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08
Por:  RionhaActualizado ahora
Idiom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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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앞에서 아이 하나가 길을 잃었다. 민서는 그냥 잠깐 도와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고, 민서만 보면 웃었다. 잠시 후 아이를 찾으러 온 남자를 본 순간, 민서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이태건. 고등학교 시절, 이름만 들어도 뒷골목 냄새가 나던 남자. 그는 여전히 위험해 보였고, 여전히 무례했다. “우리 애가 사람 가리는 편인데.” “그래서요?” “너 마음에 들었나 봐.” 그 말이 시작이었다. 태건은 아이 핑계로 민서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아이보다 그가 더 위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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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 1화.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 1화.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

나는 대학교에 오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다.

고등학교 때처럼 등교할 때마다 복도 분위기를 살필 필요도 없고, 누가 누구랑 싸웠는지, 오늘은 또 어느 반 앞이 시끄러운지,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

딱 그 정도의 평화를 바랐다.

거창한 꿈은 없었다.

새내기답게 동아리도 들어가고, 공강 시간엔 카페에서 과제도 하고, 마음 맞는 친구 한둘쯤 사귀고.

누가 봐도 평범해서 기억에도 잘 안 남는 대학생.

그게 내가 바라던 전부였다.

“유민서?”

출석을 부르는 조교의 목소리에 나는 손을 들었다.

“네.”

낮고 조용하게 대답하자, 조교는 별다른 관심 없이 명단에 체크했다.

다행이었다.

눈에 띄지 않았다.

첫 강의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낯선 얼굴들, 아직 어색한 웃음, 새내기 특유의 들뜬 공기가 얇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는 벌써 옆자리 사람과 인스타를 교환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교재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한 칸 앞, 창가 쪽 자리를 골랐다.

너무 앞도 아니고, 너무 뒤도 아닌 자리.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교수님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을 때 의심받지 않을 정도의 자리.

중간.

나는 늘 중간이 좋았다.

“너 혹시 신입생이야?”

옆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동글동글한 인상의 여학생이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벌써 형광펜 세 개와 귀여운 캐릭터 필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응. 너도?”

“응! 나 윤하린. 같은 과 맞지? 아까 단톡에서 이름 본 것 같아서.”

“유민서야.”

“아, 맞다. 유민서. 이름 예쁘다.”

말투가 참 쉽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애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

“너 혹시 동아리 정했어? 오늘 점심시간에 부스 구경 갈 건데 같이 갈래?”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럼 같이 가자. 나 혼자 가면 이상한 데 가입할 것 같아.”

하린은 처음 만난 사람답지 않게 말을 잘했다.

정확히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고, 내가 고개만 끄덕여도 대화가 굴러가는 타입이었다.

그 덕분에 첫 강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문제는 두 번째 강의가 끝난 뒤였다.

“민서야, 우리 바로 밥 먹으러 갈까? 학식 맛없다는데 그래도 새내기니까 한 번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

하린이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나는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강의까지는 두 시간 반.

점심을 먹고 도서관 위치만 확인하면 딱 좋을 시간이었다.

“응, 가자.”

그렇게 대답하고 강의실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복도 끝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대학 건물 복도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날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했다.

“으아앙……!”

하린도 걸음을 멈췄다.

“어? 애기 울음소리 아니야?”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모인 곳은 계단 근처였다.

작은 아이 하나가 벽에 기대선 채 울고 있었다.

세 살쯤 됐을까.

연한 베이지색 멜빵바지를 입고, 한쪽 운동화 끈이 풀린 채였다. 작은 손에는 자동차 장난감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주변 학생들은 당황해서 서로 눈치만 봤다.

“뭐야, 누구 애야?”

“교수님 애 아니야?”

“미아 아니야?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아, 어떡해. 근데 나 애기 달랠 줄 모르는데.”

말은 많았지만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이는 점점 더 크게 울었다.

목이 다 쉬어가는 소리였다.

나도 처음엔 그냥 서 있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더 복잡해질까 봐.

누군가 보호자를 찾겠지.

누군가 조교를 부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울면서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순간, 발이 먼저 움직였다.

“민서야?”

하린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이미 아이 앞에 쪼그려 앉고 있었다.

“안녕.”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나를 봤다.

눈가가 빨갰고, 코끝도 빨갰다. 얼마나 울었는지 작은 어깨가 계속 들썩였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말했다.

