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눈을 떴을 땐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손가락을 움직이자 누군가 자신의 손을 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제대로 편히 자지 못한 것 같았다.항상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엔 수염도 났다.그의 모습을 훑어보던 온지유는 멈칫했다.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들어왔다. 배진호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왔다.“사모님, 깨셨어요.”배진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배진호는 잠든 여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병원에 오신 뒤로 내내 곁을 지키고 계셨어요. 잠깐이라도 근처 호텔에서 편하게 주무시라니까 꼭 사모님의 곁에 계시겠다며 고집을 부리시더군요.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드셨어요.”온지유는 입을 벙긋거렸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힘겹게 말을 꺼냈다.“아이는...”배진호가 답했다.“무사해요. 하마터면 유산할 뻔했다고 했어요. 다행히 아이도 무사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사모님과 대표님의 사이는 돌일 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을 거예요. 사모님이 수술실로 들어간 순간부터 대표님께선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과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요. 대표님께선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사모님이 대표님을 원망하고 미워할까 봐 엄청 마음 졸이고 계셨거든요.”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배진호는 사온 물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전 사모님께 거짓말을 한 적 없어요.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대표님께선 사모님을 엄청 걱정하고 계셨어요. 설령 그 아이가 대표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대표님껜 그 아이를 없애는 방법은 아주 많거든요. 사모님만 원하지 않는다면 대표님께선 강요할 생각도 없으셨어요. 대표님은 자신의 행동으로 나중에 영원히 사모님과 다시 잘
“이현 씨...”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여희영이 다급하게 들어오며 온지유를 보더니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세상에, 지유야. 임신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니? 이제야 알게 되었잖니. 만약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여행 가지 않았을 거야. 설마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알게 된 건 아니지?”여희영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머리엔 스카프를 쓰고 있었고 선글라스도 끼고 있는 것을 보아 금방 돌아온 것 같았다.그녀의 피부는 전보다 까맸다. 여행하면서 탄 것이 분명했다.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여희영의 등장에 그녀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얼른 일어나 앉아 여희영을 불렀다.“고모님!”여희영을 본 온지유는 아주 기뻐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여희영은 손에 든 물건과 캐리어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여이현을 밀어내고 온지유와 포옹했다.“아이고, 우리 지유, 고생했어. 우리 집안 핏줄을 품고 있느라 많이 힘들었겠네.”온지유도 그녀를 안았다. 너무 반가워서 그런지 아니면 최근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그녀는 훌쩍이며 말했다.“왜 귀국하셨으면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동안 고모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여희영이 말했다.“서프라이즈로 짠 나타나려고 했지. 그리고 이현이가 널 괴롭히고 있으면 현장을 잡으려고 했어.”여이현은 여희영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여씨 가문에서 온지유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여희영이었다. 여희영은 고리타분한 집안사람들과 달랐고 젊은 사람과 잘 어울려 지냈을 뿐 아니라 온지유를 아주 예뻐했다.여희영은 온지유를 진짜 가족으로 대했다.“전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었어요.”온지유는 그간 여이현과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으니까.“안 믿어.”여희영은 선글라스를 벗고 여이현을 보았다.“쟤가 널 괴롭힌 게 아니라면 네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임신도 했는데 널 괴롭혀? 내가 아주 따끔하게 혼내줄 거야!”온
음식 용기에 담아온 것도 있고 보온병에 담아 온 것도 있었다.여이현이 사온 음식은 5성급 호텔 주방장이 만든 것이었지만 여희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옆으로 밀어두며 자신이 포장해온 음식을 꺼냈다.“이건 농어탕이야. 임산부에게 아주 좋지. 그리고 이건 돼지 간으로 만든 죽이야. 돼지 간은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고 태아한테도 좋아. 또 이건 족발 찜이야...”그녀는 계속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내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넌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니까 임산부를 어떻게 잘 보살펴야 하는지,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배워둬. 내가 가져온 음식은 전부 임산부의 영양 보충에 좋은 것들이야. 절대 산도가 있거나 카페인 같은 걸 먹게 하지 마. 그런 것들은 유산의 위험성이 있으니까...”여희영이 끊임없이 말하자 여이현이 말했다.“지유는 내 아내니까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요.”“알긴 뭘 알아!”여희영은 전혀 믿지 않았다.“남편이라는 놈이 아내가 입원할 정도로 일하는데 말리지도 않고 말이야. 어딜 봐서 잘 챙겨준 거니? 지유는 임신했으니까 몸조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태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 모르니? 정말이지 하나도 모르면서 뻔뻔하게 말은 잘하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배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출근하면 안 되죠.”온지유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고모님, 얼른 앉으세요. 저 배고파요. 뭘 좀 먹고 싶어요.”“그래.”그녀의 말에 여희영은 바로 잔소리를 멈추고 자신이 포장해온 음식을 내밀며 온화하게 말했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온 뒤 얼굴에 웃음기가 생긴 그녀를 보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며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온지유는 죽을 먹었다.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곤 했지만, 여전히 메스꺼움은 사라지지
