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쩌면 무관심한 것 보다는 나아.’곧 유시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이제는 내가 몸값이라도 내세워야 관심 끌 수 있는 건가?”그 말에 지나윤은 눈을 크게 떴다.어떻게 봐도 어젯밤 손해 본 건 지나윤 쪽인데, 왜 유시진 말은 자기가 이용당한 것처럼 들리는지 이해가 안 됐다.한숨 섞인 표정으로 서 있는 유시진을 보며, 지나윤은 입꼬리를 살짝 내리고 휴대폰을 꺼냈다.띠링.유시진의 휴대폰이 울렸다.확인해보니 지나윤이 5만 원을 송금해 놓은 상태였다.유시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이전에 이혼 문제로 다투던 때에도, 두 사람 사이에 한 번 관계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그때도 지나윤은 현금 5만 원을 건넸다.유시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송금받았다.받으면서도 중얼거렸다.“요즘 물가가 몇 번이나 올랐는데 내 값은 그대로네.”지나윤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이번에는 5만 원을 추가로 보내 합쳐서 10만 원을 받은 셈이 되었다.곧 유시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기 실력이 이 정도 값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어젯밤 제정신이 아니어서 거칠게 굴었던 탓에, 만족도가 낮았던 걸까?’그런 생각이 스치며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그때, 지나윤이 발걸음을 옮겼다.“이제 서로서로 빚은 없는 거야.”“가지 마.”유시진이 급하게 지나윤의 손을 붙잡았다.지나윤은 손을 빼려 했지만 쉽게 빠지지 않았다.“뭐 더 바라는 거 있어?”지나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시진의 손바닥에는 땀이 차 있어 막 잡은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그러나 유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대답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자기 자신도 뭘 원하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이대로 지나윤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했다.“너, 백이천 부모님 만났지?”지나윤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유시진이 그 사실까지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내가 뭘 하든 다 보고받는 거야?”지나윤은 질문 대신
“이거 너 주려고 가져왔어.”선물을 내밀면서도 유시진의 시선은 지나윤을 향하지 않았다.뭐랄까, 긴장해서 피하는 눈빛이었다.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지나윤은 원래 이 선물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그런데 유시진의 반응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였고 정교하게 포장이 되어있었다.지나윤은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지나윤의 기억 속에서 유시진이 선물을 고를 때는 언제나 화려하고 무거운 보석이거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디자인을 선택했다.그게 유시진의 취향이었다.과감하고, 눈에 띄고, 압도적인 그런 디자인.그런데 이번 것은 전혀 달랐는데 데일리로 착용하기 좋은 디자인이었다.핑크골드 소재에, 펜던트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다양한 작은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형석 하나가 포인트처럼 달려 있었다.“이건...”“반딧불이야.”조용히 말하는 유시진에 지나윤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반딧불.’이 목걸이를 고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예전에 소년원에서 지내던 시절 밤에 유시진이 몰래 반딧불을 잡아다 준 적이 있었다.진짜 살아 있는 반딧불이였다.어둡고 숨 막히던 그 공간에서 작은 등불처럼 길을 비춰주던 존재였다.그날 밤, 지나윤은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걸 느꼈다.하지만 다음 날, 그 반딧불은 죽어 있었고 지나윤은 그 일로 눈물을 흘렸다.“독방 갇혔을 때도 안 울더니, 고작 반딧불이 하나 죽은 걸로 울어?”유시진은 위로하려던 말이었지만, 지나윤이 왜 슬퍼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지나윤이 슬펐던 건 반딧불이 죽어서가 아니었다.유시진이 자신에게 준 반딧불이 죽었기 때문이었다.그날, 지나윤은 유시진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돌아섰다.유시진은 곧장 따라와 말했다.“화내지 마. 이렇게 하자. 우리 여기서 나가면, 안 죽는 반딧불이 하나 사줄게.”그때의 유시진
그래서 유시진은 정말로 사람들 말처럼 누군가를 쫓아온 것일 가능성이 컸다.또한 지나윤은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지나윤에게 공개적으로 반박당한 뒤, 손웅정과 이연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서둘러 무대에서 내려갔다.AI가 인간 디자이너를 대체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꺼내지도 못했다.곧 포럼은 마지막 순서에 들어갔다.식사 시간, 이 시간은 자연스럽게 인맥을 넓히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다.지나윤은 그런 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조용히 식사에 집중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겨우 한 입 제대로 먹으려 할 때쯤이면 음식은 이미 식어 있었다.그때 유시진이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지나윤은 이미 유시진이 와 있는 걸 알고 있었다.발표가 끝난 뒤, 유시진이 곧장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도 보았다.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더 가까이 있었고,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유시진은 결국 뒤에서 조용히 순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지나윤의 기억 속에서 유시진이 이렇게까지 굽히는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잠깐 기다려. 