“누구랑 왔어?”

“…….”

“아빠? 엄마? 선생님?”

아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아…….”

작게 새어 나온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나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조금 더 몸을 낮췄다.

“아빠 찾고 있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이름 알아?”

아이는 훌쩍이며 장난감을 더 꼭 쥐었다.

“아빠…… 태…….”

말끝이 울음에 묻혔다.

나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울 때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빨리 대답하라고 몰아붙이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딱히 육아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릴 때의 내가 그랬다.

울고 있는데 자꾸 왜 우냐고 물으면, 더 울고 싶어졌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도 돼.”

나는 가방 옆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냈다.

“코 닦을래?”

아이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휴지를 작게 접어 아이 코끝에 대 주었다. 아이가 어설프게 흥,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잘했어.”

그 말 한마디에 아이가 울음을 멈췄다.

정말로, 뚝.

주변에 있던 학생들까지 조용해졌다.

마치 다 같이 숨을 참은 것처럼.

아이는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내 손가락 하나를 꼭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어…….”

나는 당황해서 손을 빼지도 못하고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내 손을 잡은 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던 애가 맞나 싶을 만큼 얌전해졌다.

하린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입을 벌렸다.

“헐. 민서야, 너 뭐야? 애기 마스터야?”

“아니야. 나도 처음이야.”

“근데 왜 너한테만 진정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고 묻고 싶었다.

그때 아이가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누나.”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응?”

“가지 마.”

딱 세 글자였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약해졌다.

주변에서 몇몇 여학생들이 작게 탄성을 냈다.

“아…… 어떡해.”

“너무 귀엽다.”

“보호자 빨리 찾아야 하는 거 아냐?”

맞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보호자를 찾아야 했다.

나는 아이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일단 경비실이나 학과 사무실에—”

그때였다.

복도 끝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었다.

아이 울음이 멈춰서 생긴 조용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공기가 눌리는 느낌.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계단 아래쪽에서 한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후드 집업.

짧게 정리된 검은 머리.

무심하게 내려앉은 눈매.

손에는 작은 파란색 아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걸음은 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한 걸음씩 올라올 때마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비켜섰다.

마치 몸이 먼저 알아보는 것처럼.

나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잊을 리 없었다.

이태건.

고등학교 3년 내내, 이름만으로도 교실 분위기를 바꿔놓던 남자.

정학을 몇 번 당했다더라.

교문 밖에서 다른 학교 애들이랑 싸웠다더라.

선생님이 부모님을 불러도 아무도 안 왔다더라.

밤에는 더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더라.

그에 관한 소문은 늘 흉흉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어도 충분히 무서웠다.

키가 크고, 눈빛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애.

한 번 화나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애.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내내 그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그런데 왜.

왜 하필.

이 대학에서, 이 복도에서, 이 아이 손을 잡은 채로.

“도윤아.”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빠!”

아빠.

그 말에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태건이 아빠라고?

복도에 있던 학생들도 동시에 술렁였다.

“뭐야, 아빠래.”

“저 선배 애 있어?”

“이태건 아니야?”

“미친, 이태건 애 아빠였어?”

귓가로 속삭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태건은 주변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기억 속의 이태건과 지금의 이태건이 겹쳐졌다.

고등학교 때보다 어깨가 넓어졌고, 얼굴선은 더 날카로워졌다.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시선이 아이에게 닿는 순간 아주 짧게 흔들렸다는 것.

“어디 갔었어.”

그는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아이 어깨를 살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아빠 없어져써…….”

“네가 없어진 거야.”

“아빠가 없어져써.”

“그래. 내가 없어졌다 치자.”

태건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이상했다.

소문 속 이태건은 누구에게도 져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는 세 살짜리 아이에게 지고 있었다.

아이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태건의 시선이 그제야 내 손으로 내려왔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내 검지를 꼭 붙잡고 있는 걸 본 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시선이 천천히 내 얼굴로 올라왔다.

나는 숨을 멈췄다.

알아볼까.

아니, 못 알아보겠지.

고등학교 때 나는 그의 눈에 들어갈 만큼 존재감 있는 애가 아니었다. 늘 뒷문으로 다녔고, 복도에서 그가 보이면 화장실로 숨었다. 같은 학교였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태건은 나를 똑바로 보더니 말했다.

