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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허수연
레비안 아파트에서 나온 진도훈은 고개를 돌려 씁쓸한 심정으로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때 이곳에서 여해온과 여생을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잠시 뒤, 검은색의 벤틀리가 진도훈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그 차는 아주 비싼 차인 데다가 번호판도 남달라 단숨에 그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차가 멈춘 뒤 청순한 얼굴에 섹시한 몸매의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여자는 키가 170cm 초반으로 보였는데 위에는 버건디색 트렌치코트, 아래에는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고 아주 높은 검은색의 하이힐도 신고 있어 마치 여왕 같아 보였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언뜻 보였다. 차에서 내린 뒤 여자는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서 아름다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띠링.

여자의 앞에 서 있던 진도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는 고개를 홱 돌려 진도훈을 보더니 휴대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진도훈의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혹시 용 선생님이신가요?”

진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민서웅 씨랑은 어떤 사이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민서웅 씨 딸 민아름이라고 해요. 아름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민아름은 정중하게 진도훈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곳에 오기 전 오은찬은 신의라고 불리는 용 선생님 앞에서 꼭 공손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오은찬은 민서웅의 친한 친구일 뿐만 아니라 남강 상회 회장이며 율국의 아주 유명한 재벌이었는데 그런 분이 신신당부했으니 감히 진도훈을 홀대할 수 없었다.

진도훈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사람을 구하는 게 중요하니까 얼른 차에 타죠.”

민아름은 진도훈의 전처 여해온과 견줄 정도로 엄청난 미모를 가진 미인이었지만 그런 미인 앞에서도 진도훈의 마음은 파문 하나 일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네, 가시죠.”

민아름은 차 문을 열고 깍듯하게 진도훈을 차로 모신 뒤 본인은 다른 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차에 앉았다.

바로 이때 방혜나가 회사 차를 타고 아파트에서 나오다가 마침 민아름의 벤틀리 뒷좌석에 앉은 진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방혜나는 흠칫했다.

진도훈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비싼 차에 앉아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의 곁에는 엄청난 미모를 지닌 미인이 앉아 있었다.

진도훈은 방혜나를 힐끗 본 뒤 덤덤히 시선을 거두더니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뭐야? 그동안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웠던 거야? 여자가 돈이 많은 것 같은데 아마 여자한테 빌붙어서 지냈나 봐. 그러니까 대표님이랑 이혼하자마자 다른 여자랑 떠나는 거겠지!”

방혜나는 떠나는 진도훈의 모습을 이를 악문 채로 바라보다가 씩씩대며 혼잣말했다. 그녀는 빠르게 차를 타고 레빈 그룹으로 돌아간 뒤 그 일을 과장해서 여해온에게 알렸다.

“뭐라고요? 도훈 씨가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요? 그것도 벤틀리를 타는 미인이랑요?”

오후 미팅 때 필요한 서류들을 정리하던 여해온은 고개를 들어 방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맞아요. 제가 직접 봤어요!”

방혜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

“대표님, 이혼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쭉 몰랐을 테니까요. 진도훈 씨가 무엇 때문에 위자료를 받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겠어요. 이미 다른 돈 많은 여자랑 바람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님께서 지급하려는 위자료는 성에 차지도 않았던 거예요.”

여해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사실 진도훈에게 이혼하자고 한 뒤로 여해온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 우스워졌다.

“예전에는 의욕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지 최소한 점잖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나 몰래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웠을 줄은 몰랐네요. 오히려 잘됐어요. 나도 더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여해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뒤 방혜나에게 말했다.

“10분 뒤 임원 회의 진행하겠다고 알리세요. 오늘 오후에 있을 천우 그룹과의 미팅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니 말이에요.”

방혜나는 알겠다고 한 뒤 물러났다.

사무실에 홀로 남은 여해온은 책상 서랍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은 그녀와 진도훈이 찍은 결혼사진으로 여해온이 가장 좋아하던 사진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여해온은 그 사진을 줄곧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으나 그 뒤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사진을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늘 진도훈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진도훈이 오래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이제야 마음을 완전히 접을 수 있었다.

