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이연우는 자신감 넘치고, 매혹적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조용히 방현준의 곁에 서 있었고 따스한 눈빛으로 방현준을 바라보고 있었다.마치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그녀의 시선은 온전히 방현준에게만 머물러 있었다.그 뼛속까지 스며든 사랑은 심형빈의 가슴에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과 쓰라림을 몰고 왔다.그녀의 세상은 이미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방현준, 앞으로 꼭 연우한테 잘 해줘야 해.”심형빈이 불현듯 말했고 그 목소리는 유독 간절했다.방현준은 싸늘하게 웃으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너는 본인 일이나 잘 챙겨. 내 여자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그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형빈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심형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이연우를 바라볼 뿐이었다.그 모습을 본 방현준은 곧장 그의 시야 앞을 막아섰다.그 행동은 곧 선언이었다. 이연우는 자기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심형빈이 더 이상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경고였다.심형빈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그는 애써 몸을 곧게 세웠다.그는 미안한 눈빛으로 이연우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정말 미안해. 네 삶을 방해해서... 앞으로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그는 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은 몹시 쓸쓸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 힘을 짜내는 듯했다.순간적으로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듯 세상에 홀로 버려진 외로운 노인처럼 보였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심형빈의 쓸쓸한 뒷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그때, 천둥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온 세상을 산산조각 내버릴 듯 요란했다.곧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바깥은 순식간에 폭우 속으로 잠겨버렸다.온 세상이 두꺼운 물의 장막에 가려진 듯했다.“심형빈에게 우산 하나쯤은 갖다줘도 돼.”방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그의 시선은
“심형빈 씨, 사람 잘못 본 거예요. 지금 당장 고수영 씨에게 전화해서 당신을 데려가라고 할 거예요.”이연우는 꽃병을 꽉 움켜쥔 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렇게 감정이 불안정한 시한폭탄 같은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다.언제 어떤 돌발 행동할지 알 수 없으니 고수영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하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그녀는 다른 한 손을 슬며시 휴대폰 쪽으로 가져가 바로 전화를 걸려고 준비했다.“연우야, 너 정말 방현준이랑 만나는 거야?”심형빈의 시선은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사진으로 향했다.사진 속 이연우와 방현준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모습은 너무도 다정하고 행복해 보여 마치 세상에 둘만 있는 듯했다.심형빈의 눈빛에 고통과 상실감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고개를 천천히 떨구며 생각했다.그토록 오랜 세월 이연우와 함께했지만 이렇게 다정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혼인신고서에 붙어 있던 딱딱하고 어색한 사진 말고는 본래라면 당연히 찍었어야 할 웨딩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그때는 늘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하면 된다고 미뤘다.하지만 기회는 그의 무심함과 무책임 속에서 흘러가 버렸다.심형빈의 가슴에는 깊은 자책이 밀려왔고 이연우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내가 누구랑 함께하든, 당신과는 상관없어요. 어서 가요. 조금 있으면 현준 씨가 돌아올 거예요.”이연우는 그가 보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에도 전혀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왜 하필 지금 와서 이런 순애보 연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과거에 잘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연우야, 안아 줄 수 있을까?”심형빈의 목소리에는 떨렸고 간절했다.요즘 그는 마치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진 듯 계속해서 이용당하고 시달리며 지쳐가고 있었다.그것들을 대응하며 그는 점점 탈진했고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지금 그
통화를 마친 뒤, 방현준은 길게 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베이랜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시각, 베이랜드 안에서는 이연우가 이미 샤워를 마쳤고 온몸에서 산뜻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녀는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다가 막 잠에 들락거릴 무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도 방현준이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이연우는 급히 일어나 헐렁한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그러나 거실에 도착해 눈앞의 인물을 확인한 순간, 얼굴의 웃음은 단번에 굳어 버렸고 놀람과 경계심으로 뒤섞였다.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거실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심형빈이었다.“당신이 어떻게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거예요?”이연우는 눈을 크게 뜨고 믿기 어렵다는 듯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두 손으로 가운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연우야, 내가 너를 잘 안다고 했잖아. 네 집 문 비밀번호쯤은 당연히 알지.”심형빈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 탓에 그 웃음은 더욱 일그러져 보였다.온몸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풍겼고 발걸음은 비틀거리며 위태로웠다.이연우는 경계심을 잃지 않은 채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가슴은 통제할 수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시선은 재빨리 주변을 훑으며 무언가 방어할 수단을 찾았다.곧바로 장식장 위에 놓인 꽃병에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꽃병을 움켜쥐어 가슴 앞으로 끌어안았다.지금 순간, 그것이 자신을 지켜 줄 유일한 방패처럼 느껴졌다.“심형빈 씨, 경고하는데 다가오지 마요!”그녀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마치 적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심형빈의 흐릿하던 눈빛 속에 잠시 쓸쓸함이 스쳤다.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고 체념한 듯했다.“연우야, 네 마음속에서 나는 늘 이런 사람인가 보지?”쉰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설명하기 힘든 피로와 허무함이 배어 있었다.이연우는 눈앞의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넓은 주차장에서 강문수는 포장된 음식을 하나하나 정리해 차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 후 남지혜에게 가져다줄 생각에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이연우가 차에 올라타자 방현준이 강문수에게 지시했다.