“유민서.”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나 알아?”

묻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태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웃는다고 하기엔 차갑고, 비웃는다고 하기엔 묘하게 느슨한 표정이었다.

“같은 학교였잖아.”

“…….”

“3년 내내 나만 보면 도망가던 애.”

나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기억하고 있었다.

왜.

왜 그런 걸 기억하는데.

하린이 옆에서 내 팔을 살짝 잡았다.

눈으로 묻고 있었다.

아는 사이야? 대체 무슨 사이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알고 싶었다.

태건은 아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다시 아이를 봤다.

“손 놔. 가야지.”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내 다리 쪽으로 몸을 살짝 붙였다.

“누나도.”

“누나는 안 가.”

“가.”

“도윤아.”

태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아이를 혼내는 건 아닌데, 어쨌든 엄한 목소리였다.

보통 아이들은 그 정도면 겁을 먹거나 울었을 텐데, 도윤은 오히려 내 손을 더 꼭 잡았다.

“누나도 가.”

복도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또 한 번 웃음 섞인 탄성이 퍼졌다.

나는 당황해서 몸을 낮췄다.

“도윤아, 누나는 수업 들으러 가야 해. 아빠랑 같이 가야지.”

“싫어.”

“아빠가 찾으러 왔잖아.”

“누나.”

그 작은 목소리가 또 나를 붙잡았다.

난처했다.

정말 난처했다.

태건과 더 엮이고 싶지 않았고, 복도 한복판에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이태건의 아이가 내 손을 놓지 않는다’는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태건은 한동안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 눈빛이 묘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이를 잃어버린 보호자의 초조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관찰하듯이.

계산하듯이.

아니, 어쩌면 흥미를 느끼듯이.

“너 애 잘 보네.”

“아니야. 그냥 잠깐—”

“도윤이 낯가림 심해.”

“…….”

“나 말고 손 잡은 사람 처음이야.”

그 말에 주변이 다시 술렁였다.

나는 괜히 목이 말라졌다.

“그건 그냥 애가 놀라서…….”

“놀라면 더 안 잡아.”

태건이 내 말을 잘랐다.

짧고 단호했다.

마치 아이에 관한 일만큼은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도윤은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 작은 손 하나 때문에, 나는 몇 년 동안 피해 다닌 남자와 복도 한복판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평범한 대학 생활.

조용한 새 출발.

눈에 띄지 않는 중간 자리.

전부 첫날부터 망한 것 같았다.

“저기, 이태건 씨.”

나는 일부러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괜히 기가 눌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 찾았으니까 이제 가도 되죠?”

태건의 시선이 내 입술 근처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왔다.

“씨?”

“……그럼 뭐라고 불러요.”

“예전엔 이름도 못 불렀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느리게 웃었다.

이번엔 확실히 웃었다.

아주 짧고 낮게.

그런데 그 웃음이 이상하게 위험했다.

고등학교 때 그를 피해 다니던 이유가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저 남자는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웃어도 무섭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고, 눈을 마주치면 괜히 내가 먼저 잘못한 것 같은 남자.

그런 남자가 지금 내 앞에서 아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상황이 말이 되나.

“도윤아.”

태건이 아이를 불렀다.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누나.”

태건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민서.”

“왜요.”

“점심 먹었냐?”

“……네?”

“안 먹었으면 같이 가.”

순간 복도 공기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하린이 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나는 정말로 귀를 의심했다.

“제가 왜요?”

“우리 애가 너 안 놓잖아.”

“그건 그쪽이 해결해야죠. 보호자잖아요.”

“해결 중이잖아.”

“그게 이거예요?”

“응.”

뻔뻔했다.

고등학교 때도 저랬나?

아니,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태건은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싫어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모르는 사람 따라가서 밥 먹는 취미 없어요.”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

“거의 모르는 사람이죠.”

“같은 학교 3년.”

“말 한마디 안 해봤잖아요.”

“지금 하고 있네.”

말문이 막혔다.

하린이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와…… 세다.”

누가 센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태건 쪽이겠지.

나는 도윤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려고 했다.

“도윤아, 누나는 진짜 가야 해.”

도윤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큰일이다.

울려고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멈췄다.

태건이 그걸 봤다.

아주 정확히.

“봐.”

“뭘 봐요.”

“너도 못 가잖아.”

“…….”

“우리 애가 너를 골랐어.”