밥 먹어야 해.”지나윤은 차갑게 말하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식사하면서도 같은 테이블에 앉은 디자이너들과 대화를 이어갔다.속도는 일부러 느리게 먹었고 유시진은 마치 뒤에 서 있는 경호원처럼 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 중 유시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그리고 지나윤이 일부러 유시진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아차렸다.두 사람의 결혼과 이혼이 워낙 크게 알려졌던 만큼,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럼에도 누구 하나 유시진에게 앉으라고 권하지 않았다.유시진은 계속 지나윤만 바라보고 있었다.눈을 떼지 않은 채,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지나윤이 앉아서 식사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상황조차, 오히려 즐기는 듯 보였다.당사자가 괜찮다는데 굳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사실 지나윤은 일
유시진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주얼리 디자인 업계 포럼이든,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주제든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었고 긴장 따위는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업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지나윤 한 사람에게 쏠리자, 유시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수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지나윤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손웅정 대표님이 참 열심히 사시는 것 같아서요. 자기 회사 AI 홍보하려고 저 정도까지 지어내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지어낸다고요?”손웅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아무리 피아노 시리즈 디자인의 대가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막말하시면 곤란하죠. AI가 여러분 같은 디자이너를 대체하는 건 시간문제죠.”“믿기 힘드시면, 이연아 디자이너랑 한번 비교해 보시죠. AI로 디자인하는 속도가 빠른지, 아니면 대표님이 직접 디자인하는 속도가 빠른지.”손웅정의 말을 들은 지나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손웅정 대표님은 주얼리 디자인을 쇼트트랙 경기라고 생각하세요?”그 한마디에 주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손웅정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저희 회사 AI는 단순히 스케치만 빨리 그리는 게 아니에요. 전 세계 유명 디자이너 99퍼센트의 스타일을 학습했고요.”“그 가운데 물론 대표님 디자인도 포함돼 있고요. 어떤 스타일이든 몇 분이면 완성되고요.”손웅정은 말을 이어가며 이연아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자 이연아는 곧바로 AI를 이용해, 화려하고 복잡한 주얼리 디자인을 여러 개 빠르게 띄워냈다.“보셨죠? 이게 AI의 힘이에요.”지나윤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손웅정 매니저님, 그 AI는 먼저 물리학, 금속공학, 보석학 같은 기본적인 학문부터 배워야 할 거예요.”“그래야 구조적으로 안정적이고 실제로 제작 가능한 디자인을 만들 수 있죠. 지금처럼 종이 위에서만 가능한 그림이 아니라요.”“AI가 앞으로
“지금은 난 더 이상 억지로 참고 싶지 않아.”그 말을 남긴 뒤, 지나윤은 그대로 돌아섰다.백이천은 지나윤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래서 애써 손가락을 움켜쥐어 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이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어떻게 해야 너를 내 손안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이 질문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답을 찾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짙은 회색 코니세그가 운향석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방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식사하고 있었다.유시진은 또다시 헛걸음했다.이번에는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지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통화 연결은 되지 않았고 지나윤이 번호를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D시, 마린예술센터.매년 열리는 글로벌 주얼리 아트 및 혁신 포럼이 한창이었다.지나윤은 BYC 디자이너 자격으로 초청받아 가장 앞줄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이번 포럼의 핵심 주제는 AI 기술을 주얼리 디자인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였다.많은 참석자가 AI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기술이 업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그러나 지나윤은 AI가 언젠가 디자이너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모든 산업은 변화해 왔고, AI가 지금처럼 발전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주얼리 디자인은 결국 감성과 창의의 영역이었다.그렇기에 AI는 보조 도구일 수는 있어도 대체재가 될 수는 없다고 믿고 있었다.초반 분위기는 비교적 부드러웠고,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며 토론이 이어졌다.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한 IT 기업 관계자가 신인 디자이너 한 명과 함께 무대에 올라서서는 노골적인 발언을 쏟아냈다.“주얼리 디자인의 미래는 AI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자리에 계신 유명 디자이너 여러분은 곧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라지게 될 거예요.”“머지않아 이 업계에는 여러분의 자리가 없어질 거고요. 이
