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지유의 발걸음이 멈췄다.싸늘한 한기가 발끝으로부터 천천히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었다.지금 저게 무슨 말이지?그녀와 결혼한 게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지분 때문이라니?지유는 몸을 뻣뻣하게 돌려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문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여희영은 지금 화가 잔뜩 난 채 서 있었고 여이현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네.”짤막한 그의 대답에 지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현이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건 할아버지 지분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결혼식 당일 밤 그녀와는 아무런 사이로도 발전할 생각이 없다고, 그녀에게 주제를 알라는 듯이 말했던 것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다.그녀는 처음부터 그저 장기 말일 뿐이었다.“네가 쉽게 타협할 애가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 지유는? 너 이거 지유한테 못 할 짓 하는 거야.”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보상해줄 생각이에요.”여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태도에 더욱더 화가 났다.“지유한테 잘해준 게, 그게 다 보상이었다는 소리니?”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맞아요.”지유는 그의 말에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뒤로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보상 때문이었다고?다정하게 챙겨주던 그 모습이 전부 다 보상 때문이라고?이용한 게 미안해서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잘해줬던 건가?지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여이현, 너 대체 왜 이렇게 됐니? 대체 언제부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된 거냐고! 지금의 널 보고 있으면 네 엄마가 보이는 것 같아서 치가 떨려. 정말 실망이다.”여희영은 지금 상당히 흥분하고 있어 목소리도 무척이나 컸다. 지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들을 용기가 없었다. 여기서 더 많은 걸 알게 되면 상처받는 건 어차피 자신일 테니까.지유는 도망치듯 그 서재에서 멀어져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더니 바
밖으로 뛰쳐나온 지유는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전혀 추운 줄 몰랐다. 그저 지금은 어디론가 도망가고만 싶을 뿐이었다.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서서히 발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바닥을 바라보니 어디선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지유는 그제야 자신이 눈물범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들이 볼을 타고 쉴 틈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모든 게 다 가짜였다.그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순간들도, 설렐 만큼 다정했던 그의 모습들도 전부 가짜였다.그는 그저 그녀에게 보상해준 것뿐이었다. 단지 그의 죄책감 때문에.지유는 이제야 노승아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여이현이 그녀와 결혼한 건 이용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일말의 호감도 작은 떨림도 없었다.지유는 지금 부는 차가운 바람보다 마음이 더 시리고 추워 자신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마치 상처받기 싫은 아이처럼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상처는 받았고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유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뒤에 있는 큰 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처음부터 저 자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지유는 지금 지갑도 핸드폰도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아 이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팔을 감싸고 정처 없이 길가를 거닐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릿하나 싶더니 이내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한편, 여희영은 서재 문고리를 잡고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현에게 경고했다.“네가 한 말 꼭 지켜야 할 거야. 지유는 상처받아도 되는 그런 애 아니야. 그 노승아인지 뭔지 하는 애보다 훨씬 더 나은 아이니까 처신 똑바로 해. 노승아가 눈에 밟혀도 이제는 눈길도 주지 마! 만약 지유가 상처받기라도 한다면 내가 너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알아들어?!”“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이현은 냉랭한
전화기 너머에서 확신하지 못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온지유 씨가 사무실에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는 건 맞습니다만 쭉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이현도 한때는 지유를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언제나 선을 지키고 실수 한 번 없었던 그녀였기에 그 의심도 머지않아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날 일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가 많이 긴장한 듯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또 컴퓨터도 끄더니 드디어 서재에서 나왔다.안방에 도착해 보니 불은 켜져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지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핸드폰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이리저리 찾아보다 그 어디에도 지유가 보이지 않자 이현은 결국 도우미에게 물었다.“집사람은 어디 갔습니까?”“아까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도우미도 잘 모르는듯한 눈치였다.지유는 별장 그 어디에도 없었고 핸드폰을 지니지 않아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이현은 슬슬 걱정됐는지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지유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찾아내세요!”...지유는 힘겹게 눈꺼풀을 떴다.