유는 늘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 주는 나민우의 모습에 감동하고 말았다.이렇게 정서가 안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은 온지유의 남자친구로서 딱이었다.그런데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그녀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었다.“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온지유가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웃었으면 됐어.”그런데 마침 여이현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온지유와 나민우는 마치 풋풋한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여이현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변호사 찾으러 간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여이현은 고개 들어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고는 자료를 건네받았다.의외로 자세히 자료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온지유가 긴장한 마음으로 말했다.“다 괜찮으신 분입니다. 이 중에서 뽑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그중에 괜찮은 이력서를 한쪽에 내려놓더니 말했다.“이 사람 내일 면접 보러 오라고 해.”의외로 명쾌한 대답에 온지유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네. 지금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여이현이 또 말했다.“별일 없으면 이만 가봐.”온지유는 차가운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가라고 했으니 나갈 수밖에 없었다.이때 배진호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대표님, 성동 공사 현장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배진호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긴박한 상황에 온지유도 뒤따라 나서려고 했다.그런데 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온지유를 힐끔 보더니 진예림에게 말했다.“진 비서도 함께 가시죠. 온 비서는 안 가셔도 됩니다.”온지유는 물론 진예림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이현의 눈빛과 마주친 진예림은 그에게 잘 보일 기회가 생겨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대표님.”진예림은 여이현과 배진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온지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성동 공사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다며. 사실이라면 대표님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몰라!”온지유는 어두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뉴스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모든 화살은 여이현을 향해 있었다.온지유는 바로 뛰쳐나갔다.--성동 공사 현장 사망 인원은 한 명이 아닌 세 명이었다.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경찰은 물론 각 매체도 출동했다.여이현이 공사 현장에 도착한 순간, 기자들이 밀려와 인터뷰를 시도했다.“여 대표님, 이번 사건은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여 대표님, 세 명이나 사망했는데 부실 공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자들, 공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