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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Author: 도도보

제1화

Author: 도도보
결혼한 지 3년, 그날 밤은 지나윤이 처음으로 유시진의 서재 컴퓨터를 열어 본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남편의 컴퓨터를 건드릴 일도 없었겠지만, 급하게 보내야 할 중요한 문서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파일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평생 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유시진의 컴퓨터에는 한글로 된 프로젝트 폴더들뿐이었다.

누가 봐도 HF그룹 관련 업무 파일들 말이다.

그런데 딱 하나 이상한 이름의 폴더가 있었다.

영어 세 글자, CYS.

지나윤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 폴더를 더블 클릭하자 안에는 엑셀 파일 하나만 있었고, 그 파일명은‘복수’였다.

가난한 집안의 외동딸인 지나윤에게 상장사 HF그룹 후계자인 유시진과의 결혼은, 객관적으로는 너무 과분한 자리였다.

둘의 만남은 딱 드라마 같았고 전개도 역시 그랬다.

당시 유시진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가해자는 도주했다.

그 상황에서 유시진을 병원까지 업고 뛰어간 사람이 지나윤이었다.

그렇게 유시진은 목숨을 건졌다.

얼마 후, 유시진은 대학교 정문 앞에 나타났고 하필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다.

유시진은 핑크 장미 999송이를 건네며 지나윤에게 고백했다.

그해 장미 가격이 폭등한 데다가 발렌타인 데이까지 겹쳐서, 그 정도면 최소 천만 원 정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캠퍼스 전체가 들썩거렸다.

지나윤은 그 꽃을 너무 아껴 침대맡에 두었고, 그 꽃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지만,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유시진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시진은 매번 데이트 때마다 핑크 장미를 선물했다.

졸업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은 결혼했고 지나윤은 전업주부가 되었다.

바쁜 유시진에게는 집안일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지나윤의 시어머니는 늘 말했다.

위가 약한 유시진에게는 집밥이 좋고, 가사와 살림은 아내의 몫이며 도우미가 결코 아내를 대신할 수 없다고.

그래서 지나윤은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부부 관계를 가지는 삶을 반복하느라, 둘 사이의 교류는 많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 속 엑셀 파일은 마치 유시진을 들여다보는 창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파일을 열자 사진들이 연달아 팝업처럼 튀어 올랐다.

표는 두 개의 열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문장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사진이었다.

왼쪽 맨 위에는 폴더명과 동일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CYS]

지나윤은 이게 무슨 약자인지 여러 번 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오른쪽의 알파벳은 쉽게 알 수 있었다.

[JNY]

바로 자신 지나윤이었다.

마우스를 쥔 손이 조금 흔들렸다.

양쪽 열 모두 날짜가 적혀 있었고,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왼쪽 CYS 열의 사진 속에는 같은 여자만 등장했다.

첫 번째 사진에는 여자의 발치에 999송이는 되어 보이는 핑크 장미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여자 목에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품에는 여전히 핑크 장미가 있었다

세 번째 사진에는 양손에 H사 백을 들고 활짝 웃는 모습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역시 핑크 장미가 있었다.

수북한 핑크 장미를 눈에 담고 지나윤은 오른쪽 열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전부 자신의 사진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에는 똑같은 핑크 장미 999송이.

두 번째 사진에는 똑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핑크 장미였다.

세 번째 사진에는 똑같은 H사 백과 핑크 장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러다 어느 날, 왼쪽 사진 속 여자의 약지에는 핑크 다이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동일한 날짜, 오른쪽에는 자신이 그 반지와 핑크 장미를 받으며 유시진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순간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액셀 표는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지나윤은 아무 말 없이 컴퓨터를 닫았고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유시진은 늘 핑크 장미를 선물했는데, 본인의 취향일 거라고 믿어 왔다.

유시진이 핑크색을 즐겨 입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저 숨겨진 취향일 거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설렜었다.

하지만 진짜 핑크 장미를 좋아한 사람은 유시진이 아닌 액셀 표 속의 여자였다.

그날 밤, 지나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유시진은 M국 팀과 밤새 프로젝트 회의를 해야 해서 귀가하지 않았지만, 내일 아침 병원에는 함께 가겠다고 말했었다.

며칠째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이 있었고, 유시진이 예약한 교수님을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오늘 본 것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건 아니었다.

유시진이 자신을 만난 이유가 다른 여자에게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그건 결혼 이전의 일이었다.

결혼 후엔 나쁘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정도였고 매달 생활비와 용돈은 제때 챙겨줬다.

또한 기념일과 생일도 잊지 않았다.

올해 생일엔 B사 핑크색 세트 의상을 선물했다.

사실 지나윤은 핑크를 가장 싫어했지만 말이다.