그 말이 이상하게 복도에 선명하게 박혔다.

우리 애가 너를 골랐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이 하나가 손을 잡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피해 다니던 남자와 다시 엮일 이유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어서 대학에 온 게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도윤이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작게 말했다.

“누나, 가지 마.”

아.

나는 정말 약해졌다.

태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조금 전보다 더 깊어졌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내 반응을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아이를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끝내 못 밀어내는 사람인지.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후자였다.

“……밥만 먹는 거예요.”

결국 내가 말했다.

하린이 “미쳤다” 하고 입모양으로 외쳤다.

태건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도윤은 한 손으로 태건의 목을 감고,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워서 더 불편했다.

태건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밥만.”

“밥만.”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왜인지, 그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는 나를 지나쳐 앞서 걷다가, 몇 걸음 뒤 멈췄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돌렸다.

“도망가지 마라, 유민서.”

내 발끝이 굳었다.

고등학교 때의 내가 다시 몸 안에서 숨을 죽였다.

복도 끝에서 그를 보면 반대쪽 계단으로 도망치던 나.

이름도 불러본 적 없는 남자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3년 내내 조용히 살던 나.

그런 나를, 이태건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가 낮게 덧붙였다.

“애가 울잖아.”

도윤은 그의 품에서 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손.

놓으면 울 것 같은 얼굴.