그녀는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 듯 눈을 뜨자마자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병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깨셨어요, 환자분?”그때 마침 간호사가 옆으로 다가왔다.지유는 그녀를 보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환자분이 길가에 쓰러져있던 걸 어떤 마음 착한 분이 병원에 데리고 오셨어요. 핸드폰도 없이 왜 추운 날 혼자 밖에 돌아다니셨어요. 그분 아니었으면 환자분 정말 길가에서 동사할 수도 있었다고요.”지유는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밖을 보니 벌써 다음날 낮이었다.“저혈당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핸드폰 빌려드릴 테니까 얼른 가족분들에게 연락하세요. 입원 절차도 아직이라 그것도 해주시고요.”가족?부모님에게 연락하면 걱정하실 게 뻔했다.여이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기다려요. 형한테 전화하고 올게요. 아마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지유가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알리지 말아주세요.”“아까 간호사가 한 얘기 못 들었어요? 가족분한테 연락 안 하면 퇴원은 안 된다고 한 거.”지유는 석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괜한 참견하지 말고 알리지 말아주세요.”지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고집은 무척이나 셌다. 게다가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말하는 태도도 이현과 똑 닮아있었다.“형 지금 형수님 찾는다고 난리에요. 그리고 저는 의사로서 형한테 연락해야겠으니까 그렇게 아세요.”지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석훈은 이현의 동생이기에 그와 마주한 순간 이렇게 될 걸 예상했어야 했다.석훈은 행여나 지유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이현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잠시 뒤, 이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병실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지유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어떻게 된 거야?”이현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려는데 지유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이에 손이 어색하게 공중에 굳어버린 그는 그녀의 얼굴색을 한번 보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길가에서 쓰러졌다며. 대체 왜 그 시간에 집이 아닌 거기에 있었던 건데?”그는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물었다.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만 했다.“심심해서 산책 좀 하다가 갑자기 저혈당으로 쓰러진 것뿐이에요. 어제 얼마 못 먹어서 그런 가봐요.”이현이 고개를 돌려 석훈을 바라보았다.“저혈당은 맞아.”뭐가 됐든 일단 사람은 찾았으니 큰 근심은 덜었다.지유는 그 뒤로 줄곧 창문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이현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석훈은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일단 이현을 복도로 데리고 나
더는 그에게 분에 맞지 않는 걸 바라면 안 된다. 두 사람 사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이게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다.이현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으면서도 또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뭐라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럴 마음도 싹 사라졌다.“다음번에는 혼자 나가지 마. 나가거든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가던가, 아니면 누구랑 같이 가던가 해. 그래야 바로바로 널 찾을 수 있으니까.”지유는 그 말에 쓰게 웃었다.대체 언제까지 걱정하는 척을 하려는 거지?그는 아마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도 보상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겠지?“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지유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이현은 의자를 가져와 병상 옆에 앉고는 그녀를 한번 쭉 훑어보다 확실히 아무 문제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혹시 그날 밤 일 기억해?”“그날 밤 일이라뇨?”“내가 술에 취한 그날 밤 말이야.”담담한 그의 말에 지유는 순간 심장이 움찔했다.갑자기 왜 또 그 일을 묻는 거지?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 건가?지유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날 밤 일은 왜요?”“그날 밤 그 여자 아직 못 찾았어.”이에 지유가 긴장을 내려놓으며 주먹을 쥔 손을 풀었다.“그 일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어요?”이현이 미간일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기억하면 안 되나 봐?”“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지유가 서둘러 답했다.이현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더욱더 그날 밤 그 여자가 자신인 걸 들킬 수는 없었다.만약 자신인 걸 알기라도 하면... 아마 그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제가 대표님 찾으러 호텔에 갔을 때 확실히 어떤 여성분이 나오셨어요.”“너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이현이 묻자 지유가 다시 긴장하며 티 안 나게 그와 시선을 피한 뒤 답했다.“글쎄요?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그 여성분과 함께 한 건 대표님이시
