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자신은 입사해서 한 번도 ‘회장님댁 아가씨’ 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이 다들 퇴근해도 자신은 남아서 야근을 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런 엔딩을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회사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혼자 걸었다.한선우가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마트에 가서 간식거리와 식자재를 사서 그대로 컨피티움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니 지오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뛰어나왔다.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오를 내려다보았다.“인제 날 좋아해 주는 건 지오 밖에 없네.”지오가 ‘야옹~’하며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여름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지오가 웃었다.“멸치가 먹고 싶구나? 알았어, 해주지.”점심에 최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은 지오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소파에 앉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최하준은 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집이 환했다.여름은 소파에 앉아서 지오 입에 소시지를 넣어주고 있었다.“내가 없으니 애한테 그런 정크푸드를 먹이는 겁니까?”쌀쌀맞은 최하준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각종 간식거리로 향했다. 감자 칩, 닭발, 닭꼬치, 쥐포⋯.지오의 입가에 뭔가 양념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다.“그냥 맛만 보여준 거예요. 아주 조금만.”여름이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양을 재보이는 시늉을 했다.“지오가 너무 덤벼서 어쩔 수 없⋯.”“고양이가 뭘 압니까. 다 사람이 알아서 조절해 줘야지.”최하준은 화가 나서 테이블의 간식거리를 싹 치웠다.“앞으로 집에서 이런 정크푸드 금지입니다. 이런 냄새도 싫습니다.”여름은 속상했다. ‘세상에 간식 냄새 싫다는 사람이 다 있네.변태인가⋯.’그러나 여름은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당신 말이 맞네요, 쭌. 앞으로는 이런 거 안 먹을게요.”“거울이나 보시죠. 얼마나 가증스러운지⋯.”최하준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양이를 안고 안방으로 가버렸다.“배고프지 않아요? 국
“아아니, 수건을 당기면 어쩝니까!”눈앞의 광경에 당황한 여름은 얼른 눈을 가렸다. 그런데 손에 하얀 수건이 들려있는 게 아닌가!‘설마⋯⋯ 당황한 나머지 내가 수건을 잡아당겼나?’“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상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강여름 씨, 당신처럼 후안무치한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습니다.”여름은 울고 싶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러그에 걸려서 미끄러진 거라고요.”“저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만. 핑계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닙니까?”최하준은 여름의 말을 믿지 않았다.여름은 자포자기한 듯 털어놓았다.“너무 퍼펙트한 바디를 보니까 뇌 정지가 와서 그만⋯.”최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한다고!“그래서 지금 날 탓하는 겁니까?“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아직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겁니까. 나가세요.”최하준의 태양혈이 벌떡거렸다. 최대한 화를 참는 중이었다.“아, 알겠어요. 나가요. 나가면 되잖아요.”여름이 허둥지둥 나가려고 했다.“잠깐!”뒤에서 짜증이 폭발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은 주고 가시죠.”손을 내려다보니 수건이 들려있었다.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여기 있습니다.”정신을 차리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와 수건을 최하준의 품에 안겼다.여름의 시선을 보고 최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정말 뻔뻔하다니까.’여름은 문을 ‘쾅’ 닫고 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귀까지 빨개졌던데 부끄러워 하는 건가?어쨌든 귀엽네.’그런 일을 겪고 나자 계속 거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여름은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그러나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얼마나 있었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숨을 고르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자는 중이에요. 내일 얘기 해요.”“잔다면서 어떻게 대답합니까?”상대의 저음이 들렸다.“억지로 열기 전에 문 여시죠.”밀려드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다가