HF그룹 대표라면 주변에 많은 여자가 붙는 것이 당연한데, 결혼 3년 동안 유시진은 단 한 번도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인기 여배우와 찍힌 사진이 마케팅 계정에서 떠돌았지만, 바로 계정을 폐쇄해서 공론화되는 걸 막았다.

지나윤은 이불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스스로에게 계속 말했다.

‘내가 그냥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그래.’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잖아. 어쩌면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르지.’

지나윤의 어머니는 늘 말했다.

결혼은 결국 맞춰 가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더 아껴야 한다고.

지나윤은 자신의 결혼을 정말 소중히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꽤 어렸을 때부터 유시진을 사랑했기에.

만 13살부터 무려 십 년을 사랑했지만, 유시진은 지금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핸드폰을 들고 비밀 앨범을 열었는데 결혼 이후 한 번도 열지 않은 곳이었다.

사진은 식당처럼 보이는 곳에서 찍은 사진 한 장뿐이었다.

조명과 분위기는 어둡고 답답해서 순간 교도소가 떠오를 정도였다.

사진의 주인공은 어린 소녀였다.

치아 교정기를 낀 채 회색빛 파마를 한, 열몇 살쯤 되어 보이는 촌스러운 모습.

누가 봐도 지나윤이라고 믿지 못할 얼굴이었지만 사진 뒤편 구석에 있는 자신감 넘치는 소년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유시진이었다.

둘의 유일한 사진이었고, 그걸 투샷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동이 트려는 시각에 잠이 들었다가 알람 소리에 세 시간 만에 눈을 떴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시내 병원 앞에서 유시진을 기다렸다.

초봄의 새벽바람은 차가워 코까지 시릴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오전 8시 59분이 되자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에 급한 프로젝트가 생겨서 M국으로 출장을 가야 해서, 오늘은 같이 못 가.]

[교수님에게는 미리 말해 줬으니까 혼자 들어가면 돼. 오늘 저녁에는 못 들어가.]

이에 지나윤은 외투를 여미며 혼자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올 때 손에는 초음파 결과지가 쥐어져 있었다.

의사가 말하기는 임신 8주 차이고 현재 유산기가 있다고 했다.

이는 지나윤의 첫 임신이었다, 유시진과의 첫 아이였기에 여자는 배를 감싸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의사가 심각한 건 아니지만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자, 지나윤은 당장 유시진에게 알리고 싶었다.

통화음은 반복되었고 마음은 더 두근거렸다.

‘아마 기뻐해 주겠지?’

사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런 의구심은 들지도 않았다.

통화음이 한참 울리다가 드디어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 나...”

[회의 중이야. 별일 아니면 전화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는 뚝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이에 곧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마음은 차갑고 공허해졌다.

이때, 핸드폰 화면에 뉴스 알림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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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모두가 채연서를 위해 모인 자리였기에 일부러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머리 장식부터 발목 체인까지 온몸의 주얼리는 전부 유시진이 준 고급 핑크 다이아 세트였고, 금액만 해도 절대로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리버엠파이어 호텔은 A시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호텔이었다.이곳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 재력가지만 그 속에서도 채연서는 단연 돋보였다.유시진의 팔에 손을 얹고 걸어가는 채연서는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등을 곧게 편 채 천천히 걸었다.고귀하고 도도한 백조 같은 분위기가 온몸에서 흘러나왔다.유시진이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채연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능력 있고 뛰어난 사람만이 유시진 옆에 설 자격이 있었기에, 자신을 꾸미는 걸 아끼지 않았다.유시진은 채연서와 나란히 걷자 차갑던 얼굴이 부드러워진 듯했다.살짝 올라간 입매는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완벽했고, 은근한 여유가 감도는 분위기였다.유시진은 이런 자리에 채연서를 데리고 오는 것을 좋아했다.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체면이 서는 듯한 만족이 있었다.“어라? 저기 원래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던 자리 아닌가? 왜 전자 오르간으로 바뀐 거지?”채연서가 화려한 홀 중앙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지난주 내가 왔을 때까진 분명 피아노였는데.”유시진도 약간 의아해했다.리버엠파이어 호텔 1층 로비에서는 늘 피아니스트가 연주했기에, 피아노는 이 호텔의 상징과도 같았다.“설마 피아니스트 실력이 너무 별로여서 잘린 거 아니야?”우원재도 시선을 그 전자 오르간으로 돌렸다.“예전에 형이 말했잖아. 피아노는 좋은데 연주자가 연서 만분의 일 실력도 안 된다고.”우원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근데 연주자가 별로면 연주자만 바꾸면 되잖아. 왜 굳이 피아노까지 바꾸지? 이건 말이 좀 안 되는데...”유시진의 시선이 옆으로 내려갔는데 그 시선의 끝엔 채연서의 손이 있었다.“네가 손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유시진이 먼저 그 손을 잡았고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유감이 섞여 있었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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