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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누르지 말라고 했는데...

Author: 라온하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15:11:22
로비의 긴 의자는 생각보다 딱딱했다. 무장승은 그 의자에 한 시간째 앉아 있었다.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무릎 위의 두 손은 가지런했다. 누가 보면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을 것이다. 다만 오른쪽 검지가 규칙적으로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 팀장님. 보리차 드시겠습니까."

도윤이 보온병을 내밀었다. 뚜껑을 컵 삼아 따라 놓은 보리차에서 김이 올랐다.

"...괜찮소."

"그래도 한 모금만요. 제가 집에서 직접 끓여온 겁니다. 근거는 없지만 개인 규정입니다."

"민 주임과 같은 규정이군."

"아, 들으셨습니까. 민 주임이 제 동기입니다. 같은 지하철 노선을 타고 출퇴근하다 친해졌습니다."

"본부에 지하철이 있소?"

"아닙니다. 농담이었습니다."

무장승이 천천히 도윤을 돌아봤다. 도윤이 눈을 피하면서 보온병 뚜껑을 한 번 더 내밀었다. 결국 무장승이 컵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구수하고 따뜻했다. 오늘 마신 것 중 처음으로 맛이 느껴졌다.

"...괜찮군."

"감사합니다.
라온하제

"누르지 말라고 했는데." 약속을 어긴 손가락이 진열장의 작은 버튼 위로 올라간다. 유리가 열리고, 해온의 둥근 글씨가 번진 첫 장에는 한 남자가 마지막까지 남긴 말이 적혀 있다. 국물은 꼭 마셔야 해, 그래야 안 추워. 그 순간 오백 년 묵은 둑이 무너지듯 눈 속을 달려오던 여인의 웃음소리가 쏟아지고, 얼굴이 없는 기억 속에서도 무장승의 입은 이름 하나를 부른다. 그리고 회색 문이 열린다. 눈물이 흘러내린 무장승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는 바리, "이제 둘이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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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60화 임시 감시단

    "차 드시겠습니까?""괜찮습니다.""차 드시겠습니까?""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그럼 여기 두겠습니다. 식으면 드세요."덕순이 감사단원 앞에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미 열한 번째 잔이었다. 회의 탁자는 찻잔으로 빼곡했다. 보리차, 둥굴레차, 유자차, 쌍화차, 옥수수차, 결명자차, 대추차까지. 감사단원 세 명은 서류철을 가슴에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서 차가 식어 가는 모습은 일종의 항의 시위 같았다."저, 총무팀장님. 저희는 업무 중입니다.""저도 업무 중입니다. 접객 업무요.""접객은 업무 규정에 없습니다.""제 개인 규정입니다. 근거는 없지만 사랑입니다."회의실 문 쪽에서 헛기침이 났다. 국장이 낚시 조끼 차림으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사탕 주머니, 한 손에는 낚싯대 케이스를 들고. 그는 느긋하게 걸어 들어와 감사단원들 앞에 앉더니 사탕을 한 줌씩 나누어 주었다."자, 드시게나. 입이 심심하면 감사도 짜증 나는 법이야.""국장님, 저희는 본부에서 파견된 임시 감사단으로...""알아, 알아. 근데 그 감사라는 게 지금 바로 해야 하는 건가? 물때라는 게 있잖아.""물때요?""감사든 낚시든 때가 있어. 지금은 썰물이야. 한 세 시간 기다리면 밀물이 오는데, 그때 하면 훨씬 잘 걸려.""국장님, 저희는 낚시가 아니라...""그게 그거야."감사단원 하나가 얼떨결에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다. 다른 하나가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입에 넣은 단원은 순간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굴렸다. 오래 묵은 설탕 맛이 입안에 퍼진 것이었다."맛있죠?""...맛은 있습니다만 이게 뇌물로 간주될 수 있는지 규정을 확인해야...""사탕 하나는 뇌물이 아니라 인정이야.""인정은 규정에 없습니다.""그러니까 규정 밖에 있는 거지. 규정 밖엔 좋은 것들이 많아."그때 회의실 뒷문이 열리고 무장승이 서류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수레 위에는 서류철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를 바리가 따라 들어왔다. 둘 다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59화 번지는 글씨