여름은 곧 집으로 올라가서 방에 있는 물건을 챙겨 나왔다.새벽 2시였다.한밤중에 친구를 깨울 수가 없어서 차를 끌고 근처의 5성급 호텔로 갔다.로비에서 여름은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직원은 곧 카드를 돌려줬다.“죄송합니다만 이 카드는 안 되네요.”당황한 여름은 곧 다른 카드를 꺼내 건넸다.몇 장을 내밀어 보았는데도 모두 쓸 수가 없었다.그제야 집에서 카드를 모두 정지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돈은 꽤 벌었지만 모두 착실히 어머니에게 드리고 있었다.그리고 평소에는 강 회장의 카드를 썼는데 그 카드가 모두 정지된 것이다. 이제 월급 통장에 연동된 현금카드밖에 남지 않았다.직원은 좀 퉁명스러워졌다.“고객님, 호텔에서 나가서 왼쪽으로 300m 정도 가시면 모텔이 있습니다.”여름은 화가 났다.“이 호텔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라고 교육받나요?”“사실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5성급 호텔은 비싸답니다.”여름은 분노했다. 이런 모욕은 처음 당했다.“돈 없다고 누가 그래요? 내가⋯.”여름은 현금 카드를 내밀다가 멈칫했다.이 호텔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라고 해도 40만원은 줘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직장도 없고 살 곳도 없는데 몇 푼 안 되는 돈을 다 써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그냥 그리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딱딱한 직원의 말이 돌아왔다.여름은 굴욕감에 목이 메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트렁크를 끌고 발길을 돌렸다. 모텔마다 만실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겨우 2만 원짜리 싸구려 모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여름은 누군가가 이런 모텔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고등학교 동문 단톡방에 올린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한편, 최하준은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장이 직접 나와서 진찰을 했다.입술을 꾹 다물고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대충 결혼해 버린 것이 너무나 후회됐다.15분 뒤 응급 진료실 문이 열렸다.안에서 원장
최하준이 말했다.“그렇군요. 고양이는 임신하면 어떤 증상이 있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원장 선생님이 한참을 설명하더니 고양이 태교 수첩을 건네며 당부했다.“임신 기간에는 특히 영양에 신경 써 주십시오. 댁의 고양이는 워낙 약해서 유산될 수 있어요. 곁에서 잘 보살펴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최하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양이를 기르는 건지 공주마마를 모시고 사는 건지⋯.’최하준은 곧 여름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너무 심하게 대한 것 같았다.‘됐어, 집에 가서 이제부터 일단은 나가란 소리만 안 하면 되겠지, 뭐.”최하준은 컨피티움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불을 켰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작은방에 아무도 없었다. 걸려있던 옷도 모두 사라졌다.여름이 가버린 것이다.잔뜩 인상을 썼다.안겨있던 지오가 힘없이 ‘야옹~’ 하고 둘러보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짜증이 났다. ‘뭐, 잘됐네. 애초에 그런 여자랑 너무 얽히는 건 좋지 않았어. 이혼할 때도 깔끔하고⋯. 지오를 돌봐줄 이모님을 한 분 구해야겠다.’******오전 10시.여름이 몽롱한 채 소파에서 눈을 떴다.어젯밤 들어와 보니 침대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딱 봐도 시트를 갈지 않은 상태였다. 여름은 위생이 신경 쓰여 침대보다는 좀 나아 보이는 소파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세수를 하려는데 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얘, 남편하고 같이 사는 거 아니었니? 오밤중에 싸구려 모텔은 왜 갔어?“어떻게 알았어?”“고등학교 동창 단톡방에 올라왔던데?”윤서가 불쾌한 듯 말했다.“진가은 고것이 글쎄, 네가 그렇게 아가씨 노릇을 하더니 강여경이 돌아오자 집에서 쫓겨났다고 얼마나 뒷담화를 했는지 소문이 쫙 퍼졌어.”여름은 그저 ‘어~’하고 듣기만 했다.진가은도 동성의 명문가 출신이었다.그러나 매력적이고 성적까지 우수한 여름을 늘 질투했다. 그 때문에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가은이 이런 상황을 고소해 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넌 화도 안