“온지유.”이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지유가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 너지?”지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그녀는 빠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대표님, 농담도 참. 저는 둘째 날이 돼서야 도착했잖아요. 게다가 윤정 씨 보고 대표님 옷도 가져드리라고 했고요. 만약 제가 그 여성분이었으면 대표님께서 진작 알아채지 않았겠어요? 차라리 저였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지금쯤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웃으면서 얘기하는 그 모습을 보니 이현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데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러면 쓸데없는 추측하지 말고 누군지 알아 와!”이현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병실을 나가버렸다.그가 나간 뒤 지유는 곧바로 웃음을 지워버렸다.그리고 몇 초 뒤 그녀가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의사 한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의사는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가족분은요?”“괜찮아요. 저한테 얘기해주시면 돼요.”의사는 진단서를 보더니 미간을 미세하게 찡그리고 말했다.“환자분 혹시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요?”그 말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임신?설마...고작 그 한 번으로 임신이 됐다고?지유는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선생님, 혹시 다른 환자분과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온지유 씨 맞으시잖아요. 온지유 씨는 지금 임신한 상태입니다. 이제 막 한 달 정도 됐네요.”가만히 생각해보니 생리가 며칠 늦어지기는 했다.하지만 몸이 피곤할 때면 이런 일도 많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임신일 줄이야.“어제는 정말 위험했어요. 온지유 씨는 물론이고 아이한테도요. 그러니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그리고 남편분한테는 계속 옆에 있으라고 몇 마디 당부해야겠네요.”“선생님!”지유가 다급하게 말했다.“저 임신한 거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그날 승아는 울면서 뛰쳐나갔지만 지금은 한껏 여유 있는 얼굴로 웃고 있다.그녀가 활짝 웃을 만한 즐거운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승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만간 그쪽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 일단 며칠은 봐주도록 할게요. 어차피 당신은 곧 오빠한테 버림받을 테니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지유는 벌써 이긴듯한 승아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지유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기도 모르게 배를 바라보았다.아이가 생긴 이상 희망은 품어야 했다.사무실에 도착한 후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대표이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현은 온라인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잠깐 회의를 스톱하고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네.”이현은 컴퓨터를 끄고 소파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인데?”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는 모습이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았다.지유는 순간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아까 올라오는 길에 노승아 씨를 만났어요. 즐거워 보이더라고요.”“할 말이 그거야?”지유는 입을 달싹이더니 그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본론을 꺼냈다.“저한테 그날 밤 함께 했던 그 여성분 찾아내라고 하셨잖아요.”“그랬지?”이현은 아직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만약에 말이에요. 정말 만약에 그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대표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지유는 이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술 취한 상태라 아무리 대표님이어도 피임을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그 여성분이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참 세심해?”지유는 흠칫하더니 이내 최대한 자신은 그날 밤 그 여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했다.“우리 아직 이혼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만약 다른 여자가 대표님 아이를 임신하면...
그녀의 행동에 이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거두어들였다.“내가 무서워?”지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녀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나가 봐.”지유는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아이가 생기고 나니 어딘가 변한 것 같기도 했다.지유는 아이를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예를 갖춰 말했다.“회의 중 실례했습니다. 분부하신 일은 꼭 완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러고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그녀의 말에 이현은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몇 분 뒤 진호가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회의가 아직...”“나가.”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현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사무실에서 나온 지유는 그만 다리가 풀려버렸다.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충동적으로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 항상 이성적으로 절대 이현에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결혼식 당일에도 선을 넘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던 그였기에 방금 한 말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여기까지 생각한 지유는 서둘러 지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지희야, 나 좀 도와줘.][무슨 일인데?][여자 한 명 알아봐 줄래? 여이현이 반할 만한 여자가 필요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두 사람 잘 되어 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여이현이 반할 만한 여자가 왜 필요한데 네가??]지유는 이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직접 포기하겠다고 얘기하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날 밤 그 여자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만약 인내심이 다 한 여이현이 직접 그 여자를 찾아내게 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그에게 들키는 순간 배 속의 아기는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든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