    "그 숟가락을 만져 봐도 되겠냐."오구는 바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내밀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이 가늘게 떨렸다. 바리는 숟가락을 건네려다 멈칫했다. 무장승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리는 그가 숟가락을 아버지에게 넘겨도 되는지 고민한다는 것을 알았다."괜찮아요, 팀장님. 아빠예요.""...알고 있소.""그럼 앉으세요.""...앉겠소."오구가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쥐고 있다가, 엄지로 손잡이 끝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리가 침대 옆 서랍에서 돋보기를 꺼내 건넸다."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했잖냐.""네.""사실은 읽으려고 한 적은 있다. 그때마다 글씨가 번졌어. 눈이 침침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구나."오구가 돋보기를 눈에 대고 숟가락을 불빛에 비췄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읽히네. 두 글자. 장, 승."병실 안이 고요해졌다. 옆 침대 할아버지도 신문을 내려놓았다. 무장승은 의자 팔걸이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람 이름 같은데 이상하지. 우리 집안에 그런 이름이 있었나 싶어서 한참 생각했다. 없었어.""아빠, 그날 아침에 엄마가 뭐라고 했어요?""그날?""사라지던 날이요."오구는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숟가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 햇빛이 병실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마른기침을 두 번 했다."그날 아침에 국을 끓였다. 해온이가. 평소엔 내가 끓이는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자기가 끓이겠다고 하더구나. 무를 크게 썰어 넣고, 파는 송송 썰어서. 나한테 한 숟갈씩 떠먹여 주면서 그러더라. '당신, 국물은 꼭 마셔야 해. 그래야 안 추워.'"바리의 손이 입가로 올라갔다. 무장승이 눈을 감았다."그 말이 이상했다. 해온이는 평생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했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58화 아직 안 죽었소, 장의사 양반

    "이 양반이 누구요. 장의사요?"병실 침대에 반쯤 기대앉은 오구가 무장승을 올려다보며 첫마디를 뱉었다. 바리는 문턱에서 한쪽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다. 검은 정장, 각 잡힌 자세, 오백 년 동안 한 번도 웃어 본 적 없는 얼굴. 병원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만했다."아빠, 장의사가 아니고요.""그럼 보험 설계사요?""그것도 아니고요.""아직 안 죽었소. 보험도 이미 들었고.""...."무장승은 허리를 정확히 사십오 도로 숙인 채 입을 열었다."따님과 같이 왔습니다.""그건 보면 알지. 그러니까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명부 관리국, 관문통과심사팀 팀장이오.""명부? 호적계 직원이오?""비슷하오.""비슷한 게 아니라 거의 같은 거지."오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승의 호적계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대화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그래서 우리 딸이랑은 무슨 사이요.""보증인이오.""무슨 보증을 서요?""...배우자 보증이오."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링거 방울이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신문을 접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걸레질을 멈췄다. 바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배우자.""...그렇소.""내 딸이 혼인신고를 했다는 거요?""서류상으로는 그러하오. 다만 아직 정식 절차는...""서류상으로 혼인했는데 나는 몰랐다 이거요."오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링거대가 흔들렸다. 바리가 당황해서 달려가 아버지 어깨를 눌렀다."아빠, 누워 계세요. 설명할게요.""설명은 필요 없고. 이 양반한테 몇 가지만 물어봐야겠다.""무슨 질문요.""사위 될 사람한테 물어볼 건 정해져 있지. 나이, 월급, 술, 본관."바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나이'가 제일 위험했다. 무장승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정직하게 오백 년이라고 답할 사람이었다."나이부터 대시오.""....""왜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57화 이십 년 만의 첫마디

    "밥은 먹었니?"바리는 문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이십 년 만에 만난 엄마가 한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천장에서 실이 내려오는 본부장실 한가운데, 낮은 탁자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낡았지만 깨끗한 회색 제복, 바리와 똑같이 처진 눈꼬리. 얼굴이 희미하게 투명했다. 손등 너머로 방석 무늬가 비쳐 보였다."...엄마?""응. 밥은 먹었어? 여기 오는 길이 멀었지?""어묵 먹었어요.""어묵이 밥이니.""국물도 마셨어요."해온의 눈이 크게 열렸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다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엄마를 껴안았다. 팔이 허공을 지나치지 않을까 겁이 났는데, 몸은 분명히 있었다. 가볍고 서늘했다. 겨울 빨래 같은 냄새가 났다."왜 이렇게 가벼워요.""실을 붙잡고 있으면 그래. 조금씩 닳거든.""실이요?""네 실."해온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금빛 가닥이 바리의 머리 위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 가닥의 중간쯤에 은색 실 한 줄이 감겨 있었다. 해온의 손목에서 뻗어 나온 실이었다."끊어지지 않게 이십 년 동안 잡고 있었어. 놓으면 네 인연이 한꺼번에 풀려 버리니까. 그런데 요즘은 내 손이 먼저 닳아서...""엄마.""괜찮아. 놀라지 마. 네 실이 가늘어지는 건 네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야."해온의 시선이 문가로 옮겨 갔다. 거기에는 무장승이 서 있었다. 정장 단추를 정확히 두 번 채운 채, 양손을 배 앞에 모으고, 허리를 정확히 사십오 도로 숙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일 분이 지났다. 해온은 가만히 기다렸다. 바리는 엄마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이 사람이 국장의 가르침을 진짜로 지키고 있었다. 침묵을 못 견디는 게 무례한 거라고 했던 그 말을."...어머니."마침내 무장승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따님과 같이 왔습니다."해온이 손으로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56화 장모님 첫 인사 모의고사