나는 그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캠퍼스 어딘가에서 누군가 우리 셋을 사진으로 찍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나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휴대폰 하나가 황급히 내려갔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 조용한 대학 생활은, 입학 첫날 점심도 먹기 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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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우리 애가 너를 골랐다나는 대학교에 오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다.고등학교 때처럼 등교할 때마다 복도 분위기를 살필 필요도 없고, 누가 누구랑 싸웠는지, 오늘은 또 어느 반 앞이 시끄러운지,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딱 그 정도의 평화를 바랐다.거창한 꿈은 없었다.새내기답게 동아리도 들어가고, 공강 시간엔 카페에서 과제도 하고, 마음 맞는 친구 한둘쯤 사귀고.누가 봐도 평범해서 기억에도 잘 안 남는 대학생.그게 내가 바라던 전부였다.“유민서?”출석을 부르는 조교의 목소리에 나는 손을 들었다.“네.”낮고 조용하게 대답하자, 조교는 별다른 관심 없이 명단에 체크했다.다행이었다.눈에 띄지 않았다.첫 강의실은 생각보다 넓었다.낯선 얼굴들, 아직 어색한 웃음, 새내기 특유의 들뜬 공기가 얇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는 벌써 옆자리 사람과 인스타를 교환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교재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고 있었다.나는 맨 뒷자리에서 한 칸 앞, 창가 쪽 자리를 골랐다.너무 앞도 아니고, 너무 뒤도 아닌 자리.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교수님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을 때 의심받지 않을 정도의 자리.중간.나는 늘 중간이 좋았다.“너 혹시 신입생이야?”옆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고개를 돌리자, 동글동글한 인상의 여학생이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벌써 형광펜 세 개와 귀여운 캐릭터 필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응. 너도?”“응! 나 윤하린. 같은 과 맞지? 아까 단톡에서 이름 본 것 같아서.”“유민서야.”“아, 맞다. 유민서. 이름 예쁘다.”말투가 참 쉽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애였다.나는 어색하게 웃었다.“고마워.”“너 혹시 동아리 정했어? 오늘 점심시간에 부스 구경 갈 건데 같이 갈래?”“아직은…… 잘 모르겠어.”“그럼 같이 가자. 나 혼자 가면 이상한 데 가입할 것 같아.”하린은 처음 만난 사람답지 않게 말을 잘했다.정확히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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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사진 한 장의 속도
# 2화. 사진 한 장의 속도찰칵.소리는 작았는데, 이상하게 복도 전체에 크게 울렸다.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우리 쪽을 향해 있던 렌즈가 급히 바닥으로 내려갔다.아니겠지.그냥 우연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그냥 화면을 켰는데 셔터음이 난 걸 수도 있고, 그냥…….“찍었냐.”이태건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잘랐다.낮았다.그런데 낮기만 한 게 아니었다. 복도 공기를 한 번에 눌러버리는 목소리였다.남학생이 어깨를 움찔했다.“아, 아니요.”“아닌데 왜 숨겨.”“진짜 아니에요.”“보여줘.”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다.나는 아이 손을 잡은 채 굳어 있었다. 이태건은 도윤을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 아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 상태로도 이상하게 위협적이었다.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다가가서 멱살을 잡지도 않았다.그냥 서 있었다.그런데도 상대는 이미 한참 밀린 사람처럼 보였다.남학생은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결국 휴대폰을 내밀었다.태건은 받아 들지 않았다.“네 손으로 열어.”“…….”“사진첩.”남학생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주변 학생 몇 명이 작게 숨을 삼켰다.내가 말려야 하나?그 생각이 들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태건의 방식이 거칠어 보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사진이 퍼지는 건 싫었다.아니, 싫은 정도가 아니었다.입학 첫날부터 고등학교 때 피해 다니던 남자의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라니. 그것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찍힌 사진.내가 아무리 조용히 살고 싶어도, 그런 사진이 퍼지는 순간 끝이었다.“저기…….”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 태건이 나를 흘끗 봤다.“가만히 있어.”딱딱한 말투였다.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왜요?”“네 사진이야.”“그러니까 제가 말해야죠.”“말로 안 되니까 이러는 거잖아.”그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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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에타에 뜬 애 엄마
# 3화. 에타에 뜬 애 엄마[인문관에서 이태건 애 엄마 봄]제목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나는 강의동 입구 앞에 선 채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봤다.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아니겠지.그냥 누가 장난으로 올린 거겠지.사진도 없고, 이름도 없고, 정확한 내용도 없으니까 금방 묻히겠지.그렇게 믿고 싶었다.하지만 댓글 수는 믿음보다 빨랐다.방금 전까지 7개였던 댓글이 13개가 되고, 다시 21개가 됐다.새로고침할 때마다 숫자가 늘었다.[이태건 애 있어?][복학생 이태건 말하는 거 맞음?][나 아까 봄ㅋㅋ 애기 안고 있었음][여자도 같이 있던데?][애가 그 여자 손 잡고 안 놓던데 ㄹㅇ 엄마 같았음][근데 이태건 고딩 때부터 좀 유명하지 않았냐][헐 신입생이라던데?]