채시아가 선글래스를 벗더니 비아냥 거리는 시선으로 여름을 쳐다보았다.“잘 됐네. 계속 이렇게 둘러대면서 살 수는 없지. 꼭 이렇게 직접 다 까발려야 되겠니? 정말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애네.” 그 얼굴을 보니 여름은 자신의 인생이 갑자기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한선우도 채시아도 오로지 자신이 상속녀라는 것만 보고 만났던 것이다.“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윤서가 분노했다.“예전에 진가은이 자기를 얼마나 괴롭혔는지도 잊고, 애초에 여름이가 곡을⋯.”“됐어, 옛날 얘기 그만해. 이제 나랑 쟤는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채시아가 다급히 말을 끊었다. “임윤서, 세상에는 주변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이 있어. 멀리하는 게 좋아.”“시끄러워. 친구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도와주는 거지 버리는 게 아니야!”윤서가 소리 질렀다.“그냥 말 섞지 말자.”여름이 냉랭한 얼굴로 윤서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우리 밥 먹으러 온 거잖아, 가자.”세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윤서가 여름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쟤 미친 거 아니니? 네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아니었으면 지금의 시아가 있었겠냐고? 진가은이 전에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데, 같이 노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네.”여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넌 화도 안 나니? 막 욕이 나오지 않아?”“욕하면 뭐가 달라지니?”여름은 쓸쓸하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그냥 이게 내 현실이지. 낳아준 부모님도, 죽마고우로 자란 선우 오빠도 날 버렸어. 가족도, 애인도, 직업도 없는데 오죽하겠어.”그런 여름을 보고 있자니 윤서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아빠가 그러시더라. 강여경 밑에서 일하려면 TH에 남고 아니면 나가라고.”여름이 서글프게 웃었다.“그러기 싫대서 쫓겨난 거야.”윤서가 위로했다.“됐어. 네 실력이면 어디서든 잘 될 거야.”그러고 있는데 직원이 두 사람을 막아 섰다.“실례합니다, 예약은 하셨나요?”“네, 네. 실장님하고 통화했어요.”윤서가
여름은 고개를 들어봤지만 끌려나가느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쏟아지는 햇살 아래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더블 쟈켓을 입은 남자는 사뭇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또렷한 콧날에 깊은 두 눈, 날렵한 눈썹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최하준⋯.이렇게 빨리 다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여름은 멍해졌다.게다가 이런 처참한 꼴로⋯.망했다. 이대로 끌려가 이혼을 당할 지도 모른다.옆에 있던 이지훈이 다가와 여름의 몰골을 가만히 보더니 바로 분위기를 파악했다.이전에 파티에서 본 적이 있었고, 여름이라면 동성 명문가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우수 인재였다.그런 여름이 이런 낭패한 꼴이라니 드문 광경이었다.이지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분은 혹시 자네의⋯.”최하준이 이지훈에게 경고의 눈짓을 보냈다.이지훈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여름아, 괜찮아?”이때 윤서가 종업원을 확 밀쳐내고 여름을 부축했다.“괜찮아.”여름이 괴로운 듯 최하준을 흘끗 보더니 대답했다.윤서는 그제야 최하준을 알아보았다. 잘생긴 것은 알았지만 대낮에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만한 미모였다.윤서뿐 아니라 진가은, 강여경, 채시아 세 사람의 시선도 그에게 향해 있었다. 이런 미모와 아우라는 처음이었다.대체 누구람?최하준은 꼼짝도 않고 서서 눈썹을 찌푸렸다. 검은 눈동자가 류 실장에게로 향했다.“여기선 고객을 이렇게 대접합니까?”류 실장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최하준을 알지는 못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동성 최고의 명문가 자제인 이지훈이 함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였다.류 실장이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 진가은이 생긋 웃으며 나섰다.“지훈 씨, 친구분이신가 봐요? 두 분이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내가 오늘 친구들이랑 밥을 먹으려고 예약을 했거든요. 그런데 임윤서랑 강여름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룸을 내놓으라는 거야⋯.”“진짜 뻔뻔하네, 우리가 예약한 걸 너희가 협박해서 빼앗은 거잖아?”윤서