김예진은 여이현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대표님, 제가 드디어 찾았네요.”여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수심이 가득한 김예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김예진이 노승아의 매니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담배를 꺼버리곤 재떨이에 던졌다.“회사에 다른 직원이 없어요?”그가 기획사를 차리긴 했어도 따로 회사를 관리하는 경영자를 두었다.그러니 기획사의 일은 그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김예진이 말했다.“회사에 아무리 직원이 많다고 해도 승아 언니한테 필요한 사람은 대표님이세요. 대표님께선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여이현은 또 노승아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일은 없는 거예요?”김예진은 눈물을 닦았지만 계속 흘러냈다.“언니가 앓고 있던 병이 다시 재발했어요. 어제 검진 결과를 받고 알게 되셨는데, 귀가 안 들린다고 일정을 전부 취소했어요. 승아 언니 이대로 청력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앞으로 연기는 어떻게 해요? 가수 생활 겨우 포기하고 배우로 전향했는데 연기도 못하게 되면... 그럼 언니 인생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거잖아요. 언니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심각해졌다.“아무것도 안 들린다고 하던가요?”김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최고의 의사를 그녀에게 붙여 귀를 치료하게 했다.의사는 그녀가 치료만 잘하면 다시 예전처럼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예전에 이미 치료를 잘 받은 탓에 청력의 거의 회복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안 들릴 수 있겠는가.여이현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지금 어디에 있죠?”김예진은 서둘러 그를 노승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온지유의 병실은 9층이었지만 여이현은 11층에 왔다.병실 밖에서부터 그는 병실에 누워있는 노승아를 발견했다. 머리를 헝클어진 채 안색은 창백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다른 남자가 그녀의 모습을 봤어도 마음 아파했을 정도였다.여이현이 병실 입구에 서 있자 김예진이 말했다.
노승아의 눈에 힘이 풀리면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오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꼭 그렇게 차갑게 말을 해야겠어? 나 무서워, 난 지금 이미 귀가 안 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고!”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여이현은 그녀의 팔을 놓아주며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다.“네가 널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뭔데. 어떻게 귀가 안 들릴 수 있겠어. 네 직업을 사랑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나 보군. 넌 어떻게 하면 네가 더 잘 될 수 있나 연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네 건강이 나빠지는지만 연구하고 있었나 보네.”“연예계가 쉬운 줄 알았어? 누구나 다 네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줄 아느냐고.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데 나도 계속 널 그 자리에 앉혀둘 이유가 없지. 그 자리를 아끼면서 열심히 할 사람은 아주 많아!”여이현은 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들을 수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여하간에 평생 그녀에게만 신경 쓰며 살아갈 수 없지 않겠는가.노승아는 그가 키운 연예인이었다.그러니 그가 끌어내릴 수 있었다.말을 마친 여이현은 단호하게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노승아는 예전이었다면 당장이라도 가슴 아픈 얼굴로 달래야 할 그가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곤 마음 급해져 얼른 그를 안았다.“오빠, 가지 마!”한편, 온지유와 여희영이 11층에 있었다.여희영은 휴지를 들고 코를 닦으면서 말했다.“내가 나 혼자 와도 된다고 했잖아. 내 말도 안 듣고 결국 침대에서 내려오다니.”“괜찮아요. 의사가 적당히 움직여도 된다고 했어요. 그냥 조금 걷는 것뿐인데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온지유는 여희영의 팔에 팔짱을 꼈다.“고모님을 보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요.”그녀는 여희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전보다 더 여희영에게 찰싹 붙었다.“아, 비염은 언제 나으려나. 먼지가 코끝에 붙어도 코가 간지러워 못 살겠네. 그래서 내가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못 키우잖아. 에휴, 얼른 의사한테 진료받아야지.”여희
노승아의 고개가 돌아가고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졌다.여희영의 한방에 단단한 침대에 뼈가 부딪치는 소리마저 들려왔고 노승아는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떨어졌다.여이현은 원래 노승아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등장한 여희영이 먼저 노승아의 뺨을 갈궜다.그는 여희영을 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고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동시에 김예진이 달려오며 노승아를 부축했다.“뭐 하냐니, 안 보이니? 여우를 잡고 있잖아.”여희영이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노승아는 눈물을 흘렸다. 꼭 더는 혼자의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승아를 일으켰다.“승아는 지금 환자예요. 전 그냥 상태를 보러 온 거라고요.”“네가 뭔데 얘 상태를 확인하러 와?”여희영은 믿지 않았다.“얘는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야. 네가 얘를 불쌍하게 여겨 목적을 이루려고!”“전 승아 회사 대표예요. 설령 연기라고 해도 상사로서 상태 확인하러는 와야죠.”