나는 숨을 들이켰다.신입생.그 단어 하나가 목에 걸렸다.“민서야.”하린이 강의실 문 앞에서 다시 뛰어나왔다.얼굴이 심각했다. 아까 분식집에서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봤어?”나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하린이 미간을 찌푸렸다.“미친, 벌써 댓글 이렇게 달렸어?”“사진은 없지?”“내가 아는 한은 아직 없어. 근데 애들 말로 퍼지는 게 더 빨라. 방금 우리 과 단톡에도 링크 올라왔어.”“…….”“일단 들어가자. 여기 서 있으면 더 눈에 띄어.”맞는 말이었다.그런데 발이 안 떨어졌다.강의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이상하게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저 안에 들어가면, 다들 나를 볼까?혹시 벌써 알고 있을까?내가 그 ‘애 엄마’라는 소문 속 여자인 걸?“민서야.”하린이 내 손목을 잡았다.“야, 숨 쉬어.”그제야 내가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억지로 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있었다.“나 그냥 오늘 빠질까?”말이 튀어나오자마자 내가 더 놀랐다.하린도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안 돼.”“왜.”“빠지면 더 이상해져.”“그럼 어떡해.”“들어가서 아무렇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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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아이가 부른 이름
# 4화. 아이가 부른 이름어린이집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학교 정문을 지나 골목 하나를 꺾고, 작은 문구점과 빵집 사이를 지나자 노란색 간판이 보였다.햇살어린이집.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곳이었다.아이들 그림이 붙은 유리문, 알록달록한 신발장이 보이는 현관,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종이 모빌. 대학가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나는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여기서부터는 정말 이상했다.나는 도윤의 보호자가 아니었다.이태건의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다.그냥 오늘 처음 도윤의 손을 잡아준 사람. 그것뿐이었다.그런데 왜 내가 여기까지 와 있는 걸까.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어린이집 번호였다.나는 망설일 틈 없이 전화를 받았다.“네, 도착했어요.”통화를 끊기도 전에 안쪽 문이 열렸다.중년의 선생님 한 분이 급히 나왔다.“유민서 학생 맞죠?”“네.”“아이고, 와줘서 고마워요. 보호자분도 오고 계신데 아이가 계속 학생 이름만 찾아서요.”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누나아.”도윤이었다.내 발이 먼저 움직였다.실내로 들어서자 작은 교실 한쪽 매트 위에 도윤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울어서 벌겋고,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붙어 있었다. 옆에는 체온계와 물컵, 작은 수건이 놓여 있었다.도윤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멈췄다.정말로 또 그렇게.숨이 딱 멈춘 듯, 울음이 끊겼다.“누나.”작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나는 신발을 벗는 것도 잊고 서 있다가, 선생님이 슬리퍼를 내밀어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도윤아.”가까이 다가가자 도윤이 두 팔을 벌렸다.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깐 멈칫했다.안아도 되는 걸까.내가 안아도 되는 걸까.하지만 도윤은 이미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작은 몸이 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생각보다 뜨거웠다.“열이 좀 있어요.”선생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나는 도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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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도망가지 않는 사람
# 5화. 도망가지 않는 사람약 냄새가 나는 손끝이 자꾸 신경 쓰였다.도윤은 약을 먹고도 한참 칭얼거렸다. 감기 기운 때문인지, 낯선 병원과 약국을 다녀온 탓인지, 아이는 태건의 품에 안긴 채 내 손가락만 꼭 붙잡고 있었다.“누나...”작은 목소리가 잠결처럼 새어 나왔다.나는 도윤의 손을 빼지 못했다.“응, 여기 있어.”그 말에 도윤의 손가락이 조금 더 힘을 주었다.태건은 그런 도윤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삑, 삑, 삑.문이 열리자 생각보다 작은 집 안이 보였다.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고 하기엔 물건이 많았고, 아이가 있는 집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색깔 블록과 작은 자동차들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고, 벽에는 삐뚤빼뚤 붙은 스티커가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린이용 물컵, 체온계, 반쯤 접힌 어린이집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이태건의 집.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었다.고등학교 때의 이태건은 늘 복도 끝, 학교 뒤편, 소문 속에 있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의 물컵과 체온계를 두고 사는 사람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들어와.”태건이 낮게 말했다.나는 잠깐 망설였다.“괜찮아요. 약만 먹였으니까 저는 이제...”“손.”그가 내 말을 끊었다.“도윤이가 안 놔.”내 손가락을 잡은 도윤의 손이 보였다. 아이는 태건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손은 여전히 내게 매달려 있었다.나는 결국 신발을 벗었다.“잠깐만 있을게요.”“응.”태건은 도윤을 방 안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눕자마자 다시 칭얼거리며 내 손을 찾았다. 나는 침대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도윤아, 누나 여기 있어.”“가지 마...”“안 가. 잠들 때까지만 있을게.”“잠들면 가?”작은 눈이 반쯤 떠졌다.그 질문에 대답이 막혔다.