“죄송하지만, 백이천과 가짜 결혼을 하라는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뭐라고?”황인주가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황인주의 표정에는 지나윤에 대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불만으로 가득했다.“지나윤, 잊은 거 아니지? 우리 이천이가 누구 때문에 식물인간이 됐었는지!”“어머니!”백이천이 옆에서 크게 외쳤다.“조용히 해.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네가 그렇게 다치진 않았을 거야.”말을 이어가던 황인주의 목소리는 떨렸다.“저도 그 마음은 이해해요.”“이해를 한다는 애가!”황인주가 다시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지나윤이 담담하게 끊었다.“그래서 제가 수십억이 넘는 치료비를 이미 부담했잖아요.”지나윤의 그 한마디에 황인주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설령 법정으로 갔어도 제가 이천의 치료비를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죄책감 때문에 충분한 보상을 드렸고요.”“그리고 그 사고를 이유로 저를 계속 압박하시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가짜 결혼이라고 해도 제 명예와 감정까지 희생하면서 백세가 넘으신 어르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아요.”“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어요. 네, 맞아요. 저 이기적으로 살고 싶어요. 이번만큼은 제 마음이 가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고 싶거든요.”“전 제가 하고 싶지 않은 걸 굳이 하고 싶지 않아요.”말을 마친 지나윤은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자 백이천이 곧바로 따라 나왔다.“나윤아, 미안해. 어머니가 너무 심하셨어.”지나윤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아니야. 네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어. 그때 일 때문에 아직도 응어리가 마음에 남아 있는 거니까. 그래도 가짜 결혼은 정말 도와줄 수 없어.”“응, 알아. 나도 억지로 시키고 싶진 않았어.”백이천의 말에 지나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럼 나 갈게.”“나윤아.”백이천이 손목을 잡았다가 곧바로 놓았다.“내가 데려다줄게.”“괜찮아. 차 가지고 왔고. 조금 있다가
“이분은 우리 부서의 새로운 동료예요. 앞으로 PO 부서의 제품 라인을 함께 맡게 될 테니 모두 잘 지내보죠.”문혜윤 팀장이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신입에게 자기소개를 요청했다.“안녕하세요. 지나윤이라고 해요.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텐데 잘 부탁드려요.”사무실 안에서 모두 박수를 쳤지만 채연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연서 씨,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장연지가 눈치 빠르게 묻자, 채연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애매하게 웃었다.대답을 피하는 그 모습은 확신을 감추려는 듯했다.설마 새로운 직원이 지나윤일 줄은 상
회장 안은 무려 3초 동안 정적에 잠겼다가 곧 폭풍우가 치듯 술렁이기 시작했다.심소희는 피터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인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은 듯 말했다.“아, 설마 피터는 이미 지나윤이 BYC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피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피터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대학 시절, 지나윤이라는 원석을 처음 알아본 사람이 바로 피터였다.백이천 역시 거의 유일하게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이에 백이천은 스스로 짐작해 냈다.피아노 시리즈의 디자인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부터, 디자이너가 지나윤일 거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지나윤에게 쏠려 있었다.그러나 지나윤은 오직 백이천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눈은 이미 넘쳐흐르는 눈물로 가득해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시선은 백이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백이천은 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지나윤 앞에 다가와, 손을 들어 지나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또 울어?”백이천의 목소리는 무척 듣기 좋았다.가벼운 바람 같기도 했고, 맑은 물소리 같기도 했다.그 목소리는 지나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목소리와 겹쳤다.그
A시 시장과 교육청장까지 백이천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자,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여자는 순식간에 풀이 꺾였다.백이천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지나윤의 손을 잡고, 여자를 두 사람 앞으로 이끌었다.그 모습을 본 유시진의 눈꺼풀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지나윤은 아직도 상황이 완전히 실감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백이천과 재회한 기쁨에 잠겨 있으면서도, 백이천이 어느새 A국 정부가 영입한 최첨단 AI 기술 인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는 사실이 지나윤으로써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