“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강 비서가 연우를 집에 데려다줘.”이연우는 놀란 얼굴로 방현준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속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 내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걱정했다.“별일 아니야. 난 좀 늦게 들어갈 테니까 넌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방현준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그리고는 이연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뒤, 단호하게 차 문을 닫았다.차는 천천히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멀어져 가는 차량을 바라보던 방현준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차갑고 냉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굳은 얼굴로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식당 구석, 한 나이 든 여자가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정교하게 재단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곧게 치켜든 턱은 여전히 그녀의 위엄을 드러냈다.방현준은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그녀 앞으로 다가가 주저하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여기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차갑게 묻는 그의 시선은 예리했고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그 이연우라는 애, 나랑 약속해 놓고도 말을 바꿔 네 곁에 붙었구나.”노세란은 미간을 좁히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이연우’라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불편한 듯했다.“저랑 함께 있는 게 가장 옳은 선택입니다.”방현준은 곧게 허리를 세우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기세로 단호하게 자기 뜻을 내비쳤다.“그래, 배짱은 있구나. 여기에서 잠시 즐기도록 해. F국에 돌아가면 난 네가 한씨 가문의 아가씨 말고 다른 여자를 택하는 건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야.”노세란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걸렸
그때 강문수가 어떤 남자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을 때, 이연우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유난히 낯익다고 느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남자가 바로 심형빈이었다.이연우의 마음속에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심형빈이 진양 그룹에는 대체 무슨 일로 온 걸까?’“제가 한번 물어는 볼게요.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합니다.”이연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렇게 말하고는 임금영의 목소리를 더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이후 그녀는 급히 발걸음을 옮겨 방현준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이연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형빈 씨가 오늘 회사에 왔었어요?”“응.”방현준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그의 눈빛은 단호하고 흔들림이 없었고 마치 이연우가 어떤 질문을 던질지 기다리는 듯했다.“그럼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이연우의 호기심은 점점 더 커졌다.“고수영의 침대에 있지.”방현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연우야, 전남편이 그리운 거야?”그는 이연우가 심형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놀리고 싶었다. “에이, 뭐예요!”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이연우는 투덜대며 방현준을 째려보았다.가끔 터져 나오는 방현준의 귀여운 질투심에 그녀는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곧 이연우는 휴대폰을 꺼내 임금영에게 문자를 보냈다.굳이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문자로 알리는 것이 훨씬 편했다.모든 걸 끝낸 후, 다시 방현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근데 왜 굳이 그 사람을 고수영 씨한테 보낸 거예요?”그녀는 방현준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궁금했다.“네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내 앞에서 이간질하고 널 데려가겠다고 설치더라. 내가 그걸 가만히 둘 수 있겠어?”얼굴이 싸늘하게 굳은 방현준은 눈빛에 살기마저 감돌았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니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듯했
강문수는 기절한 심형빈을 데리고 급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던 이연우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강문수가 어떤 사람을 부축하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익어 보였다.이연우는 불안한 기분에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녀가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한 사이, 엘리베이터 문은 서서히 닫혀버렸고 그녀의 의문도 함께 문 뒤에 갇혀버렸다.이연우는 입술을 삐죽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잠시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이어갔다.다만, 그 잠깐 스쳐 간 낯익은 뒷모습이 그녀 마음속에 묘한 의혹의 씨앗을 남겼다.밤이 되자, 화려한 불빛이 켜진 도시는 눈부신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이연우와 방현준은 서로 손을 꼭 잡고 로맨틱한 저녁 식사를 즐기러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그때, 이연우의 휴대전화가 불쑥 울렸다.화면에 ‘임금영’이라는 이름이 번쩍이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나한테 전화하지?”심형빈과 이혼한 뒤로 그녀는 다시는 심씨 가문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임금영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곧바로 다시 울려 퍼진 전화 화면에는 이번에는 ‘심권석’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다른 사람이라면 역시 단칼에 끊었겠지만, 심권석은 달랐다.저번에도 그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아마 심형빈과의 이혼은 이렇게 원만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이 생각에 이연우는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전화를 받기로 했다.“잠깐만요, 나 전화 좀 받고 올게요.”이연우가 방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응.”방현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심권석이라는 사람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었다.비록 사생활 면에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았지만 각자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라 생각했다.어쩌면 지금의 심형빈이 이 모양이 된 것도 어쩌면 아버지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이연우는 조용한 구석으로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