아이의 말은 가끔 너무 정직해서, 어른의 애매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태건이 대신 말했다.“누나는 집에 가야 돼.”도윤의 입술이 삐죽였다.“싫어.”“도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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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비상 연락망
# 6화. 비상 연락망[이번엔 아닌데]휴대폰 화면에 뜬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이번엔 아니라니.도윤이 핑계가 아니라면, 대체 뭐라는 건데.나는 큰길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채 답장을 쓰려다 지우고, 다시 쓰려다 또 지웠다.처음엔 [무슨 뜻인데요]라고 썼다가 지웠고, 그다음엔 [장난하지 마요]라고 썼다가 지웠다.결국 가장 무난한 문장을 골랐다.[도착하면 연락할게요]보내고 나니 괜히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곧바로 답장이 왔다.[응]고작 한 글자였다.그런데 그 한 글자가 이상하게 사람을 더 신경 쓰이게 했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새 메시지는 없었다.“미쳤나 봐.”작게 중얼거리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나를 흘끗 보고 지나갔다.나는 얼굴이 뜨거워져 괜히 빠르게 걸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현관문을 닫자마자 온몸에 힘이 풀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그대로 신발장 앞에 쪼그려 앉았다.하루가 너무 길었다.대학 첫날이었다.그냥 대학 첫날.그런데 나는 오늘 길 잃은 아이를 달랬고, 고등학교 때 피해 다니던 이태건과 재회했고, 아이 엄마라는 소문에 휘말렸고, 병원에 갔고, 태건의 집까지 다녀왔다.정상적인 하루가 아니었다.절대 아니었다.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하린이었다.[야 유민서][살아있냐][답장 안 하면 너네 집 쳐들어간다][이태건 집 갔다며][너 지금 뭐 하는 중인데][설마 아직 거기야?]나는 급히 답장을 보냈다.[집이야]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나는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야! 유민서! 너 진짜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할래?“미안.”― 미안으로 끝날 일이야? 너 오늘 학교 첫날에 일진 선배 애랑 엮이고, 애 엄마 소문 나고, 병원 갔다가, 그 선배 집까지 갔어. 이게 미안으로 끝날 일이냐고.“정리해서 들으니까 더 이상하네.”― 원래 이상해!나는 신발장 앞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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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오늘 끝나고
# 7화. 오늘 끝나고“있었지.”이태건의 대답은 짧았다.그런데 그 짧은 말 하나가 강의동 앞 공기를 전부 바꿔놓았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하린은 내 팔을 붙잡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않는 얼굴이었고,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대놓고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있었다고?도윤이 핑계가 아닌 때가 있었다고?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야 했다.아니, 물으면 안 됐다.여기서 더 말을 이어가면, 지금 우리를 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었다.나는 가방 앞주머니에 넣은 빨간 미니카를 손으로 꾹 눌렀다.“저 수업 가야 해요.”“알아.”“그럼 비켜요.”태건은 나를 보다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그런데 비켜서도 완전히 길을 터준 느낌은 아니었다. 지나가려면 그의 어깨 옆을 스치듯 지나가야 했다.일부러 그런 건가.나는 괜히 그를 노려봤다.“이태건 씨.”“태건.”“네?”“또 씨 붙인다.”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하린이 옆에서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수업 늦었거든요.”“끝나고 연락해.”“왜요?”“도윤이한테 장난감 받았다고 말해야지.”“그건 그쪽이 전하면 되잖아요.”“네가 직접 해야 좋아해.”또 도윤이.분명 도윤이 핑계인 걸 아는데, 완전히 거절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도윤은 정말 나를 찾았고, 정말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지금 내 가방 안에는 도윤이 준 빨간 자동차가 들어 있었다.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볼게요.”“생각만?”“연락할게요.”“언제.”“수업 끝나고요.”그제야 태건은 조금 물러났다.“그래.”나는 하린에게 끌리듯 강의동 안으로 들어갔다.등 뒤에서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이태건의 시선인지, 다른 학생들의 시선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강의실에 들어서자 하린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야.”“왜.”“나 심장 터질 뻔했어.”“내가 더 그래.”“쟤 방금 고백한 거 아니야?”나는 자리에서 가방을 내려놓다 말고 하린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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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아빠가 물어본다면
# 8화. 아빠가 물어본다면“내가 물어봐야지.”이태건의 말이 공원 한가운데 똑 떨어졌다.나는 도윤을 안은 채 굳어버렸다.도윤은 신이 난 얼굴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말을 받은 태건이 무슨 식으로 되돌려놓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이었다.“아빠가 물어봐!”도윤이 박수를 쳤다.나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도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도윤아, 누나는 같이 못 살아.”“왜?”너무 순수한 질문이었다.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지.집이 달라서?누나는 학생이라서?아빠랑 누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서?마지막 말은 왜인지 입에 올리기 이상했다.나는 도윤의 모자 챙을 살짝 고쳐주었다.“누나는 누나 집이 있거든.”“우리 집도 있어.”“응. 도윤이 집은 아빠랑 도윤이 집이고, 누나는 누나 집이 있어.”도윤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그럼 누나 집도 가져와.”