여해온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액자 안에서 사진을 꺼낸 뒤 매정하게 그것을 찢어 액자와 함께 쓰레기통 안에 버렸다.

“앞으로 도훈 씨랑 나는 더 이상 아무 사이 아닌 거야. 더는 엮이지 말자.”

...

아로하 8번 별장.

그곳은 민서웅의 집이었다.

시가총액 수조 원에 달하는 천우 그룹의 회장 민서웅은 교운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기업가였고 교운시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재벌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지금은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은 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초췌한 몰골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호화로운 침실 안, 민서웅은 의식불명인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의사들 여러 명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교운시에서 유명한 전문의들로 큰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은 예약조차 어려운 의사들이었다.

“안준혁 교수님, 우리 남편은 어떤 상태인 건가요? 나을 수 있는 건가요?”

귀티 나는 중년 여성은 전문의들이 한참을 검진해 놓고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 여성은 다름 아닌 민서웅의 아내 공채윤이었다.

공채윤은 교운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재벌가 사모님 중 한 명이었다.

안준혁은 전문의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노인으로 교운대 의대 의무부총장이자 교운대학교병원의 부원장이며 신경과 과장이었기에 교운시에서 신경과 쪽으로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안준혁은 공채윤을 힐끗 본 뒤 말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잠깐 밖으로 나가 회의를 통해 치료 방안을 상의한 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안준혁은 말을 마친 뒤 자신의 팀원들을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가 옆 서재에서 다른 전문의들과 의견을 나눌 셈이었다.

공채윤은 달리 방법이 없어 안절부절못하며 침실 안을 서성거렸다.

잠시 뒤, 민아름이 진도훈을 데리고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저 오 회장님께서 소개해 주신 명의를 모셔 왔어요.”

민아름은 곧바로 공채윤에게 소개를 한 뒤 진도훈에게 민서웅을 치료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공채윤은 진도훈이 매우 젊은 걸 보더니 의구심이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리려고 했다.

“아름아, 저 사람 명의 맞아? 확실해? 설마 사기꾼은 아니겠지?”

민아름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설마요. 오 회장님께서 소개해 주신 분인데 사기꾼일 리가 있겠어요?”

“오은찬 씨도 사람이니 속을 때가 있겠지. 혹시 저 사람이 사기꾼이라서 네 아버지가 저 사람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떡할 거야?”

“그건...”

민아름도 잠깐 망설였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진도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민서웅을 바라보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민서웅의 상태를 파악했다.

진도훈이 입을 열었다.

“환자는 위급한 상황이라서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겁니다. 저는 오은찬 씨 체면을 생각해서 온 것인데 저한테서 치료받을 생각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의님, 화 푸세요.”

민아름은 겁을 먹고 황급히 진도훈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채윤을 향해서 말했다.

“엄마, 신의님이 치료하게 허락해 주세요. 전 신의님을 믿어요.”

공채윤은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제 남편의 상태를 단번에 파악한 것 같던데,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다면 제 몸에 문제가 있는지 한번 봐주실래요? 만약 맞춘다면 그쪽이 명의라는 걸 인정하고 치료하게 할게요.”

민아름은 진도훈의 팔을 힘주어 꽉 잡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매우 염려되었는지 손바닥에서 땀이 나서 축축했다.

진도훈은 아버지를 무척이나 걱정하는 민아름의 모습 때문에 공채윤의 무례한 태도를 참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께서는 입이 자주 마르고 기침을 달고 살며 설태가 노랗고 입안도 잘 허시죠? 그건 폐열이 심한 탓이에요. 그리고 신기가 약한 탓에 냉이 많고 생리가 불규칙적이며 불면증도 있으시죠...”

공채윤은 깜짝 놀랐다.

진도훈이 말한 증상들 모두 그녀가 수년째 앓고 있는 증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설마 이 청년이 진짜로 명의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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