    "자, 다시 한 번 갑니다! 팀장님, 문 열고 들어오는 장면부터요!"덕순이 손뼉을 짝 쳤다. 총무팀 회의실은 어느새 연극 무대가 되어 있었다. 책상은 벽으로 밀렸고, 한가운데에 의자 하나가 놓였다. 의자 위에는 덕순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쪽 찐 가발, 손에는 부채였다."저는 지금부터 해온 선배, 아니 바리 언니의 어머님입니다. 사위 될 분의 첫인사를 받는 장모님이에요.""...사위가 아니오.""이 상황에선 사위예요, 팀장님. 극에 몰입하세요.""극이 아니라 접견이오.""극이든 접견이든 첫인상이 중요하다고요!"무장승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장 단추를 두 번 채웠다가 풀고 다시 채웠다. 손에는 열두 장짜리 종이가 들려 있었다. 바리는 구석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탕이었지만, 기분은 팝콘이었다."팀장님, 그 종이는 뭐예요?""...인사말 초안이오.""열두 장이요?""압축한 것이오. 원본은 서른 장이었소.""압축이 그 정도면 원본은 소설이네요.""소설이 아니라 진술이오.""팀장님은 진술을 소설처럼 쓰세요."덕순이 부채로 의자 팔걸이를 탁 쳤다."자, 시작! 들어오세요!"무장승이 문을 열고 한 걸음 들어섰다. 그리고 멈췄다. 허리를 정확히 사십오 도로 숙였다.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명부 관리국 관문통과심사팀장, 무장승이오. 오늘 이 자리에서 따님의 보증인으로서 따님이 겪은 사건의 경위를...""스톱! 컷!"덕순이 부채를 번쩍 들었다."팀장님, 장모님한테 사건 경위를 보고하는 사위가 어디 있어요.""...어머니께서 알고 싶어 하실 것 아니오.""장모님이 알고 싶은 건 딱 세 가지예요. 우리 딸 밥은 먹고 다니는지, 얼굴은 좋아졌는지, 그리고 당신이 우리 딸을 좋아하는지.""...순서가 있소?""순서는 없어요. 대신 세 번째 질문에 말문이 막히면 큰일 나요."무장승의 귀 끝이 서서히 붉어졌다. 바리는 사탕을 입에 문 채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이 남자는 첫 번째와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55화 국 그릇을 든 남자

    "다음 장, 넘겨도 돼요?""...잠깐만. 숨 좀 쉬겠소."무장승은 진열장 앞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한참 동안 숨만 쉬었다. 바리는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놓으면 그가 어딘가로 쓸려 갈 것 같았다. 바닥은 차가웠고, 열린 유리 위로 서류철의 낡은 종이가 천천히 숨 쉬듯 일어서 있었다."저, 팀장님. 휴지 있습니다."도윤이 어느새 곁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는 각 티슈가 통째로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대답했다."총무팀 덕순 씨가 어제 택배로 보냈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거예요'라는 쪽지와 함께.""덕순 씨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는 거예요?""저도 무섭습니다."바리가 한 장을 뽑아 무장승 손에 쥐여 주었다. 그는 휴지를 받아 들고 한참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걸로 뭘 하는 건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바리가 그의 손을 잡고 눈가를 대신 닦아주었다. 도윤은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가, 선희의 구두 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리자 슬쩍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읽겠소."무장승이 낮게 말했다. 바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서류철의 다음 장이 저절로 넘어갔다.관측 일지 제2장. 대상: 장승.그는 마을 어귀의 문지기였다. 해가 뜨기 전에 나와 해가 진 뒤에 들어갔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이름으로 불렀으나, 어느 해 겨울부터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다른 이름…"바리가 중얼거렸다. 다음 줄은 먹이 번져 읽을 수 없었다. 번진 자리에 해온의 글씨가 작게 덧붙어 있었다.(이 부분은 3장에서 다룬다.)"아니, 왜 하필 거기서 끊어요.""...엄마라는 분이 원래 이렇소?""저도 몰라요. 저한테는 편지 한 통밖에 안 남기셨는걸요."무장승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의 흔적 같은 것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서류철으로 눈을 돌렸다.그는 말이 없었다. 하루에 열 마디를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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