여이현은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희영의 행동은 다소 선을 넘은 것 같았다.“그걸 누가 믿어!”여희영이 말했다.“아픈 것도 시기가 있는 거니? 왜 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 하필이면 네가 병원에 있을 때 아픈 건데. 이 여자는 연기로 대상도 받았으니 네 앞에서 아픈 환자 연기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말을 마친 여희영은 팔짱을 끼면서 노승아를 내려다보았다.김예진은 노승아를 위해 나섰다.“대체 왜 언니한테 이러시는 건데요. 언니는 이미 충분히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다들 언니한테 이럴 수가 있으세요!”김예진의 눈에는 노승아가 힘들게 노력해 정상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보였다.예전에는 목을 다쳐 가수 생활을 포기하고 이젠 청력까지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제일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그런데 다른 사람이 노승아를 괴롭히는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김예진의 말에 여희영은 코웃음을 쳤다.“하, 불쌍하다고요? 대체 어디가 불쌍
몸싸움을 벌이는 세 사람을 보며 여이현은 얼른 여희영을 잡아당겼다. 그는 여희영이 충동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길 바랐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고모. 얼른 그 손 놓으세요!”여희영은 여이현의 팔을 뿌리쳤다.“안 놔, 못 놔! 내가 오늘 이 X 진상을 전부 까발릴 거야. 너희들도 똑똑히 봐야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여자니까 귀가 안 들린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야!”“아아아악!”노승아가 소리를 질렀다.“다들 제가 죽기를 바라네요. 그래요, 죽을게요. 지금 죽으면 되잖아요!”싸우고 있는 그들을 보며 노승아는 소리를 지르더니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노승아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오더니 바닥에 쓰러졌다.온지유의 눈이 커졌다. 노승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충격을 받은 온지유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여희영도 놀랐다. 노승아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언니!”김예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살인자들! 당신들이 우리 언니를 죽인 거야!”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승아를 안았다.“얼른 의사 불러요!”김예진은 그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병실 밖으로 나가 의사를 불렀다.의사는 서둘러 노승아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혼란스러웠던 상황은 몇 분간 지속하였고 다시 평온해졌다.그들은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김예진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누군가와 연락하고 있었다.여희영은 그제야 진정되었다. 이상하리만큼 냉정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진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지유야, 아까 많이 놀랐지?”온지유는 여희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고모님...”“그래, 임신했는데 피를 보았으니 많이 놀랐겠지. 얼른 가서 쉬어.”여희영은 이미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그녀의 생각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방금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어서 너한테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었네. 미안해, 이 일은 내가 알아
“이현...”그녀가 다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여이현은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소식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 관리하세요. 누구도 노승아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쁜 영향을...”여이현은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꼭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다.그 순간 온지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여희영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여이현은 노승아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행여나 연예인 앞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말이다.물론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이상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귀찮게 물어보지 말자며 속으로 생각하곤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의사라면 분명히 그녀에게 정확한 답을 줄 것이다.의사에게 노승아의 상태를 물어본 후에야 그녀는 노승아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전에는 목을 다쳐 노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었다.게다가 분명 한쪽 귀만 문제가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왜 양쪽 모두 청력을 잃게 된 것일까.의사는 그녀에게 노승아의 청력은 원래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이현이 예전에 노승아에게 붙여준 의사는 세계 최고의 의사였으니까.100%의 확률로 나아질 수 있었다고 했다.설령 목소리는 예전과 달라져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해도 청력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하지만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만약 노승아의 귀가 계속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마 영원히 청력을 잃고 살게 될 것이다.온지유는 다소 충격에 빠졌다.노승아에겐 질병이 많았기 때문이다.온지유가 또 물었다.“그러면 노승아 씨 상황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어떤 사람들은 청각에 문제가 있어도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문제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후천적인 겁니다. 뇌에 손상을 입거나 귀를 세게 다친 환자만이 이런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