어쩌면 세 살짜리에게 집은 장난감처럼 들고 옮길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나는 결국 웃어버렸다.“그건 조금 어려워.”“왜?”“집이 무거워서.”도윤은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빠가 들어.”이태건이 옆에서 짧게 숨을 뱉었다.웃은 것 같았다.나는 그를 노려봤다.“웃지 마요.”“안 웃었어.”“웃었거든요.”“들켰네.”그가 너무 태연하게 인정해서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잃었다.도윤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과 태건의 손을 각각 잡았다.“그럼 누나 맨날 와.”“맨날은 안 돼.”“왜?”이번엔 태건이 대답했다.“누나 학교 다녀야 돼.”도윤이 바로 반박했다.“아빠도 학교 가.”“아빠는 다녀와서 도윤이 보잖아.”“누나도 다녀와서 나 봐.”논리가 너무 완벽해서 순간 대답이 막혔다.태건이 나를 봤다.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봐. 우리 애 말이 맞잖아.나는 입모양으로만 말했다.‘그쪽이 말려요.’태건은 어깨를 아주 살짝 으쓱했다.정말 도움이 안 되는 남자였다.공원 산책은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정확히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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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비상 연락망 누나
# 9화. 비상 연락망 누나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이유는 분명했다.이태건 때문이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태건이 한 말 때문이다.“도망갈 거면 지금 가.”“내일은 내가 더 붙잡을 것 같으니까.”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나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걷어냈다.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었다.연락이 올까.오면 뭐라고 하지.안 오면 그건 또 왜 신경 쓰이지.스스로가 한심해서 이마를 짚었다.“유민서, 정신 차려.”혼잣말을 해도 소용없었다.휴대폰 화면을 켜자 마지막 메시지가 보였다.[이태건]이 이름 하나가 이렇게 신경 쓰일 줄 몰랐다.고등학교 때는 이름만 떠올라도 피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메시지가 오지 않는 게 신경 쓰였다. 이건 분명히 위험한 변화였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나는 놀라서 거의 던지듯 휴대폰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웠다.[이태건]심장이 철렁했다.메시지는 짧았다.[도착했냐]나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분명 기다렸으면서.왜 이제 보내는데.나는 일부러 천천히 답장을 썼다.[진작 도착했어요]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왜 연락 안 해]나는 어이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그쪽도 안 했잖아요]답장은 금방 왔다.[기다렸는데]무슨 이런 말이 다 있지.기다렸는데.그 한마디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보내서 더 어이가 없었다.나는 한참 화면을 노려보다 답장을 보냈다.[이상한 자존심 부리지 마요][너도 부렸잖아][저는 아니거든요][그럼 왜 바로 답장 안 했는데]이걸 내가 왜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씻고 있었어요]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별말 아닌데도, 그에게 보내고 나니 이상하게 사적인 말처럼 느껴졌다.한참 답이 없었다.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확인했다.그러고도 답이 없어서 괜히 베개를 팡팡 쳤다.대체 왜 답장을 안 해.그때 메시지가 왔다.[자]고작 그거였다.사람을 흔들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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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우리 집 그림
# 10화. 우리 집 그림그날 밤, 나는 색종이 꽃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비상 누나.꽃 가운데 붙은 작은 글씨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조금은 간지럽기도 했다.이상한 별명이었다.그런데 도윤이 그렇게 불렀다고 생각하니 싫지 않았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바로 꽃을 뒤집어놓았다.“아니야.”혼잣말을 했다.싫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싫지 않다고 인정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유민서였다.대학 생활 조용히 하려고 마음먹은 유민서.소문 싫어하고, 사람들 시선 싫어하고, 귀찮은 관계는 최대한 피하는 유민서.그런 내가 지금 책상 위에 색종이 꽃 하나를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었다.이태건 때문에.그리고 도윤 때문에.정확히는 둘 다 때문에.휴대폰은 조용했다.오늘은 그걸로 됐다던 이태건은 정말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신경 쓰였다.붙잡겠다더니.내일은 더 붙잡을 것 같다더니.막상 조용하니까 또 서운한 것 같아서, 나는 내 머리를 베개에 박았다.“진짜 미쳤나 봐.”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이태건]역시.아니, 역시라니.뭘 기다렸다고.나는 헛기침을 하고 메시지를 열었다.[꽃 버리지 마]나는 책상 위의 색종이 꽃을 봤다.감시라도 하는 줄 알았다.[안 버렸어요]답장을 보내자마자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도윤이가 내일 검사한대]나는 피식 웃었다.[뭘 검사해요][네가 가지고 있는지][도윤이는 세 살인데 검사도 해요?][무섭다]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무섭다라는 말이, 정말 무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도윤에게 꼼짝 못 하는 사람의 항복처럼 들렸다.나는 잠깐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다.[그럼 가지고 있다고 전해주세요][네가 말해][왜 자꾸 제가 말해요][비상 누나잖아]나는 또 이마를 짚었다.이 별명은 아무래도 오래갈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하린은 내 가방에 꽂힌 색종이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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