최하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가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방금 이 분들처럼 나가시게 될 겁니다.”여름은 깜짝 놀랐다. 최하준을 보는 여름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 갔다.이렇게까지 편을 들어줄 줄 몰랐다. 갑자기 상대가 너무나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강여경과 친구들은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진가은이 버럭 화를 냈다.“당신이 뭔데? 우리가 누군지 알아?”최하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가은을 똑바로 쳐다봤다.이지훈은 웃음을 띠고 근처에 있던 종업원들을 둘러봤다.“이거 내가 직접 사장님께 전화를 해야 하나? 이분들 보내드리는데 힘들 좀 쓰시죠?”월인의 사장도 이지훈에게는 굽신거리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직원들은 즉시 달려들어 강여경과 친구들을 와락 끌고 나갔다.정성스럽게 차려 입은 세 사람은 곧 봉두난발이 되었다. 신발이 벗겨지기도 하고, 강여경은 스커트 자락이 찢어지기까지 했다.여름과 윤서는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류 실장은 두 사람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여름은 최하준을 흘끗 보았다. 최하준이 아무 말이 없자 여름이 입을 열었다.“저 두 분이 오지 않으셨으면 아마 쫓겨난 건 저희였겠지요. 용서 못 합니다. 직접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어요.”이지훈이 웃었다.“직접 찾아가실 것 없습니다. 제가 사장님에게 전화하겠습니다.”류 실장은 비참함에 힘이 쭉 빠졌다.윤서는 그저 통쾌할 뿐이었다. 이때 여름이 최하준의 곁에 서 있는 걸 보더니 가만히 기회를 노리다가 어깨로 툭 쳐버렸다.정신을 팔고 있던 여름은 졸지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최하준의 품으로 쓰러졌다.여름이 이렇게 가까이에 붙은 건 처음이었다. 은은하고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하준의 몸에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줄은 몰랐다.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그러나 최하준의 시선이 느껴지자 여름은 흠칫해서 빠져나오려고 허둥거렸다.“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됐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최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매운 걸 못 먹거든요.”“알지, 알지. 말 안 해도 내가 다 알지.”윤서가 깔깔거리며 여름의 손등을 도닥였다.친구까지 이렇게 놀리려 드니 여름은 울고 싶었다.내내 조용히 있던 최하준이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훑어봤다.오늘 여름은 핑크색 니트를 입고 나왔는데 네크라인까지는 우윳빛 피부였지만 목 위부터는 새빨갰다. 자그마한 귀도 끝까지 새빨개져 있었다.최하준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얼른 차를 한 모금 마셨다.윤서는 어이없어 하더니 스마트 폰을 들고 친구랑 통화하는 시늉을 했다.“월세 들어간다고? 그 아파트 괜찮은 것 같더라. 한 달에 15만 원이면 된대.”이지훈이 말했다.“15만원에 무슨 괜찮은 집을 구합니까? 왜요? 누가 집을 구합니까?”윤서가 한숨을 쉬었다.“우리 여름이요. 어쩌겠어요? 집에서 쫓겨나서 갈 데도 없는데, 돈도 없어서 어젯밤에는 모텔에서 잤다니까요. 창문도 없고, 시트는 세탁도 안 했지, 위험하게스리 보안도 엉망이더라고요.”여름은 가만히 차만 마셨다. ‘잘 한다, 내 친구. MSG 잔뜩 뿌려서 상황을 잘도 만들어내는구나.’최하준이 거의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인상을 썼다.이지훈이 원망하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어쩌자고 이렇게 연약한 와이프를 그런 데 재웠어? 너무 하는 거 아닌가?”여름이 MSG를 더 했다.“다 제 탓이에요. 지오에게 소시지를 먹여서 밤에 토했거든요. 쫓겨날 짓을 했어요. 아 참, 지오는 좀 어때요? 괘, 괜찮나요?”이지훈이 웃었다.“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지오는⋯.”“안 좋습니다.”최하준이 얼른 말끝을 잘랐다. “말로는 백날 사과해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이지훈의 표정이 미묘했다. ‘히야, 이 친구 너무 하네. 제수씨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곧 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오가 좋아져서 최하준의 분노가 가라앉아 자기편을 들어준 줄 알았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